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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ment | 박용삼의 시네마 게임이론 - 매·비둘기 균형 이뤄야 평화가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강경파 - 온건파 게임’ … 둘 중 하나는 치명상 

박용삼 KAIST 경영공학 박사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한 장면. / 사진:중앙포토
2006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슬금슬금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을 보며 체념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요즈음, 한번쯤 다시 볼만한 영화다. 때는 1920년 영국. 독립을 울부짖는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무자비한 탄압이 본격화될 무렵이다. 아일랜드는 12세기 중엽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 정복당한 후 거의 800년 간이나 독립을 추구했다.

아일랜드 태생의 젊은 의사 데미안(킬리언 머피)은 런던에 어렵사리 의사 자리를 구한다. 하지만 친구 한 명이 게 일어(아일랜드의 모국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 군인들에게 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꾼다. 그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형 테디(패드레익 들러니)와 함께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군)에 가담해 독립투사의 길을 걷는다.



자연 생태계의 ‘진화적 안정전략’

독립을 향한 수 년 간에 걸친 게릴라전은 아일랜드의 승리로 돌아가고 잉글랜드는 자치를 허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자치가 허용되는 범위는 아일랜드의 반쪽에만 국한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아일랜드인들은 일대 혼란에 휩싸인다.

조약을 수용하자는 쪽과 다시 투쟁에 나서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리며 아일랜드는 내전으로 치닫는다. 형 테디와 동생 데미안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급기야 형제끼리 총구를 겨눠야 하는 비극의 수렁으로 빠져든다(일제에 대한 독립운동, 해방 후의 정치적 혼란, 그리고 동족상잔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역사와 참 많이 닮았다).

게임이론에 보면 ‘매-비둘기(Hawk-Dove) 게임’이 있다. 사납고 강한 이미지의 매(강경파)와 부드럽고 평화적인 이미지의 비둘기(온건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임이다. 언뜻 보면 매를 선택하는 것이 답인 것 같다. 하지만 만약 상대방도 매를 택하면 싸움이 불가피하고 둘 중 한 명은 죽거나 심하게 다치게 된다.

이와 달리 비둘기는 매와 싸우지 않고 알아서 피하기 때문에 비록 이득은 뺏길지라도 크게 다칠 염려는 없다. 따라서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맞춰 강하게 나갈 것인가(매) 혹은 굽히고 들어갈 것인가(비둘기) 중에서 입장을 정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 게임의 균형은 두 명의 게임 참가자 중 한쪽은 매, 다른 쪽은 비둘기를 선택해서 (썩 내키지는 않지만) 적과 의 동침을 유지하는 것이 된다.

이를 사회 전체의 진화라는 관점으로 확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선 매파(강경파)로만 구성된 사회는 안정적이지 못하다. 물고 뜯는 공방전 끝에 서로 상처를 입는다(요즈음 우리나라 정치권 상황). 이럴 때는 비둘기가 되어 싸움을 피하며 살아남는게 현명하다(강경파에 대한 실망이 쌓이면서 온건파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국면).

비둘기파의 비율이 증가하면 잠시 평화가 오지만 슬슬 매 노릇을 하려는 쪽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사회 전체가 다시 매들에게 점령당하는 때가 온다. 결국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매와 비둘기의 비율이 균형점으로 수렴해 갈 때 사회는 안정을 얻는다. 최근 정치권에 강경파들의 입김이 지나쳐 국정이 마비된다는 우려가 크다. 좌우를 막론하고 강경 투쟁을 통해 얻게 되는 이득은 줄이고 비용은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비둘기들이 힘을 얻는다. ‘이제 그만 정신차려야 한다’는 감정적 호소보다는 정치인들이 매와 비둘기의 갈림길에서 제대로 된 선택을 하게끔 유도하는 시민의 감시나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정치 안정이 가능해 진다.

1970년대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존 메이나드 스미스는 이렇게 사회 내에서 개체들 간의 비율이 안정점으로 수렴하게 하는 전략을 ‘진화적 안정전략(ESS: Evolutionary Stable Strategy)’ 이라고 불렀다. ESS의 예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연 생태계이다.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사자는 왜 4일에 한번씩만 사냥을 할까? 약간만 부지런을 떨면 초원의 누(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소과 동물)를 배불리 잡아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다 이유가 있다. 욕심을 부려 누를 남획하면 곧 씨가 말라 버리게 되고 동료 사자와 먹이 다툼이 심해져 서로 피를 볼 공산이 커진다. 그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딱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는 게 진화적으로 유리하다.

20 대 80의 법칙도 그렇다. 어느 사회든 대략 20%의 부지런 한 개체와 80%의 게으른 개체가 있다는 말인데, 만약 20%만 남기고 80%를 없애면 어떻게 될까? 과연 20% 에이스로만 구성된 조직은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수 있을까? 왠지 아닐 것 같다. 실제 개미 사회를 놓고 실험해 봐도 그렇다. 놀고 먹는 80%를 제거한 후에 관찰해 보면 남겨진 20% 중에서 슬 슬 게으름을 피우는 녀석들이 생겨나더니 결국 다시 20대 80으로 수렴되어 간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게으른 80%만 남겨놔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중에서 부지런한 20%가 분화되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조직 진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20중에 80이 숨어있고 80중에 20이 녹아있는 것이다.

결국 진화적으로 안정을 이루려면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극단주의보다는 적절한 선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경쟁만이 아니라 공생도 진화의 핵심 기제라는 말이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약육강식의 정글이라지만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 인류가 만든 발명품 중에 최고는 단연코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그런데 엄청난 효율을 주체 못하다 보니 양극화라는 문제를 낳고 말았다. 좀처럼 거리 시위에 나서지 않는 서구에서도 월가 점령 시위가 발생하고 한국에서도 반기업 정서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가 앞으로도 계속 번성하려면 아프리카의 사자들처럼 자기 절제의 지혜를 갖춰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이건 되고 저건 안되고 규제하기 전에 대기업 스스로 선을 지켰어야 옳다. 동네 빵집과 구멍가게까지 다 잡아먹고 나면 100년 기업이 되기는커녕 홀로 남아 고독사(孤獨死)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극단보다는 적절한 선의 조화 이뤄야

자,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마지막 장면은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둘기파인 형 테디가 매파인 동생 데미안을 총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조국이란 게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거겠죠?” 극중에서 데미안이 내뱉는 이 말은 형제의 선택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를 관객들에게 되묻게 만든다. 영화는 이데올로기라는 괴물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되어 한없이 순수한 젊은 이삭들을 휩쓸고 가는 모습을 무심히 카메라에 담는다. 보수와 진보, 기성세대와 신세대, 윗집 사람과 아랫집 사람, 흡연자와 비흡연자…. 뭐든지 눈에 띄면 선을 긋고 편을 가르는 우리 사회의 단면들이 영화의 갈피갈피에 데자뷰처럼 녹아 있다.

1256호 (201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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