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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매번 유념하겠다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신하 만류에도 위험한 여가 즐긴 태종 … 경청만하고 흘린 성종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태종 6년, 사간원에서 상소를 올렸다. “임금의 거둥은 법도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는 법인데, 지난 10일에 전하께서는 교외에 나가 말을 타고 마음대로 달리셨습니다. 만에 하나 험한 흙탕길에 말이 놀라 거꾸러졌다면 어찌 됐겠습니까? 참담한 일이 벌어졌을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이처럼 스스로의 몸을 가벼이 여기시니 장차 종묘와 사직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어 신 등이 상소를 올렸을 때, 전하께서는 앞으로 하지 않겠다는 윤음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사냥놀이를 나가 이리 하시니, 공자께서 말씀하신 ‘기뻐하면서도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면서도 고치지 아니한다’가 바로 이것이옵니다.”(태종6.2.12).

최고 리더가 위험천만한 레포츠를 즐기는 것은 요즘도 금기시되는 행동이다. 대통령이나 그룹 총수가 카레이싱을 하다 사고가 나서 목숨을 잃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리 위기대응 체계와 후계승계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더라도 권력의 유고는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태종도 마찬가지다. 사냥과 승마를 좋아했던 태종은 안전조치 없이 전속력으로 말 달리는 일을 즐겼다. 이는 임금이 지켜야 할 법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고가 날 우려도 크다. 그래서 신하들은 그와 같은 행동을 중단하고 조심할 것을 요청한 것이고, 태종도 유의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어기고 태종은 또다시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신하들은 이러한 태종의 태도를 비판하며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공자는 [논어]의 ‘자한(子罕)’편에서 ‘법도에 맞는 말은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완곡하게 타일러주는 말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 何也已矣)’고 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말은 듣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그대로 실천에 옮길 줄 알아야 한다.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말은 고마워하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귀로는 듣고 고마워하면서도 스스로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면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이후 실록에도 빈번하게 등장한다.성종 때 대간은 “대저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어서 기쁘게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이미 기뻐하였다면 그 말을 따르는 것은 어렵지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신 등의 말을 기뻐하며 이를 높이 평가하시면서도 정작 그 말을 채택하여 적용하진 않으십니다. 이는 이른바 ‘기뻐하면서도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면서도 고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라며 임금을 비판했다(성종24.8.28).

리더의 갑작스런 유고는 조직에 최악의 리스크

성종은 일종의 ‘모범생 강박관념’이 있던 임금이었다. 본인의 어진 성품에 엄격한 모후(母后)의 훈계, 어려서부터 부여된 철저한 제왕학 교육이 합쳐져 훌륭한 군주로 성장했지만, 동시에 성군(聖君)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간언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성군이 되기 위해 마지못해 따르는 적도 있었다. 이런 경우 아무래도 표가 나기 마련인데 대간의 비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신하의 간언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 전혀 반영을 하지 않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힐난이다.

성종과 같은 평균 이상의 군주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이 지적은, 다른 보통의 임금들에게는 더더욱 예외가 아니었다.명종은 이런 간언을 받았다. “법도에 맞는 말은 따르면서도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고 완곡하게 해주는 말은 기뻐하면서도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전하께서 따르되 고치지 않으시고, 기뻐하되 되새겨 보지 않으시어, 신들이 애타게 드리는 이 중요한 말들을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이신다면 만백성의 커다란 희망은 여기서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명종21.5.12). 광해군은 이런 비판을 받았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근래에 전하께서는 매번 ‘유념하겠다’는 하교를 내리시지만, 실제로 채용하시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대간에서 올리는 논의를 따르지 않으시고, 충심에서 드리는 상소도 겉으로만 기뻐하실 뿐 되새겨보질 않으십니다”(광해2.윤3.29).

이상의 상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임금의 무성의한 태도다. 신하들의 의견이나 충언을 형식적으로 수용하고 경청하는 ‘척’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임금이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한 좋은 말을 사장시킬 뿐만 아니라, 임금 개인 또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임금은 위선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임금과 구성원들 간의 신뢰도 저하된다. 하나하나의 상황에서 보면 사소한 문제인 것 같아도 종국엔 나라 전체를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국정에 혼란

더욱이 이런 임금은 어떤 의미에서 더 위험하다. 훌륭한 말에 귀를 닫고, 바로잡아 주는 말을 싫어하는 임금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잘못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그를 버리거나 축출하면 된다. 내면과 외면이 모두 그릇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악하다고 치부해버리면 된다. 하지만,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 열심히 경청하는 임금은 다르다.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이 없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수용하는 척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을 헷갈리게 만들 수 있다. 오늘날 ‘경청’은 비단 리더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올바른 리더십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바른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무 조건’으로 강조되니 마음에도 없이 듣는 척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자리에서는 ‘좋은 의견이니 명심하겠다’ ‘깨우쳐주어서 고맙다’고 말을 하지만 반성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다. 그저 ‘경청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만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는 본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청’은 단순히 듣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성껏 듣고, 말한 사람과 공감하고, 그것을 통해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 내면과 외면이 합치되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292호 (201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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