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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롯데 정서 수습 어떻게?] “정규직 채용 확대, 사재 출연 검토해야” 

‘사실상 고향’ 부산에서조차 민심 이반 심각 … ‘그냥 싫다’ 수준에 이르면 답 없어 


▎8월 12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마트 서울역점 앞에서 참여연대 회원들이 롯데그룹 불매운동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난 1월 초만 해도 신동빈 회장의 앞날은 거칠 게 없어 보였다. 형인 신동주 전 부회장이 롯데홀딩스 부회장, 롯데상사 부회장 겸 사장 등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신동빈 회장이 일본 롯데까지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였다.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던 그가 대외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도 ‘자신감의 표현’으로 풀이됐다. 신 회장은 연초부터 공식석상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잦은 인명사고와 안전 논란으로 구설에 오른 제2롯데월드 공사 현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고, 100층 돌파 기념식과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도 연이어 참석했다. 그때마다 그룹의 리더답게 힘 있는 발언을 쏟아냈다. 큰 잡음 없이 KT렌탈 인수작업을 지휘했고, 국민연금과 대규모 해외 공동투자 협약을 맺은 것도 나름 소득이었다.

그러나 뒤로 밀린 형이 난데 없이 비수를 날렸다. 칼날 자체는 무뎠으나 후폭풍은 매서웠다. 난타전 끝에 일단 승리는 챙겼지만 신 회장은 이미 많은 걸 잃었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면서 그는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단 수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예정에 없던 대규모 지출이다. 동시에 계열사 상장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잘 되면 괜찮은데 한 곳이라도 차질을 빚으면 정리 작업은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반일감정 제대로 건드린 두 형제의 일본어

이 와중에 국세청은 대홍기획에 이어 롯데리아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출발은 작은 계열사지만 세무조사의 칼끝이 언제든 그룹 심장부를 직접 겨냥할 수도 있다. 정치권 역시 벼르고 있다. 비교적 재계에 우호적인 여당마저 각을 세우는 상황이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이번 국정감사에서 문제가 있는 재벌 총수는 국감장에 서게 될 것”이라며 “문제가 많은 재벌을 비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롯데를 겨냥한 얘기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장기적으로 그룹의 체질을 개선하고, 부실을 털고 간다는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롯데는 이번 분쟁을 통해 그동안 숨기려 했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바로 국적 논란이다. 국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이 부분이었다. 사실 국적은 이번 사태의 핵심과 동떨어진 주제다. 기업도 본사 소재지를 기준으로 국적을 따지긴 하지만 글로벌화가 진행된 요즘엔 ‘적(籍)’을 논하는 게 사실상 무의미하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전 세계 수백개 나라에 스마트폰과 자동차를 판다. 뭐든 내다 팔아야 살 수 있는 환경에서 한국 경제는 그렇게 성장했다. 우리 기업이 해외에 진출하는 게 당연하듯 어떤 기업이든 한국에서 장사를 하고, 한국에 법인세를 내고, 한국인을 고용하면 된다. 롯데가 일본 기업이든 한국 기업이든 상관없다는 의미다.

금융소비자원 등 시민단체 불매운동 시작


▎부산 부산진구의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부산에서 향토기업 대접을 받았던 롯데는 이번 사태로 기업 이미지가 크게 나빠졌다.
그러나 대중 정서는 객관적 사실에 늘 부합하는 게 아니다. 롯데가 오랜 기간 한국에서 터를 잡고 성장해온 회사지만 노출 빈도가 거의 없는 재벌 총수다 보니 대다수 국민은 두 형제가 한국말을 하는지 일본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사람은 어눌한 한국어로, 한 사람은 아예 일본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은 대중에게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신 회장이 “롯데는 한국기업”이라고 못을 박았지만 오히려 반감은 ‘그동안 정부가 일본기업에 특혜를 줬다’ ‘한국에서 번 돈을 일본으로 가져간다’는 식으로 확장됐다. 롯데가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문제다. 국적 논의의 유효성을 떠나 강력한 반일정서가 기저에 깔린 한국에서 ‘롯데=일본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롯데에게 미칠 악영향은 명약관화다.

여기에 재벌에 대한 반감까지 더해졌다. 수조원의 재산을 가진 부유층의 치졸한 자리 다툼에 국민은 크게 분노했다. 롯데는 유통회사다. 껌·과자로 시작해 백화점·호텔으로 사세를 키웠다. 국민의 사랑 없인 이만큼 크지 못했을 터다. 그런데 형제가 마치 집 한 채를 나눠먹듯 기업을 사유화하는 것으로 비춰졌으니 비난은 당연했다. 실타래처럼 꼬인 순환출자와 비상장 회사를 앞세운 지배구조 등 비교적 덜 알려졌던 사안도 모두 수면 위로 드러났다. 대중이 지갑을 열어야 먹고 사는 유통회사에게 기업 이미지 추락은 곧 실적 악화를 의미한다.

