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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연 기자의 ‘스칸디나비안 파워’ ② 뱅앤올룹슨] 인간 중심의 ‘ 감성 디자인’ 원조 

올해 창립 89주년 본사에서 오디오·TV 수공업으로 생산 

‘헤이(Hej)’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핀란드에서 모두 통하는 인사말이다. 철자는 차이가 있지만 뜻은 하나다. 북유럽 4개국은 비슷한 언어만큼이나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재빨리 침체를 벗어난 점도 닮았다. 위기 극복의 저력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에서 나왔다. 각국 인구가 1000만명이 채 되지 않는 북유럽 국가들은 작은 내수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찍이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덕분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세계 시장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북유럽 출신 ‘히든챔피언’이 적지 않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세계 시장을 휘젓는 북유럽의 숨은 강자들을 소개한다.


▎1. 뱅앤올룹슨 직원들이 리스닝룸에서 제품 성능을 테스트하고 있다. 2. 본사가 위치한 덴마크 스투루어의 아노다이징 공장 전경. 3 최초 생산품인 엘리미네이터. / 사진:뱅앤올룹슨 제공

북유럽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춥다. 11월부터 2월까지는 하루 중 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5~6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이런 환경 탓에 북유럽 사람들은 자연히 따뜻한 집안에 있기를 선호한다. 어두운 바깥 풍경을 잊고 싶어한 듯 집 내부는 대부분 밝고 아늑하게 꾸민다. 집안 곳곳에 초를 켜고, 알록달록한 색감의 벽지를 바른다. 우리가 아는 ‘북유럽 인테리어’도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집안 분위기를 바꾼 건 인테리어뿐만이 아니다. 오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은 집안에 온기를 더한다. 오디오로 유명한 덴마크 기업 ‘뱅앤올룹슨(Bang&Olufsen)’이 일찍이 성공을 거둔 이유 역시 북유럽의 기후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로 창립 89주년을 맞은 뱅앤올룹슨은 세계적인 ‘명품’으로 통한다. 최근에는 오디오뿐 아니라 TV와 스피커 등으로 분야를 넓혀 명실공히 최고의 홈엔터테인먼트 브랜드를 자랑한다.

뱅앤올룹슨의 명품 전략은 독특한 디자인에서부터 시작된다. 1960년대 내건 슬로건은 ‘가격보다 취향과 품질을 중요시하는 고객을 위하여’였다. 이는 다소 비싸더라도 훌륭한 음질과 독창적인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그런데 디자인을 내놓는 과정이 남다르다. 대부분 제품을 개발한 후 디자인하는 것과 달리 뱅앤올룹슨은 제품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디자이너가 관여한다. 어떤 제품을 생산할지에 대한 결정권도 디자이너가 갖고 있다. 기술진과 경영진은 디자인을 잘 살릴 수 있도록 뒷받침한다.


▎9월 국내 출시한 신제품 ‘베오비전 아방트’(위쪽). 뱅앤올룹슨의 대표 제품인 ‘베오센터 2’의 디자인은 풍뎅이가 날개를 펼치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 사진:뱅앤올룹슨 제공

독창성 위해 프리랜서 디자이너 영입

얼핏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보이는 이런 방식에는 뱅앤올룹슨의 철학이 담겨있다. 루 슈어 연구개발 선임 부사장은 “뱅앤올룹슨에서 디자인은 단순한 외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며“이런 방식은 인간을 먼저 생각하고, 인간의 감성에 다가설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디자이너들 역시 심미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뱅앤올룹슨 제품이 일상에서 더 유용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디자인을 내놓는다.

뱅앤올룹슨은 디자이너의 독창성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외부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영입한다. 1970년대부터 뱅앤올룹슨과 함께 일하며 수많은 히트제품을 출시한 디자이너 데이비드 루이스도 프리랜서로 평생을 일했다. 최근 내놓은 신제품 ‘베오비전 아방트’와 ‘베오랩 20’을 디자인한 톨슨 밸러도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디자이너가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에서 떠오른 영감을 제품에 반영하도록 한 배려다.

마치 풍뎅이가 날개를 펼치듯 CD플레이어의 뚜껑이 열리는 오디오나 전시되기 전 바닥에 세워 둔 그림 액자를 닮은 TV가 그런 결과물이다. 슈어 부사장은 “디자이너가 일상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디자인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삶에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제품을 선보일 수 있다”며 “우리 제품이 단순히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하는 기계가 아닌 삶의 혁신을 가져온 제품이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평범한 거실을 영화관으로, 서재를 공연장으로 만드는 게 이 회사의 궁극적인 목표다.

외부 디자이너와 사내 기술자들이 만나 의견을 조율하는 공간은 ‘아이디어 랜드(Idea Land)’라고 부른다. 이곳은 제품 정보를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회의 장소이다. 디자이너는 물론 콘셉트 개발자, 엔지니어, 경영진 등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개발 과정에 참여한다.

