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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좀 치우게 주말에 내려올 수 있니?” 일주일 전쯤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래된 잡동사니를 치우고 싶은데 제 물건 중에서 뭘 버려야 할지 모르시겠 다고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구석에 놓인 상자를 열어 봤습니다. 중고생 때 흔적이 생생한 낙서들, 우정의 표시였던 손 편지들, 대학 시절 드로잉 북, 아빠와 샌프란시스 코를 배낭여행 할 때 샀던 2달러짜리 오르골…. 이 밖에 도 이유를 모를 오래된 동전(?) 등이색이 바란 채 먼지 덮인 상자를 채우고 있었습니다.지금은 아무 쓸모도 없고 금전적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그냥 폐품으로 버리기엔 아까운 물건을 보며 한 작가가 떠올랐습니다. 사소해서, 혹은 너무 바빠서 잊기 쉬운 작은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그는 뉴욕을 중심으로 세계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인 강익중 작가입니다.
사소한 이야기 모아 거대한 작품으로 강익중 작가는 3인치(약 7.6cm) 정방형 판넬에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3인치면 가방에 쓱 넣고 다니다가 아무데서나 꺼내 부담 없이 작업할 수 있는 크깁니다. 이런 작은 그림 블록이 하나씩 모여 거대한 모자이크를 이룹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작가와 함께 2인전을 개최했을 때, 강익중 작가는 3인치 그림 조각을 무려 6만 개나 그렸습니다. 이 조각 이야기들을 나선형 공간을 따라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전시했죠.3인치 정도의 크기가 어린 아이들이 쥐고 그리기에도 좋으며 또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착안해, 2004년에는 전 세계 141개국 어린이들이 보낸 12만 9000여 그림 조각을 모아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에 전시됐던 ‘꿈의 달’이라는 작품입니다. 어두운 밤, 거대한 달 모양으로 찬란한 꿈과 이야기 조각이 수십만 개 모여 있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대단하고 아름다웠지요.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닌, 수많은 이의 메시지와 꿈,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아 웅장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강익중 작가의 작품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의 흥국생명보험 본사 빌딩 1층 로비에 설치된 강익중 작가의 ‘아름다운 강산’입니다. 로비에는 이 외에도 유명한 작품이 많이 전시돼 있고, 외부인이라도 10명 이상이라면 누구나 예술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강익중의 ‘아름다운 강산’ 역시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3인치 정방형 판넬 작업입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만, 이야기가 이어져 새로운 그림처럼 보입니다. 마치 여러 가지 색상과 무늬 소재의 작은 천 조각을 서로 꿰매 붙인 패치워크(patchwork) 같기도 합니다. 2000년에 처음 7500개의 조각모음으로 만들어졌다가, 2010년에 8100개로 교체되고 늘어난 캔버스에 소품이 추가되면서 더욱 풍성해졌습니다.그림 조각 하나만 놓고 보면 그다지 화려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아닌, 그 사람이 마음속에만 담고 있는 사연이라서 다 알 수도 없지요. 마치 내 옆의 동료나 친구의 내밀한 이야기처럼 가깝고도 먼 이야기 같습니다. 강 작가는 이런 것에 마음이 가나 봅니다. 하나의 꿈조각 옆에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판넬과 판넬 사이 작은 빈 공간은 멀리서 보면 연결된 하나의 타일 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비워진 틈이 아니라 모두 하나가 되도록 튼튼히 연결된 줄눈처럼 보입니다.강 작가는 30년 가까이 타국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관심은 한글 생김새에 관한 몰두로 이어집니다. ‘아름다운 강산’에도 한글 단어들을 정겨운 글씨체로 그려 넣은 조각이 여럿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달항아리들과 함께 한글은 강익중의 작품에 빠지지 않는 특징이 됐습니다.오래된 재떨이·망치·쥐덫·핸드폰 충전기 같은 일상 오브제도 보입니다. 이 물건은 2010년도에 새로 추가되었는데, 다소 단조로웠던 모자이크식 평면에 입체적인 재미를 주네요. 아마도 화가의 작업실에서 뒹굴었던 물건들이겠지요.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물건들입니다. 우리 집에서도, 옆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것이죠. 매일 보기 때문에 아름답기는커녕 촌스럽기까지 한 물건들. 손때가 묻고 허름한 물건들이지만 ‘아름다운 강산’에서는 옆집 러닝셔츠 차림의 아저씨처럼 친숙함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이런 물건들을 쓰다듬고 이야기를 찾아 작품에 붙이고 있는 작가 모습이 떠오릅니다. 낮고 작은 이야기를 예뻐하면서 진심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이 묻어납니다. 다만 작품을 설치할 때는 작가의 마음까지 수용하기가 어려웠나 봅니다.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감상하기엔 너무 높이 걸려있어 몇 분만 바라보고 있으면 목이 뻐근해집니다. 물론 갤러리가 아닌, 회사 사옥에 배치하려다 보니 절대적으로 미술품을 위한 공간이 되긴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지만 작가의 정신, 작품 자체의 매력을 보다 잘 느끼려면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오랫동안 호흡할 수 있어 야 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스칩니다.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고립감이나 고독감이 친구처럼 익숙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작품을 감상하려고 흥국생명빌딩을 찾은 날도 그랬습니다. 뙤약볕 아래 흥국생명빌딩 앞 조너선 보롭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이 천천히 무한한 노동을 하고 있고, 그 아래 케이블방송 티 브로드의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티브로드와 흥국생명은 태광그룹 계열사입니다. 서로 약간은 느슨한 신경전을 벌이는 경찰과 노조원들의 얼굴에도 일종의 고독감이 스며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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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익중 작가: 1960년 충북 청주생. 1984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건너가 1987년 미국 프랫인스티튜드를 졸업했다. 1994년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과 ‘멀티플 다이얼로그’전을 열었다. 1997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고 2005년 알리센터에 ‘희망과 꿈’을 설치했다. 주요 작품은 ‘오페라를 부르시는 부처’, ‘영어를 배우자’, ‘사운드 페인팅’,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꿈의 달 등이다. 흥국생명빌딩 로비를 비롯해 경기도미술관, 과천국립현대미술관, 미국 로스앤젤레스현대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빌딩 1층 로비 - 태광그룹의 선화예술문화재단은 신문로 흥국생명빌딩 1층 로비에서 ‘Art of Heungkuk 열린갤러리’를 운영한다. 10명 이상의 인원이 e메일(info@iljufoundation.org)로 예약할 경우 도슨트 투어도 무료로 제공한다. 누구나 신청 가능. 약 30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