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Issue - 경제 체력은 향상, 체질은 글쎄 

1997·2008년 위기 거치며 한국 경제 뭐가 달라졌나 

신흥국 위기 한국으로 전이 가능성은 작아 … 외환·금융위기 도화선은 사방에 여전해

▎양적완화 축소 방침을 밝힌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침체에 빠진 선진국을 대신해 세계 경제의 버팀목이 된 신흥국에 비상이 걸렸다.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던 미국이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을 보이자, 인도·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신흥국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갔다. 1997년 아시아를 덮친 외환위기 재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한국은 예외처럼 보인다. 오히려 외국인 돈이 몰리고, 원화 가치는 더 올랐다. ‘신흥국 위기의 승자’라는 성급한 찬사도 나온다. 과연 안심해도 되는 걸까.

기획재정부 관료들은 2008년 9월 초 미국 뉴욕에서의 일을 굴욕으로 여긴다. 당시 신제윤 차관보(현 금융위원장)는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뉴욕으로 향했다.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을 위해서였다. 외평채는 환율 안정을 위해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이다. 당시 미국 월가나 영국 런던 금융시장에선 ‘한국의 9월 위기설’이 팽배했다.

신 차관보는 외평채 발행 계획을 발표하면서 “9월 위기설이 진짜인지 아닌지 분명히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한국 채권을 외국인 투자가들이 사면 위기설이 잠잠해질 것이라는 데 베팅한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신용 경색은 정부 판단보다 심각했고,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와병설까지 터지면서 결국 대표단은 빈 손으로 돌아왔다.

당시 기재부는 ‘외평채 발행을 연기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발행 실패였다. 이후 국내 외환·자본시장은 출렁였다.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해 11월 초 국회 답변을 통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로부터 5년 뒤인 정부는 또 한 번의 베팅을 했다. 일부 신흥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와중에 외평채 발행에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 기재부는 9월 5일 “10억 달러 규모의 10년 만기 외평채 발행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금리는 외평채 발행 사상 최저 수준이었다.


윤태식 기재부 국제금융과장은 “주요국 중앙은행은 물론 국부펀드, 대형 자산운용사 등 200여 곳의 글로벌 투자가가 참여했다”며 “대외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다른 신흥국과 차별화된 한국 경제에 해외 투자자들이 신뢰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가 ‘Buy Korea

외국인 투자금 유출로 비상이 걸린 일부 신흥국과 달리, 한국은 요즈음 시쳇말로 잘 나간다. 미국이 양적완화 축소에 나서면서 촉발된 신흥국 금융 불안은 딴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위기설이 본격화된 7~8월 우리나라 주식·채권 시장에는 외국인 투자금이 몰렸다. 세계 경제가 출렁이면 직격탄을 맞던 과거와는 다르다. 통화가치가 급락한 인도·인도네시아·브라질·베트남 등과 달리 원화 가치는 오히려 올랐다.

국내외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의 펀더멘털(경제 기초 체력)이 다른 신흥국과는 물론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교해 건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요즘 글로벌 경제상황은 1997년과 매우 유사하다. 1997년 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기습적으로 금리를 올리며 긴축 통화정책에 나섰다. 글로벌 유동성을 바탕으로 경제 성장을 이룬 아시아 신흥국에서 외국인 자본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주식·채권 시장이 무너지며 통화가치는 급락했다. 핫머니(단기 투기자금) 유입이 많고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태국·말레이시아·한국 등이 외환위기를 겪었다.

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이 양적완화 축소에 나선다는 방침을 밝히자, 인도·인도네시아·태국·말레이시아·브라질 등 신흥국에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신흥국 통화가치는 급락했다. 미국이 출구전략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4월 이후 인도·인도네시아·브라질 통화가치는 각각 25%, 12%, 14% 하락했다. 외환보유액 급감, 금리 급등으로 이어지면서 외환·금융위기로 확산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 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국내외 시장 동향 및 신흥국 위험 요인 점검’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견조한 경상수지 흑자, 양호한 재정건전성, 충분한 외환보유액, 낮은 단기 외채 비중 등을 바탕으로 환율과 금리·주가 등 주요 금융지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밝혔다. 해외 투자은행(IB)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크레딧 스위스는 최근 보고서에 ‘인도·인도네시와는 달리, 올 2분기 중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은 5.1%로 높고, GDP 대비 외환보유액(28.5%) 비율도 인도 15.3%, 인도네시아 10.5%보다높다’고 분석했다. 크레딧 스위스는 또한 최근 2개월간 한국 증시로 순유입 된 외국인 자금을 감안하면, 인도네시아발 금융 불안으로 외국인 자금이 한국 자본시장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우려는 과도하다고 밝혔다.

