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발리에서 제9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렸다. 각국 대표단은 다자간 무역 거래에서 자국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협상을 벌였다. 주요 주제는 통관절차 간소화, 세관 협력, 농업 분야에서 개발도상국 입장 반영, 최빈국 지원 등이었다.발리 패키지는 세계무역기구 회원국이 2001년 출범한 뒤 지지부진한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합의한 것이다. 이 패키지엔 수출입 통관 절차를 간소화해 무역을 원활하게 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불발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WTO는 발리 패키지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번 패키지를 통해 도출한 협정을 이행하면 세계 경제성장 규모가 1조 달러에 이르게 되고, 교역 비용을 10%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세계는 이미 하나의 커다란 시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른 나라와 거래 없이는 어떤 나라도 성장하기 어렵다. 단순히 양자 간 통관 간소화는 의미가 없다. 한 국가를 상대로 통관절차를 간소화하면 다른 국가에도 같이 적용해야 한다. 통신 규제와 같은 분야에서도 한 국가를 상대로 규제를 푸는 건 의미가 없다. 관세 철폐나 인하는 두 나라 사이에서만 실행할 수 있지만 통관 절차, 통신 규제와 같은 제도 분야는 국가별로 차별화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지역 차원의 무역협정이 체결되고 있지만 선진국과 시장 규모가 큰 나라들끼리만 협정을 맺고 있어 신흥국이나 저개발국은 무역 자유화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있다. 다자간 무역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며 무역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점에 각국이 동의하며 발리 패키지가 극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발리 패키지에서 합의한 다자 교역체계 구축을 위해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은 무역을 통해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국가다. 한국은 지난 50년 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00배, 교역 규모가 2000배 성장했다. 교역의 중요성을 어느 국가보다 잘 알고 있는 한국이 나서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 다자간 무역 활성화는 한국에도 큰 도움이 된다. 최고의 휴대전화를 만들고 조선업에서 1위, 자동차 산업에서 5위인 한국은 다자교역 체계가 정립된다면 더 큰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한국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이유도 잘 알고 있다. 농산물이다. 특히 올해 말이면 한국은 쌀 시장 개방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관세화 유예 만료를 앞둔 한국 당국자들의 우려도 잘 알고 있다. 한국이 쌀을 민감한 품목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WTO 회원국들도 잘 이해하고 있다. 한국은 어려운 상황을 국내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모든 회원국마다 민감한 분야가 있다. WTO에서도 다자 교역체계 구축에 있어 공산품·서비스·농산물 영역의 협상이 가장 어렵다. 그중에서도 농산물은 진전이 가장 더딘 분야다. 어떻게 무역 자유화를 이룰 것인지, 시장 개방에 기여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전진해야 한다. 한국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교량역할을 하며 다자간 무역을 이끌어가는 리더가 될 수 있기 바란다.※세계경제연구원 강연(5월 16일)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