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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갑작스런 유고는 조직에 최악의 리스크성종은 일종의 ‘모범생 강박관념’이 있던 임금이었다. 본인의 어진 성품에 엄격한 모후(母后)의 훈계, 어려서부터 부여된 철저한 제왕학 교육이 합쳐져 훌륭한 군주로 성장했지만, 동시에 성군(聖君)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간언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성군이 되기 위해 마지못해 따르는 적도 있었다. 이런 경우 아무래도 표가 나기 마련인데 대간의 비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신하의 간언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 전혀 반영을 하지 않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힐난이다.성종과 같은 평균 이상의 군주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이 지적은, 다른 보통의 임금들에게는 더더욱 예외가 아니었다.명종은 이런 간언을 받았다. “법도에 맞는 말은 따르면서도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고 완곡하게 해주는 말은 기뻐하면서도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전하께서 따르되 고치지 않으시고, 기뻐하되 되새겨 보지 않으시어, 신들이 애타게 드리는 이 중요한 말들을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이신다면 만백성의 커다란 희망은 여기서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명종21.5.12). 광해군은 이런 비판을 받았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근래에 전하께서는 매번 ‘유념하겠다’는 하교를 내리시지만, 실제로 채용하시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대간에서 올리는 논의를 따르지 않으시고, 충심에서 드리는 상소도 겉으로만 기뻐하실 뿐 되새겨보질 않으십니다”(광해2.윤3.29).이상의 상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임금의 무성의한 태도다. 신하들의 의견이나 충언을 형식적으로 수용하고 경청하는 ‘척’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임금이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한 좋은 말을 사장시킬 뿐만 아니라, 임금 개인 또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임금은 위선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임금과 구성원들 간의 신뢰도 저하된다. 하나하나의 상황에서 보면 사소한 문제인 것 같아도 종국엔 나라 전체를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국정에 혼란더욱이 이런 임금은 어떤 의미에서 더 위험하다. 훌륭한 말에 귀를 닫고, 바로잡아 주는 말을 싫어하는 임금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잘못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그를 버리거나 축출하면 된다. 내면과 외면이 모두 그릇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악하다고 치부해버리면 된다. 하지만,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 열심히 경청하는 임금은 다르다.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이 없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수용하는 척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을 헷갈리게 만들 수 있다. 오늘날 ‘경청’은 비단 리더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올바른 리더십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바른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무 조건’으로 강조되니 마음에도 없이 듣는 척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자리에서는 ‘좋은 의견이니 명심하겠다’ ‘깨우쳐주어서 고맙다’고 말을 하지만 반성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다. 그저 ‘경청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만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는 본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청’은 단순히 듣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성껏 듣고, 말한 사람과 공감하고, 그것을 통해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 내면과 외면이 합치되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