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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스승으로 삼을 신하를 둬라 

누구도 완벽할 수 없어 … 영조·정조도 ‘독단적이다’ 비판 받아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과거에는 군주를 ‘군사(君師)’라고 불렀다.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과 이에 기반을 둔 선한 삶을 중시한 전통사회에서 임금은 현실 정치뿐만 아니라 백성을 교화시키는 일도 책임져야 했다. 그런데 스승이 되어 뭇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구성원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능력과 자질이 없으면서 남을 가르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스승의 지위’가 임금의 권위를 더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약으로 작동한 이유다. 신하들은 만백성의 스승이 될 수 있도록 더 반성하고 더 노력하라며 임금을 옥죄려 들었다.

그렇다면 충분히 스승의 자격을 갖춘 임금이 등장했을 때는 어찌될까. 군사가 되기에 손색이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일까. 조선시대에 군사를 자처했던 군왕은 영조와 정조가 대표적이다. 이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탁월했기 때문에 신하들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더욱이 영조는 재위기간이 오래되면서 나이와 경험 면에서도 신하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들뻘인 재상, 손자 뻘인 대간들은 모두 영조의 기세에 눌려버렸다. 영조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와 경험에서 신하 압도한 영조

영조 45년 2월 3일. 응교 김익은 상소를 통해 이러한 영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하께서 목표하시는 바는 높고 숭상할 만하지만 스스로를 성(聖)스럽게 여기시어 방원(方圓)을 규구(規矩)에서 구하지 않고 경중(輕重)을 형석(衡石)에서 살피지 않으시며(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에서 본받지 않고 마음대로 한다는 뜻)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신하로 삼는 것을 좋아하시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신하 삼기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조금이라도 전하의 과실을 지적하는 논의를 하면 거슬려 하시며 이를 꺾어버리고, 그것도 부족하게 여겨 벌을 내리시고, 그것도 부족하게 여겨 지나친 전교까지 내리시니 처분이 올바르지 않고 거조가 공평함을 잃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정에서는 전하의 비위에 거슬릴 까봐 감히 진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성상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자리를 보전하는 데만 급급하여 무엇이 의로움인지, 어떻게 해야 충절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조는 대노한다. 그는 신하들에게 “무엇 때문에 김익을 절도안치(絶島安置,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 보내는 것) 하도록 청하지 않는가?”라 힐난하고 김익을 언관으로 뽑은 인사담당자도 파직시켜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신하들이 조치를 완화시켜달라고 간청하자 “경들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나를 임금으로 섬기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며 궁궐을 나가겠다고 말한다. 식사도 거부했다. 결국 나중에는 영조가 한 발 물러서긴 했지만 자신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독선을 보인 것이다.

정조에게도 비슷한 상소가 올라온 적이 있다. 장령 오익환(吳翼煥)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시고 학문도 고명하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도를 온전히 깨우치지 못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계신 것은 지혜가 뛰어나다 보니 신하들을 가볍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만기에 두루 능통해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총명을 믿으면 도리어 자만하게 되고 참과 거짓을 지나치게 따지다 보면 억측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가르칠 수 있는 상대를 신하로 삼길 좋아하시어 위엄으로 기를 꺾고 윽박지르심이 간관들에게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대신이나 근신들에까지 박대하고 업신여기시는 뜻이 드러나며,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도 부족하십니다. 이로 인해 대신들은 오직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에만 힘쓰고, 관료들은 임금의 명 앞에 순종하기만을 일삼느라 자신의 지조를 돌아보지 않고 아첨이 풍습이 되어 충직한 신하는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진언했다(정조12.1.23).

이 두 상소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신하로 삼는 것을 좋아한다’는 구절은 [맹자] ‘공손추(公孫丑)’ 하편에 나온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일을 한 군주에게는 반드시 함부로 부르지 않는 신하가 있었다. 상의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임금이 직접 신하를 찾았으니, 덕(德)을 높이고 도(道)를 즐거워함이 이와 같지 않으면 일을 훌륭히 해낼 수가 없다. 탕왕은 이윤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으셨기에 수고롭지 않게 임금 노릇을 하셨고, 환공은 관중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패자가 된 것이다.’

임금이 존경하여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고, 임금을 반성하게 할 만큼 직언과 충언을 할 수 있으며, 임금이 몸소 찾아가 의견을 물을 정도로 덕과 지혜가 높은 신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임금은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항상 성찰하며 신중한 정치를 펼치게 된다. 맹자가 바로 뒤이어서 ‘지금 여러 나라들의 영토가 비슷하고 덕의 수준도 비슷해서 더 나은이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임금이 자기가 가르칠 만한 사람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가르침을 받을 사람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한 까닭이다.

임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임금이 모든 일에 다 능통할 수는 없다.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가르침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스승으로 자처하면서 신하를 훈계하려고만 하는 임금은, 자신은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고 자신의 수준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이런 임금은 결코 좋은 정치를 펼칠 수가 없다.[맹자] ‘이루(離婁)’ 상편에 보면 ‘사람의 병통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평범한 사람들도 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스승 노릇만 하려 들면 이런저런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물며 완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임금이 성장의 기회를 차단하고 귀를 닫아버린다면 이는 자신 뿐 아니라 국가에도 큰 불행이 될 것이다.

기꺼이 배우고 실수 바로 잡아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접고 부하의 조언을 받아들이면 체면이 손상된다거나 권위가 실추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해 봐서 알아’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 이런 말이 우리에겐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지위가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과 자질 또한 그만큼 높은 것은 아니다. 과거의 성공과 경험이 아직도 유효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나는 아직 부족하며 나의 결정은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속에 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기꺼이 배우고 실수를 바로잡으며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올바른 방향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맹자가 주는 교훈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281호 (201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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