웅진·STX 이어 동양도 유동성 위기 … 과욕이 결국 화 불러
▎최근 유동성 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중견그룹 총수들. 왼쪽부터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강덕수 STX그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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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건 해당 기업 당사자들이겠지만 우리도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어요. 부실채권 문제가 우려됩니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관계자의 말이다. 동양그룹 얘기다. 유동성 위기로 풍전등화다.재계에 따르면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동양그룹의 시장성 차입금은 6241억원. 이 중 9~10월 만기가 절반 이상이다. 그러나 자매그룹인 오리온이 지원을 거부하면서 사면초가다. 동양그룹은 우량 계열사인 동양매직 매각으로 급전을 조달할 계획이다.금융권의 한숨이 깊어진 건 지난해부터 웅진·STX 등 재계 10~40위권의 중견그룹이 잇따라 유동성 위기에 몰려서다. 이들이 은행권에서 빌린 돈의 액수가 만만치 않은 만큼 은행 실적과 건전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산업은행의 경우 올 상반기 STX그룹 충당금 등의 영향으로 지난해보다 순이익이 8859억원 감소했다. 지난해 기준 재계 순위 13위(STX)·31위(웅진)·38위(동양)로 잘 나가던 이들 그룹이 잇따라 위기에 빠진 배경은 뭘까?우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내외 경기침체에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게 화를 불렀다. 동양그룹은 레미콘사업 부문인 동양메이저가 2008년 한일합섬을 인수하면서 인수합병(M&A) 시장에 본격 뛰어들었다. 이전까지 221%(2008년 1분기 기준)이던 동양메이의 부채비율은 인수 직후 353%로 뛰었다.신사업으로 활로를 뚫는다는 계획이었지만 재무구조를 악화시키는 부메랑이 된 것이다. 차입금 부담이 커지자 동양그룹은 자산을 팔아가며 부채비율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현재 동양그룹 주요 계열사는 자본잠식 상태이거나 부채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웅진과 STX도 비슷하다. 웅진그룹은 모태기업인 웅진씽크빅과 알짜 계열사였던 웅진코웨이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2008년 새한(웅진케미칼)을 인수해 수(水)처리용 필터 사업 강화에 나선 게 대표적이다. 웅진코웨이와의 시너지 효과를 추구한 건 긍정적이었지만 시장에선 새한의 수익성에 비해 과중하게 차입금을 부담한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웅진그룹은 당시 차세대 먹거리로 저울질하던 태양광 사업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2008년 웅진 폴리실리콘을 설립하면서 웅진에너지와 신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태양광 시장은 공급 과잉과 글로벌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M&A로 흥하고 M&A로 쇠하다STX그룹 강덕수 회장은 한때 ‘M&A의 귀재’란 별명이 붙을 만큼 신사업에 적극적이었다. 2007년 세계 최대 크루즈선 제조업체인 아커야즈(STX유럽)를 인수하고 해외 사업을 강화하는 등 거침이 없었다. 국내에서도 대한통운·하이닉스 등 굵직한 매물이 나올 때마다 인수를 시도했다. 그 사이 시장에선 STX그룹의 재무구조 악화와 ‘승자의 저주’를 우려했다.기업 규모를 키우기 위해선 이런 선택이 효과적일 수 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탄탄한 재무구조와 수익성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어지면서 결과적으로 독이 됐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신사업에 성공하려면 이전 조직과는 다른 조직을 꾸려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세 그룹은 사업 확장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비해 이 같은 세심한 준비엔 서툴렀다.이들 그룹은 최근 몇 년 사이 업황이 극히 침체된 건설업에서 고배를 마셨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동양그룹의 유동성 위기는 국내외 건설시장 침체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건설업황이 지속적으로 나빠지면서 시멘트 수요가 줄고 제품가격이 떨어졌다.이는 핵심 계열사인 동양시멘트의 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웅진그룹은 2007년 인수한 극동건설이, STX그룹은 새로 설립한 STX건설이 마찬가지로 유동성 위기를 키웠다. 지난해 부도 처리된 극동건설은 법정관리 상태로, 회생계획안에 따라 2015년까지 담보채무를 갚아야 한다. STX건설도 법정관리 상태다.그룹 총수들로서도 건설업의 실패는 뼈아프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지난해 공식석상에서 “진작 (건설업을) 포기했으면 이렇게까지 안 됐을 텐데”라며 통탄했다. 윤영선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건설업은 매출 규모를 키우기 쉬워 여러 기업이 인수에 나섰던 것”이라고 말한다. 외형을 키워 위상을 끌어올리려던 웅진과 STX 같은 중견그룹들로선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건설 경기가 나빠지고 좀체 회복되지 못하면서 결국 건설업에 섣불리 뛰어들었던 중견그룹의 유동성 위기로 나타났다.이왕상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건설업종에 대한 투자심리가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다”며 “올해까지 힘든 시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건설업황의 부침 또는 지속적인 악화를 헤아리지 못한 중견그룹들로선 그룹의 존망까지 좌우하는 아킬레스건을 방치한 격이 됐다.세 그룹은 이른바 캐시카우(현금수입효자)가 될 ‘1등 사업’을 거의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닮은꼴이다. 윤석금 회장은 “태양광에서 세계 1등이 되겠다”고 강조했지만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유동성 위기가 커졌을 때에도 정수기 업계 1위인 웅진코웨이 외엔 그룹에 이렇다 할 반전의 카드가 없었다. 그나마 웅진코웨이를 매각한 후에도 그룹 해체 수순을 피할 길이 없었다.STX그룹은 세계 1·2위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 같은 막강한 경쟁상대가 가까이에 있었다. 2008년 이후 조선업황 침체로 수주가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현대중공업이 최근 몇 년 간 실적 부진을 겪었음에도 재무건전성은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과 대비된다.
“건설업 진작 포기했어야” 자탄동양그룹은 2001년 계열분리 과정에서 오리온그룹에 식품처럼 수익성이 좋은 사업을 넘긴 게 독이 됐다. 식품사업은 소비자들의 기본 욕구와 직결돼 불황에 강한 대표적인 업종이다. 안영복 나이스신용평가 실장은 “동양그룹이 위기를 넘기려면 연내 최소 7000억∼8000억원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하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1등 사업이 없어 최근까지 오리온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계속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장에 돈이 되는 사업을 매각해 급한 불을 끈다 해도 미래가 더욱 불투명하다. 배진원 동양그룹 홍보팀장은 “연말까지 시멘트·화력발전·금융을 3대 축으로 한 사업구조 재편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 경쟁에서는 이겼지만 승리를 위해 지나친 비용을 감수해 오히려 위험에 빠지거나 후유증에 시달리는 상황을 일컬음. 기업들이 M&A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경쟁상대를 제쳤다가 유동성 위기에 빠지는게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