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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만사 미리 헤아리고 준비해야 

국가 안보 강조하며 자주 인용 … 위기대응 역량 평소 강화해야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세종 12년 4월 13일 병조참의 박안신이 상소를 올렸다. “왜적을 막기 위해서는 육군 수십만이 방어하는 것보다 병선(兵船) 수척으로 제어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병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나무를 재목으로 써야 하는데, 백 년 이상을 자란 소나무가 수백 주는 있어야 배 한 척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중략)…만일 재목이 부족하여 전함(戰艦)을 만들 수가 없다면 왜적이 우리 백성을 죽이고 해안을 노략질하던 전일의 화가 다시 반복될 것이옵니다. 어린 나무들을 잘 가꾸고 화재를 방지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인 이유입니다…(중략)…공자께선 ‘사람이 멀리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근심이 생긴다(人無遠慮, 必有近憂)’고 하셨고, 맹자도 말하기를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할 때에, 진실로 지금이라도 쑥을 구해 묵히지 않으면 종신토록 3년 묵은 쑥을 얻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미리 후환을 염려할 줄 모르면 일을 당하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음을 경계한 것입니다.”

심모원려의 자세 필요

상소에 등장한 공자의 말은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오는 것으로 주로 안보태세를 강조하면서 인용된다. 세종 31년 3월 16일 함길도 최전방 지역을 담당하는 경흥부사 김약회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 시스템 개선을 요청할 때, 성종 19년 6월 4일 유자광이 국경 의주성의 수축을 건의할 때 모두 이말을 거론한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 전쟁의 위기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멀리 내다보고 미리 준비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단 국가 안보뿐만이 아니다. 순조는 “사람이 멀리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근심이 있게 마련이다. 만일 나라에 저축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있겠는가? 다른 일도 그렇다. 미리 준비하면 모든 일이 다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다”라고 말한다(순조 9.12.12). 발생 가능한 것을 예측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는 생각한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예측은 빗나가게 마련이다. 그래도 ‘준비’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정조는 “경들에게는 큰 병폐가 있다. 일이 있을 때에는 허둥대다 일이 없으면 이내 안주하고 만다. 세상일이란 끝없이 변화한다. 비록 어떤 일을 정확히 예측하여 강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이 없을 때에도 언제나 일이 있을 때처럼 생각한다면 실제 일이 닥쳤을 때 이를 해결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허둥대는 지경엔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당부했다.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하며 앞날을 대비하는 그 과정 속에서, 내공이 쌓이고 위기대응 역량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정조는 “옛날 사람들은 일이 자신의 능력보다 작았기 때문에 쉽게 처리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일이 자신의 능력보다 크기 때문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바둑에 비유하면 수법이 높을수록 바둑알을 더욱 작게 보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바둑에는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이라는 말이 있는데, 큰 국면을 헤아릴 수 있으면 한 수 한 수도 제대로 둘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키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서두에서 등장한 맹자의 말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맹자] ‘이루(離婁)’ 장에 나오는 ‘7년 동안 병을 앓으면서도 3년 말린 쑥을 찾으러 다닌다(七年之病 求三年之艾)’는 구절은 미리 준비하지 않는 잘못을 지적한다. 병을 7년째 앓았다면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3년 말린 쑥을 마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쑥을 찾겠다고 동분서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준비를 안 한 상태에서 일이 닥쳤을 때 그저 자신만을 탓하며 체념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종 47년 2월 12일, 함경도 관찰사 신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현실을 개탄하며 상소를 올린다. “외교권이 모두 이웃 나라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을 늦게야 관보(官報)를 통해 접했습니다. 이는 지난 역사에 없었던 일로 우리나라가 처음 당한 치욕입니다. 이 형세는 장차 외교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 무슨 변괴란 말입니까! 성상(聖上, 고종)께서 밤낮으로 걱정하고 충신들이 목숨을 바치며 뭇 사람들의 울분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만 끝내 그 조약을 폐지하여 우리의 주권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대세가 이미 기울어 다시 말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도 다시 중흥시킬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지금은 종묘와 사직이 아직 안전하고 황실이 건재하며 강토와 백성이 의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변란이 생기고 치욕을 당하는 것은 단시일 내에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깊이 성찰하여 반성하고 원인을 바로잡는다면 변란을 그치게 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치욕을 씻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상하가 굳게 결심하고 죽을 힘을 다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나라가 정말로 부유해지고 군사가 정말로 강해지면 세계의 각 나라들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비록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 일을 시행한다면 공효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란 없습니다.”

갈수록 미래 불확실성 커져

7년째 앓아온 ‘병’을 치료할 수 있는 ‘3년 묵은 쑥’을 미리 준비해놓지는 못했지만 이제라도 쑥을 구해 묵혀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쑥이 묵혀지기까지 3년 동안 더 병을 앓아야 하고 심지어 그 병이 더 심해질 수도 있겠지만, 9년째가 된 해에는 약을 얻을 수가 있게 된다. 물론 3년 후에는 병이 더 심해져 이 쑥의 약효가 충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증상을 감경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진작 약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자포자기 하다가는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인류문명의 진보는 역설적으로 갈수록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앞날을 예측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수많은 변수가 던져진다. 이러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길은 앞에서도 말했듯,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시나리오 플래닝’처럼 예상되는 시나리오들을 도출하고 거기에 맞는 전략적 대응방안을 수립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겠지만, 나 자신의 크기를 키우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마찬가지이다. [손자병법]에는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지 말고, 적이 언제 오더라도 내가 준비되어 있음을 믿어야 한다(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待也)’고 했다. 어떤 미래가 올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떤미래가 오더라도 내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279호 (201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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