일본 노무라증권은 ‘2분기 중 한국의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이 2006년 1분기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며 ‘한국의 대외자금 조달 여건이 크게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외환시장 건전성은 1997·2008년과 비교해 몰라보게 좋아졌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1월 200억 달러를 갓 넘은 외환보유액은 2008년 2400억 달러, 올 8월 말에는 3310억 달러로 늘었다. GDP 대비 외환보유액 비중은 1997년 3.9%에서 올 29%로 증가했다. 한국 외환시장의 아킬레스건이던 단기 외채 사정도 좋은 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말 현재 대외 채무 잔액은 4118억 달러로 3개월 전보다 15억 달러 늘었다. 하지만 단기 외채는 1196억 달러로 같은 기간 26억 달러 줄었다. 외환 위기·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1997년 초와 2008년 중순 50%를 넘었던 전체 채무 대비 단기 외채 비중은 29%로 낮아졌다. 외국에 빌려 준 돈에서 빌린 돈을 뺀 순대외채권 역시 1997년 마이너스 611억원에서 올 2분기 1400억 달러로 급증했다.

국가신용등급은 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기준으로 1997년 B+에서 올해 A+로 상향됐다.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는 일부 신흥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7월 말 현재 18개월 연속 흑자를 이어가며 누적 365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53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한다.

단기 외채 줄고 경상수지 흑자 늘어

하지만 외국의 찬사와 호전된 경제지표에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니다. 외환위기 방어력이 강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경제의 체질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신흥국 위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미국은 아직 본격적인 출구전략에 나서지 않았다. 이르면 9월, 늦어도 연말에 실제로 양적완화 축소에 나서면 선진국 투자금이 신흥국에서 본격적으로 유출되면서 외환·금융위기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한국 경제는 금융·실물 경제에 타격을 피할 수 없다. 이미 신흥국 수출엔 빨간불이 켜졌다.

산업통산자원부에 따르면, 7월 아시아 신흥국이 포함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으로의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4% 감소했다. 또한 심각한 외환시장 불안을 겪고 있는 이른바 ‘F5(Fragile Five) 국가(인도·인도네시아·브라질·터키·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수출은 올 상반기에 전년 대비 8.8% 줄었다.




수출시장 불안하고 미국계 투자 비중 과대

외국인의 ‘바이(Buy) 코리아’가 독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8월 말 현재 외국인은 국내 상장주식 시가총액의 31.4%인 397조원을 보유하고 있다. 상장 채권은 전체의 7.4%인 100조8000억원을 보유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잔액은 8822억 달러다. 이 중 수시로 입출이 가능한 주식·채권 투자금과 차입금 비중은 80%를 넘는다. 신흥국 평균의 2배가 넘는 수치다. 특히 미국계 투자금 비중이 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미국인 투자가의 국내 주식·채권 보유액은 7월 말 현재 173조원이다. 미국 양적완화가 시행된 2008년 말에 비해 104조원이 늘었다. 이 돈이 빠져나갈 조짐을 보인다. 1~7월 미국계 국내 주식 투자금은 10조원 가량 감소했다. 미국인의 한국 주식 보유 비중은 외국인 전체의 38.5%로 가장 높다.

양적완화 축소가 본격화돼 향후 미국계 자금의 유출 속도가 빨라지면 국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전례가 있다. 2007년 말 136조원이던 미국계 국내 주식 투자금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절반 가까이 빠져나갔다. 주가는 급락했고, 원화 가치는 떨어졌다.

