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메드 빈 나예프 사우디 왕세질 / 사진: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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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지난 4월 29일 벌어졌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80) 국왕이 왕위 계승 1순위였던 배 다른 동생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69) 왕세제를 물러나게 하고, 동복형의 아들인 모하메드 빈 나예프(55) 부왕세질(Vice Crown Prince) 겸 내무장관을 책봉했다. 사우디 역사상 차기 왕위 계승 예정자가 나이가 들어 숨진 것은 있어도 경질된 것은 처음이다.새로 왕세질이 된 모하메드가 살만 국왕의 뒤를 이으면 사우디 왕위가 처음으로 초대 국왕의 손자 세대로 내려가게 된다. 하루 원유 생산량 969만 배럴로 전 세계의 13%를 차지하는 세계 2위 산유국 사우디의 차세대를 이을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모하메드는 원래 사우디 왕조에서 처음으로 지명됐던 3세대 왕위 계승 예정자였다. 그는 지난 1월 살만 국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 무크린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부왕세질에 오르면서 창업주인 압둘아지즈의 손자 세대에서 첫 왕위 계승권자로 확정됐다.
정치력 뛰어난 삼촌들 틈에서 감각 키워
▎사우디는 외부 침입자가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게 5중 벽을 1000km에 걸쳐 만들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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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왕가는 1953년 창업주인 압둘아지즈 국왕이 별세한 뒤 사우드(1953~64)에서 파이살(1964~75), 할리드(1975~82), 파드(1982~2005), 압둘라(2005~2015), 살만(2015~)까지 형제 상속으로 이어졌다. 창업주의 2세대가 지금까지 62년간 2~7대 군주를 이어간 기록이다. 이른바 ‘왕자의 난’을 막으려는 장치다. 이런 장치 덕분에 사우디에서는 왕위를 둘러싸고 골육 상쟁이 벌어진 적이 없다. 압둘아지즈는 21명의 왕비 사이에서 45명의 아들을 뒀는데 36명이 성인까지 성장했다. 이 중 무크린이 막내였는데 살만의 이번 결정으로 왕위 계승이 좌절된 것이다.모하메드는 2012년 세상을 떠난 나예프 전 왕세제의 차남이다. 동부주지사와 주스페인 대사를 지낸 형 사우드를 제쳤다. 나예프는 살만 국왕의 동복형제다. 모하메드의 아버지인 나예프 전 왕세제와 살만 국왕은 사우디 초대국왕인 압둘아지즈의 제8왕비인 하사 빈트 아메드 알 수다이리(1900~69)의 아들이다. 하사는 신앙심이 깊으면서도 정치적인 의지가 강해 서구로 치면 데레사 수녀와 매거릿 대처를 합친 듯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슬하에 성인까지 생존한 7명의 아들을 뒀는데, 하나 같이 뛰어나 ‘수다이리 7형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형제는 오랫동안 사우디 왕실과 정국을 주도해왔다. 장남이 파드 제7대 전 국왕이다. 차남인 술탄(1928~2011)과 삼남이자 모하메드의 부친인 나예프(1933~2012)는 왕세제까지 올랐으나 계승 전에 세상을 떠났다. 살만은 6남이다. 수다이리는 아들 둘을 국왕에 올린 기록을 세웠는데, 손자까지 왕위에 올리게 된 것이다. 수다이리 7형제 집안이 사우디 왕실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의미다.이렇듯 모하메드는 정치력이 뛰어난 삼촌들 틈에서 어려서부터 정치 감각을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중요한 점은 모하메드가 친서방 성향의 반테러리즘 전문가라는 사실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미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루이스&클라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눈여겨볼 점은 모하메드가 1985~88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보안 과정을 이수하고 1992~94년 영국 스코틀랜드야드(경찰청)의 대테러 부대에서 훈련받았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보안·대테러 전문가로 교육, 훈련을 받은 것이다. 이런 경력으로 볼 때 모하메드는 사우디의 ‘왕실 안보’를 책임지기 위해 오랫동안 특별히 길러진 인물로 평가된다. 살만의 총애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력이다.사우디는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겉으로는 별다른 격변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반정부 세력은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을 색출하고 의심 인물을 감시하는 국내 보안 업무에 상당히 공을 들여왔다. 서방의 인권 문제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왕실의 안정을 위해 사전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임무를 주도해온 인물이 바로 모하메드다.최근 모하메드는 이웃 이라크의 북부지역을 장악한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미 지난해 하반기 접경지역에서 IS의 소행으로 보이는 공격을 받아 사우디군 3명이 숨졌다. 수도 리야드 부근에서도 IS 주도로 보이는 인질극이 발생해 경찰 1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사우디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모하메드로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반정부 운동에 강경 대처해온 매파살만 국왕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국방장관이던 지난해 9월 이라크 국경을 따라 길이 1000km에 가까운 ‘2500리 장성’을 건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거대한 융·복합형 국방·보안 사업이다. 외부 침입자가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게 5중 벽을 가진 방호벽을 세운 뒤 20km마다 감시 레이더를 설치하고 벽에 감지센서까지 부착해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을 구축할 계획이다. 하늘에는 정찰기와 무인감시기가 항시 떠있게 된다. 여기에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된다. 살만에 이어 이 업무를 맡은 인물이 모하메드로 알려졌다. 프로젝트의 성격 자체가 국방과 보안을 겸하기 때문이다. IS는 물론 이란과 가까운 이라크의 시아파가 사우디나 예멘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하메드가 맡은 보안 업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다. 