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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 ‘빚내서 집 사라’ 프레임 못 벗어나 

8·28 전·월세 대책 

아파트 매매 활성화에 초점 … 전세대란 최대 피해자인 무주택 세입자 대책 미흡



정부가 장고 끝에 ‘서민·중산층 주거 안정을 위한 전·월세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금융·세제·공급 지원책이 망라된 A4용지 19매 분량의 보도자료, 40여 쪽에 달하는 부연 설명 자료에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다. 대부분 과거에 실시했거나 기존에 발표한 것이다. 1~2%대 초저금리로 장기 대출을 해주는 수익·손익형 모기지 제도 도입이 그나마 새로운 대책이다.

대책 발표 직후 증권 시장에서는 건설주가 강세를 보였다. 서민·중산층을 위한 전·월세 대책인데, 임대보다는 매매(분양) 시장만 바라보는 건설주가 꿈틀댄 이유는 이번 대책이 사실상 부동산 경기 부양책에 가깝기 때문이다. 8·28 대책의 핵심은 전세 수요를 매매로 돌리는 것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8월 28일 “이번 대책은 주택 매매 활성화에 초점을 뒀다”고 말했다. 세금을 깎아주거나 없애고, 주택 구입 자금을 싸게 빌릴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다주택자는 세금 부담을 줄여 집을 팔고, 돈이 있는 사람은 집을 사서 임대로 내놓고, 돈이 없으면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아 집을 사라는 것이다. 그러면 집값이 오르고 전세 수요가 줄면서 전·월세 시장이 안정될 것이라는 논리다. 28일 정부 합동브리핑 때 현부총리의 발언에 정부의 이런 시각이 담겨 있다.

“집에 대한 수요는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 수요와 실수요가 있다. 이번에 정부는 두 번째에 초점을 맞춰서 정말로 실수요자가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이 중 하나가 장기 모기지(담보대출)를 통한 방법이다. 주택매매가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주택 가격 상승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얼마만큼 매매가 활성화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누가 집을 살 것인가?

이번 대책엔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 분양가 상한제 신축 운영, 주택 가격 구간별로 취득세 영구 인하, 주택기금 대출 대상 확대, 저리·장기 모기지 공급 확대 등이 담겼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거나 기존에 나왔던 방안을 재확인하고 지원 규모를 늘리는 내용이 상당수다.

이에 대해 민주당 전·월세 대책 태스크포스팀 위원장을 맡고 있는 문병호 의원은 “돈을 빌려 주고 세금 깎아줄 테니 집을 많이 사라는 얘기인데, 대다수 세입자는 집을 사기 싫어서 안 사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대책의 전제가 잘못됐고, 무엇보다 주택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간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매매 활성화에 방점을 찍다 보니 전세난의 최대 피해자인 무주택·저소득 세입자에 대한 대책이 미흡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현 부총리의 말대로 이번 대책의 성공여부는 ‘얼마만큼 매매가 활성화되느냐에’에 달렸다. 누가 집을 살 것인가. 야당의 반대로 국회 통과 여부가 불투명하지만, 다주택자의 양도세 중과가 폐지되면 아파트 매물이 쏟아질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주택 가격 하락기에는 취득세를 낮추고 주택 구입 대출 요건을 완화해도 매수가 따라붙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가 부동산 시장 거래 활성화를 위해 5년간 20여 차례의 대책을 내놨지만 대세 하락을 막지는 못했다. 집값이 더 이상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의 확산·고착, 가계 부채 부담, 저금리 기조, 가처분 소득 정체, 1~2인 가구 증가, 베이비붐 세대 은퇴 등 주택시장이 구조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올 초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하나은행 프라이빗뱅킹(PB) 고객 700여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금융자산 10억원 이상 부자들은 부동산 비중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 대상자 중 부동산 비중을 늘리겠다는 답변은 9.2%에 불과했다. 부자들도 더 이상 아파트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집이 있으면서도 전세로 사는 유주택세입자(전체 전세가구의 21%) 역시 많은 대출을 안고 있어 매매로 전환되려면 기존 주택을 팔거나 추가로 대출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이종아 연구위원은 “주택을 소유한 전세 가구의 경우 현재 거주하는 전세금을 제외한 금융자산으로는 총 부채는 물론 임대보증금 상환도 어려운 가구가 많다”고 말했다. 주택가격 급등 시기에 주택을 구입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부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무주택 전세 세입자들은 더 여력이 없다.

KB금융에 따르면, 전세 100가구 당 79가구를 차지하는 무주택 전세가구의 평균 자산은 1억6000만원이다. 자산 중 65%가 전세보증금이다. 이들이 수도권 내에서 주택을 구입하려면 주택 가격의 55%를 빌려야 한다. 특히 서울 소재 아파트를 사려면 70% 이상의 금액을 대출 받아야 가능하다.

주택시장 구조적 변화 간과

고소득층은 주택을 구입할 의사가 적고, 중·저소득층은 주택 구매력이 부족한데 매매 활성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기영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주택 매매 수요 감소의 근원적 원인이 높은 가계 부채 부담에 있다”며 “주택 시장 회복을 위해 실수요자 위주의 부채 확대도 필요하겠지만, 과거와 같은 속도로 부채가 증가하는 것은 어려울 전망”이라고 밝혔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는 “주택가격 하향·안정화는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정책으로 반전시키기는 어렵다”며 “매매시장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다수의 무주택 세입자는 결국 임대 시장에서 주거 안정을 얻어야하고 정부의 전·월세 대책 역시 여기에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주택시장의 구조 변화에 맞춰 실제로 피해를 보는 전·월세 세입자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규정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고 주택가격 급등이 재현될 가능성이 작기 때문에 전세의 월세 전환 추세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물량 부족에 따른 전세난은 반복될 수밖에 없고 완충장치를 두기 위해 지역별로 전셋값 상승률을 제한하는 부분도입도 고려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조명래 교수는 “전·월세 문제는 매매 시장을 활성화하는 게 아니라 방치된 임대주택 시장을 안정화해야 한다”며 “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시장 물가와 연동된 임대료 상한제 등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1203호 (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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