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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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70년 전인 1945년 설립된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로 창립 70주년을 맞는다. 이 뜻깊은 해에 크리스틴 라가르드(59) IMF 총재는 갈수록 주름살이 늘고 있다. 재정이나 금융 위기에 처한 나라에 긴급 자금을 빌려줘 불을 끄는 국제 금융 소방수인 IMF의 수장인 그가 지금 엄청난 고민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통화협력을 통해 성장과 안정을 도모하는 국제기구인 IMF는 7557억 달러에 해당하는 기금을 바탕으로 금융 사정이 어려운 나라를 지원하며 특별 프로그램도 여럿 운영하고 있다. 이런 라가르드의 깊은 고민은 그리스에서 비롯됐다.
유럽 재정위기 타개할 소방수로 투입재정위기를 겪은 대표적인 나라인 그리스는 채권단인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유럽중앙은행(ECB) 등 이른바 ‘트로이카(Troika)’로부터 20010년 이후 2400억 유로(약292조원)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EU와 ECB를 좌우하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줬다. 빚은 내는 조건은 가혹한 긴축이었다. EU와 ECB를 좌우하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조건이 아니라면 돈을 빌려줄 수 없다며 버텼다.재정위기로 인한 혼란의 한복판이던 2011년 7월5일 라가르드는 5년의 IMF 임기를 시작했다. 그해 5월 성추문으로 물러난 프랑스 출신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의 후임으로 총재에 입후보했던 라가르드는 미국·독일·영국·인도·브라질·러시아·중국 등 강대국의 폭넓은 지지 속에 투표 없이 합의를 통해 총재 자리를 맡게 됐다. 여성으로선 첫 IMF 수장이었다. 멕시코 재무장관 출신의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멕시코은행 총재가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스페인, 캐나다, 호주 등의 지지를 업고 출마를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009년 말 시작된 유럽 재정위기는 당시 그리스가 사태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라가르드는 ‘고속 트랙’을 거쳐 IMF 수장에 오른 것이다. 처음부터 유럽 재정위기를 구원할 특급 소방수로서 긴급 투입된 셈이다.당시 트로이카의 분위기는 강경했다. 메르켈은 ‘방만한 국가 운영 때문에 재정위기를 맞았으니 고강도 긴축으로 한 푼이라도 아끼면서 부채의 늪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이에 따라 그리스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국민은 고통을 분담해야 했다. 그 결과 공공부문의 고용이 위축됐으며 복지와 연금 혜택도 축소됐다. 이전에 지속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책 없이 복지와 연금 혜택을 마구 늘린 데 따른 업보로 볼 수 있다. 갓 IMF 총재가 된 라가르드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메르켈의 의견을 따랐다.하지만 그리스인의 사고방식은 달랐다. 그들은 반성하지도 고통을 감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난 1월 25일의 총선에서 그리스인의 생각이 드러났다. 트로이카와 재협상을 해서 부채를 대대적으로 탕감받고 이를 바탕으로 긴축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건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에 표를 몰아준 것이다. 시리자는 총선에서 전체 300석 중 149석을 차지했다. 집권당이던 신민당을 8.5%포인트나 앞선 압승이었다.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41) 당수는 1월 26일 새 총리에 취임했다.시리자의 치프라스 총리는 긴축 조건을 완화하고 구제금융 가운데 일부를 탕감해달라고 요구하며 트로이카를 압박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리스가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유럽의 19개국)을 떠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메르켈을 압박했다. 빚쟁이가 오히려 뻔뻔스럽게도 벼랑 끝 전술을 쓰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고 유로존에서 이탈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며 “그리스 구제금융 재협상이나 부채 탕감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재협상과 부채 탕감이 목적이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메르켈은 시리자의 압력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원칙 고수를 강조하고 있다. 메르켈은 최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기를 원하지만 부채에 대한 의무와 긴축 약속 등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리스가 요구하는 부채탕감 요구에는 단호한 입장이다. 독일 국민의 세금을 그리스에 빌려줬더니 이를 꿀꺽 삼키겠다는 심보로 생각한다. 부채탕감은 아예 논의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리스와 트로이카, 특히 메르켈 간의 대치가 오래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라가르드는 조금 다른 대응을 보여 주목된다. 대화와 소통을 통한 순조로운 해결을 원한 것이다. 라가르드는 1월 27일 “IMF는 그리스를 계속 지원할 것이며 조기 총선 결과에 따라 새롭게 구성된 정부와 대화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12월 IMF는 “구제금융 재협상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에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된 뒤 가능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IMF는 2012년 그리스에 4년간 280억 유로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사실 그리스 경제는 운명 직전의 환자 신세다. 실업률은 26%로 1929년 미국 대공황 때와 비슷하다. 국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76%에 이른다. 이 중 80%는 유로존 채권국, 국제통화기금(IMF), ECB 등 트로이카가 보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라가르드는 메르켈과 협력하면서도 대화와 협력을 통한 다른 대안을 내놓아야 할 처지다. 