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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에 담긴 교훈만 받아들이면 그만여기서 ‘진서’란 원래 [서경(書經)] ‘주서(周書)’편에 수록된 글로, 진(晉)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실패를 반성하고 좋은 정치를 펼쳐가겠다는 진(秦)나라의 임금, 목공(穆公)의 다짐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공자가 진 목공의 말을 서경에 기록하고 증자가 다시 대학에서 이를 거론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 목공이 비록 백리해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뤘지만 후대 왕들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성군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도덕적 결함이 있었고 과오도 많았다.명종 때 저명한 학자였던 주세붕은 바로 이 문제를 거론했다. “신이 [대학]을 읽다가 유독 ‘진서’를 97자나 길게 인용한 것을 보고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비중을 높게 해놓을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목공은 ‘서쪽 오랑캐(西戎)’의 임금으로 옛 성군(聖君)들에 미치지 못하고 오패(五伯, 춘추시대에 패업을 이룬 다섯 제후)보다도 열등한데 공자께서는 어찌 목공의 말을 삭제해버리지 않고 기어이 취해 [서경]에 편제시켜 놓으셨는지 참으로 괴이했습니다…(중략)…‘진서’는 넉넉하고 포용하며 선(善)을 즐기는 군자의 도량과 시샘하고 미워하며 선을 싫어하는 소인의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말이 지극히 훌륭하기에 목공이 비록 선하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공자께서는 그로 인해 말을 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명종2.2.7).진 목공에게 부족한 점이 있긴 해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진서’의 가르침은 정치에 있어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도리가 담긴 것으로, 문제가 있는 진 목공의 말이라 하여 폐기할 수는 없다. 좋은 말 자체에 담긴 교훈만 기억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그 말을 삭제하지 않고 서경에 남긴 것이라고 주세붕은 판단한다.이러한 공자의 가치 기준은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의 ‘사람으로 인해서 말을 폐하지 않는다(不以人廢言)’는 구절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좋은 말을 한다고 그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마찬가지로 수준에 미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말이 모두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의 말까지 무시하고 배척하다 보면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소중한 말까지 놓치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흔히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수용하곤 한다. 말을 한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좋은 말도 고깝게 듣고, 그 사람이 좋으면 불편한 말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지위나 학식이 높은 사람의 말은 존중하면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말은 무시하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현종 9년 7월 27일, 어전회의에 풍기군수 어상준이 올린 상소가 의제로 올라왔다. 임금이 내용을 검토해 처리하도록 지시하자 영의정 정태화는 “상준은 사람됨이 부족해서 취할 만한 말을 할 수 없는 자입니다”라며 논의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좌의정 허적도 “상준은 인물과 문장이 모두 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며 동조했다. 어상준의 인품과 능력이 모두 변변치 못하니 그가 올린 상소문도 수준미달일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자 이조참판 민정중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반박했다. “사람이 못났다고 해서 그 말까지 폐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상준이 한 말이라도 그것이 진정 좋은 말이라면 어찌 버릴 수 있겠나이까.” 그 사람의 자질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제대로 헤아려보지도 않고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그 사람의 말이 가져다 줄지도 모를 긍정적인 변화를 시작도 하지 않고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태도가 습관이 되고 정치의 관행이 되면 많은 이들의 말이 사장되고 만다. 백성들의 생각이나 의견은 위로 전달되기 힘들어진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말이므로 아예 고려하지도 않을 것이니 말이다.따라서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선은 경청하고, 그 말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의 득실은 말을 한 사람을 보고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 자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사례도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효종 8년 4월 29일, 경연에서 시강관 이만웅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지금 사람들은 진언을 하고 싶어도 그 때마다 전하께서 당리당략을 위한 의견이 아니냐, 혹은 정직한 체 하며 명예를 탐하려는 것이 아니냐며 질책하는 교서를 내리시니, 뜻을 의심하고 억누름이 너무 심하여 아예 말을 하지 말자고 생각한다 하옵니다…(중략)…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겉으로만 바르고 곧은 체하는 자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자들의 마음은 매우 가증스럽지만 그렇다 해도 그 말 또한 모두 폐기할만한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취할 만한 말이 어찌 하나도 없겠습니까. 그러니 전하께서도 지레 불순한 의도일 것이라고 단정하며 신하들의 기를 꺾지 마시옵소서. 옛 사람이 ‘사람으로 인해 말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단순히 싫어하고 자신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나쁜 마음을 가진 가증스러운 사람의 말에서까지도 배우고 취할 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접하는 말이 풍성해야 다양한 아이디어 만나무릇 내가 접하는 말이 다채롭고 풍성해야 그 속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고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나게 된다. 사람을 가려가며 이러저러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한 말에 아예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이는 특히 리더에게 중요한데, 만약 CEO가 말단 직원의 말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면 구성원들은 너도 나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CEO가 싫어하고 꺼리는 사람의 말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경영에 반영한다면 좋은 아이디어들이 가감 없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는 CEO 자신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사‘ 람으로 인해서 말을 폐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