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전염병으로 생산량 급감 ... 양돈 농가들, 자발적 가격 인하 움직임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고객이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 삼겹살 가격이 치솟으면서 수입산 소고기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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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분당에서 삼겹살집을 운영하는 최모(53) 사장은 요즘 천정부지로 치솟은 삼겹살의 도매가격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른다. “도매로 띄어오는 가격이 좀 올랐어야죠. 남는 게 거의 없어요. 구제역 파동 때보다도 더 힘이 듭니다.” 도매가격 인상의 압박을 못 이기고 이미 한 차례 판매가격 인상을 결정한 최 사장은 조만간 다시 한 번 가격을 소폭 올릴 예정이다. 하지만 불경기로 가뜩이나 발걸음이 뜸해진 손님들이 이참에 발길을 끊지 않을까 고민이다.불판에 노릇노릇 구운 삼겹살에 상추쌈과 소주 한 잔.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사랑 받는 삼겹살이 시련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가격이 급등하면서 소비도 급감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6월 들어 돼지고기 1kg당 도매가격은 5100~5300원선에 이르렀다. 이는 작년보다 30%가량 폭등한 수치다. 이러다 보니 시중에서 삼겹살을 판매하는 식당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판매가격을 올렸다. 1인분에 1만5000원 내외로 판매하는 가게가 줄줄이 생겨났다.
전염병 유행 직격탄에 생산량 감소 시기 겹쳐이 같은 가격은 구제역 파동으로 비상이 걸렸던 2011년 8월 이후 3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더욱이 일부 수입산 소고기보다 비싼 가격이라 ‘소고기보다 비싼 돼지고기’라는 자조 섞인 표현마저 나온다. 6월 들어 이마트 판매분 국내산 삼겹살 가격은 100g 당 2200원이다.지난해 같은 기간 1880원이었던 데 비해 17%가 올랐다. 이와 달리 구이용 소고기인 척아이롤 호주산은 6월 현재 100g당 2080원으로 지난해와 비슷한 가격을 유지해 오히려 국내산 삼겹살보다 저렴하다. 미국산 척아이롤도 100g당 2200원 정도로 그간 국내산 삼겹살이 갖던 가격 경쟁력이 사라졌다.분당의 한 대형마트에서 만난 주부 장현주(38)씨는 “아이들이 삼겹살을 좋아해서 집에서 종종 구워먹는데 요즘은 이 가격이면 소고기가 낫겠다 싶어 수입산 소고기를 고르게 된다”고 말했다. 장씨는 “언제까지 삼겹살 가격이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가까이 하기 힘든 금(金)겹살”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장씨처럼 국내산 삼겹살을 구매할 바에야 수입산 소고기를 선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관련 업계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이마트의 6월 현재 삼겹살 매출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15%가 줄었다. 이마트 관계자는 “삼겹살 가격이 지난해 더 저렴했던 것까지 감안하면 실제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20% 넘게 감소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이와 달리 수입산 소고기 관련 업계는 뒤돌아 조용히 웃음을 짓고 있다. 삼겹살 대란이 이어지면서 대체재로 반사이익을 누려서다. 올 1~4월 미국산 소고기의 통관 물량은 3만5791t, 호주산은 5만823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14%, 9% 증가했다.미국육류수출협회 관계자는 “고급육·브랜드육을 찾는 수요가 늘면서 호주산과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량이 이전보다 늘어났다”고 말했다. 소시지나 베이컨 같은 완제품 시장에서도 반사이익 효과가 나타났다. 현대백화점이 판매하는 프리미엄 소시지 ‘존슨빌’은 올 들어 지난해보다 매출이 20% 넘게 증가할 만큼 인기다.삼겹살 가격이 폭등한 이유는 뭘까. 우선 지난해 말부터 전염병인 돼지유행설사병(PED)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국내 양돈 농가들이 직격탄을 입어 돼지고기 생산이 크게 줄어들었다. 방역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충남과 경남 등지에서 PED가 번지기 시작해 올 3월 기준 1만3000여 마리의 돼지가 PED에 감염됐다. 감염된 돼지는 대부분 폐사됐다. PED는 최근 제주같은 도서 지역으로도 번졌을 만큼 위력을 떨치고 있다.PED 감염이 진행되면 돼지고기 공급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도 지난해 5월 오하이오에서 처음 PED 발병이 확인된 이후 30개 주로 전염병이 확산돼 돼지 700만 마리가 폐사됐다. 이에 올 들어 미국에서 출하된 돈육 가격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PED로 인한 홍역을 한바탕 치렀다. 캐나다에서 처음 발병한 것으로 알려진 PED는 미국 외에도 유럽·일본·중국·남미 등지로 퍼져 각국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도 PED의 악재를 피해갈 수 없었다.아울러 5~6월은 일반적으로 국내 돼지 생산량이 가장 떨어지는 시기라 각 농가들이 공급량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6월에 시중에 풀리는 돼지고기는 전년도 7~8월 무렵 교배돼 같은 해 11~12월 태어난 새끼들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더울 때일수록 돼지 교배 성공률이 떨어지는데다, 교배에 성공해도 겨울에 태어난 새끼돼지들의 성장이 더디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적 특수성에 PED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예년보다도 공급 상황이 훨씬 안 좋아졌다.이렇듯 공급이 크게 줄었음에도 수요는 일정하다 보니 가격이 수직상승한 면도 있다. 양돈 업계 관계자는 “삼겹살은 우리나라 직장 문화에서 회식 자리의 필수품인데 아무리 가격이 올라도 수요는 꾸준히 있을 수밖에 없다”며 “공급과 수요가 맞지 않아 가격이 한층 오른 감이 있다”고 말했다.업계 다른 관계자는 “조류인플루엔자 이슈가 닭·오리고기 수요 변화에 다소 영향을 끼쳤고 일본 원전 사고 후 수산물 수요도 전반적으로 줄어든 상황이라 돼지고기 수요를 대체할 만큼의 영향력이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여기에 올 5월과 6월 징검다리 연휴를 거치고 7~8월 여름 휴가철을 눈앞에 두면서 소비세가 꾸준해, 당분간 삼겹살 가격의 고공행진이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사정이 이러자 국내 양돈 농가들이 가격 안정화에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대한한돈협회는 6월 19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사육 농가가 돼지고기 가공 업체에 팔 때 가격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껍질 벗긴 돼지고기의 도매가격이 ㎏당 6000원 이상으로 오르면 농가가 받는 가격을 2% 내리고 5500~6000원일 때는 가격을 1% 낮춘다는 방침이다. 거꾸로 도매가격이 향후 kg당 3500원 이하로 내려가면 가격을 2% 올리고 3500~4000원 이하일 때는 가격을 1% 올림으로써 양돈 농가의 수익 보전에도 균형을 맞출 계획이다.
삼겹살 값 고공행진 당분간 이어질 듯이로써 돼지고기 가공 업체들이 소매가격을 내릴 수 있도록 유도해 삼겹살 대란으로 인한 관련 업계 전체의 피해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양돈 농가들이 자발적으로 돼지고기 가격의 인하를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다.그러나 한돈협회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으로 실제 계약은 개별 농가와 가공 업체가 맺는 방식이라 가공 업체들이 이를 수용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농가와 업체들이 상생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자발적인 가격 안정화가 향후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