일부 아시아 신흥국의 원화 채권 보유 비중이 크다는 것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2011~2012년 원화 채권을 대거 사들인 아시아계 자금 6~7월엔 보유잔고를 줄였다. 서향미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그동안 원화 채권의 주요 매수 주체였던 아시아계 자금 이탈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원화 채권 보유액 중 아시아계 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33%에 달한다. 또한 국부펀드·중앙은행 자금이 많아서 자국 외환시장이 위기에 빠지면 우리나라에서 자금을 빼갈 가능성이 크다. 시티그룹은 최근 보고서에서 9월 중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양적완화 규모를 감축할 경우 단기적으로 원화 가치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사상 최대치라고는 하지만, 외환보유액이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많다. 이승호 자본시장연구원 국제금융실장은 “3300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은 충족 수준에 미달한다”고 분석한다. 적정 외환보유액에 대해선 여러 기준이 있지만, 단기 외채와 수입액, 외국인 주식·투자금을 고려한 기준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단기 외채는 약 1200억 달러, 3개월 수입 규모는 1350억 달러, 외국인 주식·채권 투자금의 33%는 약 1530억 달러다. 이를 합하면 적정한 외환보유액은 4000억 달러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흥국 위기가 한국으로 옮겨와 외국 투자금의 20~30%가 빠져 나가고, 단기 외채 상환까지 겹치면 외환보유액 잔고는 1000억 달러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무엇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적정 기준치보다 많은 외환보유액을 유지해 온 인도·인도네시아가 급격한 외화 유출을 겪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외국에서 한국에 찬사를 보내는 근거가 되는 단기 외채·외환 보유액·경상수지 등을 너무 맹신해서는 곤란하다는 견해도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경상수지나 외채는 투자나 소비의 의사 결정 후에 결과물로 도출되는 것으로 경기 순환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적고 비유하자면 사태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 증상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정성태 책임연구원은 “역사적으로 보면 대외 부분의 부정적인 영향은 대내 부문의 취약성과 결합되고 증폭되면서 금융위기로 나타났다”며 “최근 아시아 금융위기는 외환시장 불안이 각국 부동산 버블이나 투자 과열 등 금융부문 취약성으로 악화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외환보유액의 많고 적음, 경상수지 크기, 외채 규모에 더해 각국 경제 건전성에도 주의를 기울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LG경제연구원이 통화승수·실질 이자율·산업생산·주식가격·물가상승률 등 국내 부문, 수입·수출·실질 환율·교역 조건이나 미국과의 이자율 차이 등 대외 부문 10가지 국내외 거시지표를 선정해 분석 결과, 우리나라는 일부 신흥국에 비해 거시경제 취약도는 낮지만 산업생산과 수출 두 지표에서 위험도가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취약해진 경제 체질로 우리나라가 외환위기가 아닌 금융위기·은행위기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9월 4일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25위로 전년 대비 6계단 떨어졌다. 2007년과 비교하면 14계단 내려왔다. 거시경제 안정성(9위)은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노동시장 효율성(78위), 금융시장 성숙도(81위) 기업 활동 성숙도(24위), 기업 혁신(20위) 등은모두 순위가 뒤로 밀렸다. 특히 심 건 성장 동력을 잃어 간다는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9월 4일 내놓은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난해 실질 GDP 성장률은 세계 189개국 중 117위에 그쳤다. 2년 사이 60계단이나 떨어졌다. 잠재성장률은 1990년대 7%대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3% 수준으로 하락했다. 여기에 가계나 정부·기업 모두 ‘빚의 덫’에 걸려 있다. GDP대비 국가 채무는 1997년 11.9%에서 올해 36%로 늘었다. 가계부채는 1000조원에 육박해 GDP 대비 90%대로 올라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15%포인트 정도 높다. 상대적으로 안심했던 기업 채도 늘고 있다. S&P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 기업의 총 부채는 1조3000억 달러에 달한다. S&P는 지난해 GDP 대비 115%였던 한국 기업 부채는 5년 후에 122%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수준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통상적으로 가계·기업 부채는 GDP 대비 각각 85%, 90%를 넘으면 위험 수준으로 본다.

국가 경쟁력 떨어지고 국가 채무 늘어

일부 대기업에 의존한 착시 경제지표가 한국 경제의 위험을 가린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 12월 결산법인 501곳의 올 상반기 매출은 929조원, 영업이익은 4조8158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2.4%, 9.6% 늘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를 빼면 영업이익은 지난해 대비 3.5% 줄었고, 순이익은 14.9%나 줄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저성장기 경영전략’ 보고서에서 ‘금융위기 이후 이어지는 저성장 기조는 지속기간, 규모와 변화의 심각성 등을 볼 때 과거 불황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며 “기업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성과 하락, 역량 잠식, 활력 침체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행이 국내외 77개 기관 금융전문가 9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해 9월 2일 발표한 ‘시스템적 리스크 서베이’에 따르면, 응답자의 25%는 향후 3년 내에 우리나라에서 금융시스템 리스크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응답했다. 가능성이 작다는 응답률(29%)과 차이가 거의 없다.

시스템적 리스크란 금융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환율·주가가 요동치면서 실물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핵 리스크로는 중국 등 신흥국 성장 둔화, 미국 양적완화 축소 등 대외 요인 외에도 가계 부채 문제, 기업 신용위험 증가, 주택가격 하락 등이 꼽혔다. 샴페인을 준비하기엔 사방에 위험이 깔렸다.

1204호 (201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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