모하메드는 굵은 뿔테 안경에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어 부드러운 인물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는 테러는 물론 사우디 국내의 반정부 운동에 강경하게 대처해온 사우디의 대표적인 매파 인물로 통한다. 실제로 1999년 9·11테러 이후 사우디 내무부의 보안담당 차관보를 맡으면서 이 나라의 대테러 프로그램을 주도해왔다. 2004년 내무차관, 2012년 내무장관에 각각 올랐다. 한편으로는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버락 오마바 미 대통령이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직접 만나 여성 인권 확대를 약속하는 등 사우디 이미지 개선에도 힘써왔다. 다른 왕족과 달리 부패와 거리가 멀고 권력을 개인적으로 남용하지 않으며 업무에만 몰두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모하메드가 삼촌을 제치고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된 것은 사우디 왕실이 안고있는 고민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보안 전문가가 순서까지 바꿔가며 차기 후계자가 된 것은 사우디 정책의 우선순위가 왕실 안보와 보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사우디 왕실과 정부가 가장 공들이는 국정 분야도 안보와 보안 분야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지난 1월 즉위 뒤 국방장관에 셋째 아들인 모하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35)를 앉힌 것만 봐도 얼마나 안보에 노심초사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방장관이다. 나이를 떠나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자식에게 국방을 맡기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장남이 국방장관, 왕위 계승권자로 밀어줄 정도로 충애하는 조카가 내무장관을 맡아 왕실을 호위하는 형국이다.살만 국왕도 2011년 11월부터 즉위 직전까지 국방장관을 맡았다. 사실 국방과 내부 보안은 사우디 왕실의 최고 관심사이자 정부의 최우선 순위 정책 목표다. 예산이 이를 말해준다. 올해 초 나온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정례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는 지난해 808억 달러의 국방비를 썼다. 미국(5810억 달러)·중국(1294억 달러)에 이은 세계 3위다. 러시아(700억 달러)나 영국(618억 달러)보다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3년 사우디의 국내총생산(GDP)은 명목금액 기준으로 7480억 달러(세계 19위)로 1조3045억달러(세계 14위)인 한국의 57% 수준이다. 그런데도 국방비 지출은 344억 달러로 세계 10위인 한국의 2.3배에 이른다. 군사국가인 것이다.
미래 국왕에 오를 정지작업도 진행 중사실 사우디에는 안보 불안 요인이 수두룩하다.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는 예멘의 시아파 반군인 후티에 대한 공습을 주도하고 있다. 사우디는 후티 반군이 수도인 사나를 장악하고 수니파인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을 쫓아내고 무력으로 압박하자 공습 작전에 나섰다. 하디 대통령은 예멘의 남부도시 아덴에 머물면서 사우디의 지원으로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수니파 아랍권 9개 동맹국과 함께 4주간 ‘아시파트 알하즘(단호한 폭풍)’ 작전이라는 이름의 집중 공습을 진행한 뒤 해상 봉쇄와 공중 감시를 중심으로 하되 필요하면 수시로 목표물을 폭격하는 ‘희망의 복원’ 작전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2000여 차례에 이르는 대규모 공습으로 후티의 스커드 미사일 등 전력의 80%를 무력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폭격으로 전 국토를 휩쓸 기세였던 후티 반군이 주춤해졌으나 수도인 사나는 여전히 점령하고 있다. 미국도 사우디의 공습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인 시어도어 루스벨트함과 순양함 노르망디함을 예멘 앞 바다인 아덴만으로 파견했다. 이번 작전은 시아파 종주국인 숙적 이란을 견제하는 목적도 있다. 미군이 해상을 봉쇄해 이란의 무기가 예멘 반군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모하메드는 이런 상황에서 국경을 맞댄 예멘의 시아파가 사우디로 침투하지 않도록 국내 보안을 강화해왔다. 첫 3세대 왕위 계승자가 될 모하메드가 나중에 국왕에 오른 뒤 사우디를 장악할 사전 작업도 이미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살만 국왕이 경제 권력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에 속도를 내면서 정지 작업을 하고 있다. 우선 사우디 국부의 원천인 석유와 관련한 최고 기구를 개편했다. 석유 정책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였던 ‘석유위원회’를 없애고 대신 경제위원회를 새로 만들었다. 경제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빈 압둘아지즈를 임명했다. 그러면서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인 국영 아람코를 석유부에서 분리해 경제위원회 직속으로 바꿨다. 아람코 회장에 칼리드 알 팔리 아람코 최고경영자(CEO)를 임명했다. 종전에는 아람코 회장과 석유장관은 겸직이었기 때문에 팔리 회장이 6월 물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석유장관인 알리 알나이미의 후임이 될 것으로 관측됐다. 하지만 살만은 보건부장관에 겸직 임명돼 석유장관에 오를 가능성이 사라졌다. 살만 국왕은 또 다른 아들인 압둘아지즈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55) 왕자를 석유부차관에 임명했다. 서방 언론들은 압둘아지즈 왕자가 조만간 사우디 최초의 왕실 출신 석유부 장관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셰일 업계에 맞서기 위해 무제한 원유생산으로 유가를 낮춰온 알나이미 대신 왕실의 이익을 지킬 왕족 출신 석유부 장관이 탄생하면 국제 유가가 요통칠 가능성이 크다. 사우디는 이미 증산과 유가 하락으로 상당한 제정 적자를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예멘 공습 등으로 국방비는 갈수록 늘어날 전망이다. 보안 전문가인 모하메드가 왕세질에 올랐으니 보안 비용도 크게 증가할 게 분명하다. 순조로운 왕위 계승을 위해서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유가를 끌어 올리고 새로운 무기와 보안장비를 구입하면서 왕실용 리베이트를 받아 자금을 풍부하게 마련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관련 산업에는 청신호다. 보안 전문가 모하메드가 석유왕국 사우디 왕세질이 되면서 국제 경제 지형도 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