신 회장의 두 번에 걸친 사과에도 반롯데 정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융소비자원은 8월 4일 롯데그룹 약 80개 계열사 제품에 대한 무기한 불매운동을 선언했다. 이어 13일에는 소상공인연합회와 연대해 불매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금소원 측은 “롯데카드·롯데마트·롯데백화점 등 롯데 관련 불매운동을 보다 더 강력하게 전개할 것”이라며 “공정한 시장 경제와 대기업 횡포로 인한 소상공인, 자영업자 등 서민의 피해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참여연대와 경제민주화실현전국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도 8월 12일 서울역 롯데마트 정문 앞에서 롯데의 복합쇼핑몰 출점 등을 규탄하는 집회를 갖고, 불매운동을 경고하고 나섰다. 이들은 “롯데그룹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동반성장이라는 책무는 멀리한 채 골목상권과 중소상인 등 서민경제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전혀 제도적인 대책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키워줬는데…” 부산 시민의 배신감

불매운동은 적절하지 않은 대응이라는 지적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롯데가 일본 기업이든 아니든 직원은 대부분 한국인인데 회사 실적이 나빠지면 롯데 임직원만 피해를 볼 것”이라며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 친척인데 오너의 잘못으로 연대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론에도 불매운동은 더욱 확산될 분위기다. 향토기업 대우를 받았던 부산·경남 지역에서도 일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부산은 롯데가 4개의 백화점과 9개의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곳이자 34년 역사를 가진 프로야구단 롯데 자이언츠의 연고지다.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의 운영 주체 역시 롯데다. 3월 16일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 참석한 그는 “부산은 회장님(신격호 총괄회장)의 사실상 고향이기도 하고 우리 그룹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역”이라며 “앞으로 투자도 많이 하고, 일자리도 많이 만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산 시민 김은철(34)씨는 “부산 롯데타워 공사 지연, 롯데 자이언츠 CCTV 사찰 등으로 최근 몇 년 사이 롯데의 기업 이미지가 크게 나빠졌는데 이번 사건으로 확실히 등을 돌린 시민이 많다”며 “시민이 키운 기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벌써 일부 대형마트에서 롯데 제과·음료 제품의 판매 감소가 뚜렷하게 관측된다는 말이 나온다. 일단 롯데 측은 부인하고 있다. 롯데 관계자는 “단기적으로 판매가 소폭 감소할 여지는 있으나 급격한 매출 감소를 우려해야 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직은 버틸 만하지만 세무조사 결과, 순환출자 해소 과정 등에서 부정적 이슈가 추가로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나아질 여지도 있지만 더 나빠질 여지도 충분하다는 의미다. 롯데에 대한 반감이 ‘그냥 싫다’는 수준에까지 이르면 그때는 답이 없다는 게 전문가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신 회장의 사재 출연 등 추가적인 대응책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라며 “롯데가 그동안 비정규직 비중이 큰 부실 채용으로 논란을 빚어온 만큼 정규직을 대폭 늘리는 등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스기사] 신격호 총괄회장 상태는? - 2012년부터 건강이상설…‘알츠하이머’에 무게


롯데그룹은 매년 5월 다소 이색적인 행사를 열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고향인 울산 울주군 삼동면에서 열리는 ‘둔기마을 고향방문 잔치’다. 1970년 대암댐 건설로 고향 마을이 수몰되자 이듬해 신 총괄회장이 고향을 잃은 주민들을 초청하면서 시작됐다. 롯데삼동복지재단이 주최하는데 마지막으로 열린 2013년 잔치에 1600여명이 참석했을 정도로 규모가 큰 행사다. 신 총괄회장은 40년 넘게 열린 이 행사에 꾸준히 참석했지만 그가 행사장에 직접 나와 마을주민과 인사를 나눈 건 2011년이 마지막이었다. 2012~13년 2년 동안은 행사 기간에 맞춰 고향을 찾긴 했으나 별장에만 머물렀고, 지난해와 올해는 아예 마을잔치가 열리지 않았다. 신 총괄회장의 건강이상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2012년 즈음이다.

건강이상설은 2013년 말 고관절 수술 이후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구체화됐고, 이후 재계엔 확인되지 않은 여러 소문이 돌았다. 롯데건설 관계자 사이에선 “제2롯데월드 건설 현장을 일주일 사이 재차 방문하면서 처음 온 것처럼 이것저것 묻기에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밤 늦은 시각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정문에서 수행원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모습이 포착됐다는 소문이 흘러나온 것도 지난해다.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전인 지난해 말 만난 롯데그룹 고위 관계자는 “오전에 사람을 알아보시다 저녁에 누구냐고 되물어볼 때 가장 당황스러웠다”며 “이미 결제한 서류를 다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언제 결제했느냐고 역정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신 총괄회장이 3~4년 전 알츠하이머병(치매)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증언이 롯데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최근 방송에 공개된 영상에서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고 어눌한 말투로 원고만 읽어 내려가는 모습과 공항에서 취재진을 다소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모습 등과 겹친다. 증언이 사실이라면 마을잔치에서 마지막으로 주민과 만난 시기와도 일치한다. ‘거동이 조금 불편할 뿐 건강에 큰 이상이 없다’는 게 롯데그룹 측의 공식적인 입장이지만 신동빈 회장이 지난 8월 3일 “신 총괄회장이 정상적인 경영 판단이 가능하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답변한 것 등을 종합하면 와병설에 무게가 실리는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 오너 일가의 자문의 역할을 해왔다는 유명철 경희대 의대 석좌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치매는 낭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 교수 역시 연초 이후 수 개월 간 신 총괄회장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1300호 (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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