평소에는 각자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다가 제품 개발이 결정되면 새로운 그룹을 꾸려 일에 효율성을 더한다. ‘따로 또 같이’ 전략은 뱅앤올룹슨이 소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디자인에 편의성을 더한 제품을 만드는 비결이다. 이상적이지만 다소 비현실적으로까지 보이는 뱅앤올룹슨의 협업 방식은 창업 초기부터 이어져왔다. 기업명에서부터 눈치챌수 있듯이 이 회사는 피터 뱅과 스벤드 올룹슨이라는 두 명의 엔지니어가 함께 세웠다. 그래서 사명도 둘의 성을 사이좋게 이어 붙여 뱅앤올룹슨이 됐다. 두 사람은 1920년대 초 덴마크 오르후스에 위치한 전기공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며 인연을 쌓았다. 졸업 후 두 사람은 코펜하겐에 회사를 설립했다.

최초의 공동 프로젝트는 배터리 없이 작동하는 라디오를 발명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는 라디오 방송국들이 번창하던 시기였지만 음악을 듣다가 전력이 떨어지면 충전소를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더구나 배터리 가격이 올라 청취자들의 부담도 커졌다. 뱅과 올룹슨은 8년 간의 연구 끝에 동력원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라디오 개발에 성공했다. 이 제품이 바로 뱅앤올룹슨의 첫 제품 ‘엘리미네이터’이다. 둘은 오랜 연구과정에서 손에 돈 한푼 쥐지 못했지만 오히려 서로에 대한 신뢰는 커졌다. 슈어 부사장은 “90여 년 전에 같은 열정을 가진 두사람이 만나 회사를 만들었다”며 “그들의 열정과 협업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이제는 뱅앤올룹슨의 기업문화로 자리잡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뱅앤올룹슨은 명품 브랜드로 인식된다. 이 같은 이미지는 본국인 덴마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싼 가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생산 방식에 있다. 특히 뱅앤올룹슨의 TV는 100% 덴마크 본사에서 생산한다. 게다가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조립한다. 인건비가 세계 최고 수준인 북유럽 국가에서 장인의 손길을 거치다 보니 생산 기간이 긴 것은 물론 양 또한 적을 수밖에 없다. 국내 수입되는 수량은 더욱 적다.

이런 제작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뱅앤올룹슨은 지속가능성을 위한 선택이라고 답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속가능성은 두 가지, 제품의 수명과 환경적인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적게 생산하지만 그만큼 수명이 긴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뱅앤올룹슨 제품은 15년 이상의 수명을 자랑한다. 엄격한 테스트 과정은 기본이다. 뱅앤올룹슨은 제품 테스트실을 두고 ‘고문실(Torture Chamber)’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제품을 못 살게 군다. 예를 들어 리모콘인 ‘베오 4’를 출시하기 위해 기술자들은 일반적인 소비자가 10년 동안 리모콘 버튼을 누르는 횟수를 기준으로 작동 여부를 실험했다. 버튼에 콜라와 뜨거운 국물을 부은 후 제품 기능에 불량이 없는지 등도 확인했다. 제품 표면에 세척제와 핸드로션, 화장품 등을 묻혀 보기도 하고, 1년 동안 직사광선에 노출시켜 제품 색상에 변화가 없음을 살펴보기도 한다. 1~2m 높이의 테이블에서 떨어뜨리는 실험도 이뤄진다. 극한의 테스트를 통과한 제품만 출시한다는 신념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제품을 자주, 많이 생산하는 것은 환경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이 회사가 소량 생산을 택한 또 다른 이유이다. 소재도 환경을 생각했다. 양극(아노다이징) 처리된 알루미늄은 모든 뱅앤올룹슨 제품의 기본 소재로 사용된다. 이 알루미늄은 친환경적인 신금속으로, 기존 전자제품의 소재인크롬이나 니켈·카드뮴·아연 등에 비해 오염도가 적다. 뱅앤올룹슨은 1992년 본사가 위치한 덴마크 스투루어에 새로운 공장을 세웠는데, 이름을 ‘아노다이징 공장’으로 부를만큼 친환경성에 초점을 맞췄다. 이곳에서 나오는 공업용 폐수는 외부로 배출되기 전 해로운 잔여물이 모두 제거되도록 정화된다. 당시 이공장을 짓는 데만 2500만 크로네(약 40억원)가 들어갔다.

생산은 적게, 수명은 길게

슈어 부사장은 “환경보호는 우리 회사의 철학과도 맞닿아있다”며 “사람 중심의 제품을 만드는 기업으로서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 또한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대량으로 찍어내는 박스처럼 TV를 생산할 계획이 없으며 현재의 제품 개발과 생산 체제를 유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뱅앤올룹슨 제품에는 나사나 볼트를 찾아볼 수 없다. TV 테두리와 스크린 경계 면에서는 작은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슈어부사장은 “수천 만대의 TV를 생산하는 삼성이나 LG에 비하면 우리는 작은 기업”이라며 “완벽한 제품을 내놓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가전제품도 명품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오늘날 뱅앤올룹슨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케 한 숨은 원동력이다.

1255호 (201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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