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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능히 사랑하면서 그의 나쁜 점도 알라 

감정에 치우치면 판단력 잃어 … 호불호 탓에 그릇된 선택하는 군주 많아 

김준태 칼럼니스트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중국 위나라에는 미자하(彌子瑕)라는 소년이 살았다. 빼어나게 잘생겼던 그는 궁궐에 살며 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미자하는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엄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중죄였지만 왕은 그의 효성이 지극하다며 용서해준다. 미자하는 자기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임금에게 먹어보라 권한 적도 있었다. 그의 발칙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지만, 왕은 오히려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기특하다며 그를 칭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미자하가 나이를 먹자 상황은 달라졌다. 그의 아름다움이 사그라지면서 임금의 총애 또한 시들해진 것이다. 점점 그에게서 마음이 떠난 왕은 어느날 갑작스레 미자하에게 벌을 내린다. 죄목은 과거 자신이 칭찬해마지 않았던 앞의 두 사건이었다.

숙종은 한 당파를 전멸시키기도

어떤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관대해질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잘못마저 예뻐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 치우친 감정에서 비롯된 태도라는 점이다. 감정의 편중이 상대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방해하고 균형 있는 인식을 가로막아 상대를 올바로 대하지 못하게 만든다. 상대방에 대한 판단과 태도 역시 감정이 바뀌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 같은 것이 된다. 이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이런 상황은 비단 좋고 싫음, 사랑과 미움 같은 감정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두려움·연민·슬픔·존경·게으름 등의 감정들도 쉽게 내 마음을 왜곡시키고 또 치우치게 만들 수 있다. [대학(大學)] 傳 8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 친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두렵고 공경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데에서 편벽되며, 오만하고 게으른 데에서 편벽된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살필 수 있고, 미워하면서도 아름다운 면을 아는 사람은(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세상에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이것이 감정 자체를 부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에 휩쓸림으로써 다른 판단까지 마비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감정에 의해 가려지게 될 지도 모를 객관적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조선사회에서 이 문제는 왕에게 더욱 강조됐다. 숙종 때 열린 경연에서 김만기(金萬基)는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사람들은 보통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비록 과오가 있더라도 애정이 가려서 그 과오를 보지 못합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자에게는 비록 죄가 없더라도 살펴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심정(心情)입니다. 그래서 원한을 품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인데, 군주의 경우에는 이 좋아함과 미워함으로 인한 결과가 너무나 큽니다. 진실로 능히 사랑하면서도 그의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운 점을 알아서, 사람의 죄 있음과 없음을 살펴 명철하게 분별해낼 수 있다면 미혹됨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마음을 덮게 되면 비록 많이 공부한 자라도 그 공(功)을 이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군주이겠습니까?”(숙종1.4.16).

그러나 숙종은 이를 잘 지키지 못했고 그때그때의 상황과 호불호에 따라 한 당파를 전멸시키는 환국(換局)을 단행했다. 정국은 극단적인 대결양상을 보이게 됐다. 정치에 주관적인 마음을 많이 개입시킨 것은 선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신하들에 대한 감정을 도드라지게 드러낸 왕이었다. 선조는 “호오(好惡)가 일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즉 자신의 감정에 따라 신하를 좋아하고 싫어하며, 그조차 기준 없이 자주 뒤바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선조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부정했다. “한 사람의 몸에는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다. 미워하면서도 그 선한 바를 알고 좋아하면서도 그 나쁜 바를 알아,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는 것은 바로 호오(好惡)의 천리(天理)인 것으로 임금이라 해서 사사로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선조17.7.1).

물론 왕도 사람인 이상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신하가 있을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단점은 덮어주고 싫어하는 사람의 장점은 외면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왕이 이런 주관적인 호불호에 따라 관직을 등용하거나 공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면, 원칙과 시스템은 흔들릴 것이다. 나라에는 절실히 필요한 인재이지만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아 배척당하는 사람이 나오고, 임금의 밑에는 그의 심기만 살피며 아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불만이 팽배하며 정치는 투명함을 잃게 된다. 단순히 일을 그르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국가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대학의 가르침처럼 ‘좋아해도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해도 아름다운 점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야 비로소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다.

대학의 이 구절은 집단에게도 적용된다. 흔히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잘못은 덮어주고 오판은 합리화한다. 내재된 문제점들도 올바로 직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상대편 집단에게는 엄격하다. 잘못은 어떻게든 끄집어내어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상대의 좋은 점도 외면해버린다. 이로 인해 이쪽은 무조건 옳고 저쪽은 무조건 그르다는 도식이 세워지는데, 이 속에서 양자의 갈등이 심화된다. 조선 후기 ‘붕당’의 격화가 바로 그 예다. 영조는 “만약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좋은 면을 안다면 어찌 당습(黨習, 붕당으로 인한 폐습)이 있겠는가?”라고 한탄한 바 있다(영조36.11.1). 나의 나쁜 점을 알고, 상대의 좋은 점을 안다면 비록 어느 정도의 대립은 있었을지언정 협력과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극심한 대결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대목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만 관대하기도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의 쏠림에 빠져드는 것은 인간이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학을 지은 증자(曾子)도 이를 극복해내는 사람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탄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맹목적인 감정이 나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고, 일에도 나쁜 결과를 가져왔던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을 것이다. 대상은 변함이 없지만, 그에 대한 감정이 달라짐으로 인해 마음고생을 해 본적도 있을 것이다. 감정을 느끼더라도 객관적인 시선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까닭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그 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291호 (201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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