출신 국가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그리스에 채무 이행을 요구하면서도 일부 재협상과 긴축완화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도 부채탕감, 긴축 조건 완화 요구문제는 라가르드의 고민이 그리스에서 끝날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스페인을 비롯해 자신이 IMF 총재에 취임할 당시 재정 위기로 속을 썩이던 나라들이 이번에는 그리스처럼 재협상과 부채탕감, 긴축 조건 완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지른 불은 즉각 스페인으로 옮아 붙었다. 지난 1월 31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중심부인 푸에르타 델 솔(태양 광장)이 10만명으로 추산되는 인파로 가득 찼다. 지난해 1월 16일 창당한 스페인 좌파 정당 포데모스의 집회였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뜻의 이 정당은 “우리는 더 이상 트로이카의 식민지일 수 없다”라며 그리스처럼 트로이카와의 재협상과 긴축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은 중도우파 국민당과 중도좌파 사회노동당에 이은 제3당이지만 지난해 11월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26.2%의 사회노동당과 20.7%의 국민당을 누르고 지지율 1위 정당이 됐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올 12월 총선에서 집권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스페인도 그리스처럼 IMF를 비롯한 트로이카와 한바탕 격전을 치를 수밖에 없다. 라가르드의 고민이 커지는 이유다. 그리스는 메르켈의 강경한 자세에 밀려 빚 탕감 대신 조건 완화로 요구 조건을 또 바꿨다. 그리스의 황당한 요구와 잦은 말 바꾸기, 메르켈의 강경 대응 속에서 트로이카의 또 다른 축인 IMF의 라가르드가 어떻게 나올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라가르드는 1956년 프랑스 파리에서 영어 교사인 아버지 로베르 라유에트와 라틴어 교사인 어머니 니콜 라유에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가톨릭 학교를 다녔는데 10대 때 싱크로나이즈드 선수로 활동했다. 15세 때 전국 대회에서 동메달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와 세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네 자녀를 홀로 키운 어머니로부터 강인한 정신력을 물려받았다는 평가다.1974년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를 마친 그는 장학금을 받고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타에 있는 홀틈암스 학교를 1년간 다닐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에서 공화당 소속 윌리엄 코언 당시 하원의원의 보좌관 인턴으로 일했다. 당시 갓 국회에 입성한 신출내기 초선 의원이던 코언은 하원의원(1973~1979)을 거쳐 나중에 메인주 상원의원(1979~1997)과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 정권에서 국방장관(1997~2001)을 지낸 거물 정치인이다. 당시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라가르드는 코언 의원의 지역구 주민 중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과 코언 의원 사이의 편지 왕래를 도왔다. 그러면서 정치인과 국제적인 인물이 되는 꿈을 키웠다.
원칙 강요보다 대화·타협 추구
▎라가르드 총재(왼쪽)와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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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간 라가르드는 파리 10대학에 진학했다. 파리 서쪽 교외인 낭테르의 비즈니스 지구인 라데팡스에 있어 지금은 파리 서부 낭테르 라데팡스 대학으로 불리는 이 대학은 소르본 대학이 확대된 13개 파리 대학 중 하나다. 법학·인문학·정치학·사회과학·경제학이 강한 대학으로 꼽힌다. 대학을 마친 라가르드는 영어와 노동법에서 각각 하나씩 두 개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사회법 고등디플로마(석사를 마친 뒤 1년간 더 공부해 받는 프랑스 특유의 학위)도 하나 얻었다. 이후 남부의 엑상프로방스로 옮겨 엑상프로방스 정치연구소에서도 석사를 하나 더 받았다.이후 라가르드는 생애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게 된다. 바로 프랑스의 엘리트 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것이다. ENA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엘리트 학교로 졸업하면 정관계와 금융업체, 기업체 등에서 출세가 보장된다. ENA 진학과 공직자의 꿈을 포기한 라가르드는 변호사의 길을 걷게된다. 파리에서 변호사를 하다 1981년 미국 시카고에 본사를 둔 국제법률회사인 베이커 앤 맥킨지에 들어갔다. 전 세계 35개국에 4600명의 변호사를 고용하고 있는 세계적인 법률 서비스 업체다. 반독점법과 노동법을 주로 다룬 그는 6년 만에 파트너가 돼 서유럽 책임자인 파리 사무소장을 맡았다. 1991년 시카고 본사로 옮긴 그는 1995년 이사회에 합류했으며 1999년에는 이 회사의 첫 여성 이사회 의장이 됐다. 2004년 글로벌 전략 담당을 맡았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의 유명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즈비뉴 브레진스키 등과 미국-유럽 관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자크 시라크 대통령으로부터 2000년 레종되뇌르 기사장을 받았다. 이후 시라크로부터 정계 입문을 제의받고 2005년 귀국했다.대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라가르드는 2005년 6월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 내각에서 대외통상 장관을 맡았다. 그는 입각 이틀 뒤 프랑스가 대외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노동법부터 손봐야 한다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그는 명성까지 함께 얻게 됐다. 내각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정권이 들어서자 경제, 재정 및 고용 장관 자리를 맡았다. 프랑스 경제의 수장이 된 것이다. G8국가 중에서 첫 여성 재무장관이다. 재무장관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2011년 그는 IMF 수장으로 말을 갈아탔다. 총재가 된 이후 예리하지만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해왔다는 평이다. 원칙 강요보다 대화와 협력을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