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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16세기에 홀연히 사라진 보족의 유산 

쓰촨성 이빈시가 자랑하는 명품 녹차 ‘루밍차(鹿鳴茶)’ … 1960년대에 부활 

서영수

▎중국 쓰촨성의 루밍차 산지.
루밍차(鹿鳴茶)는 중국 쓰촨성 이빈시가 자랑하는 명품 녹차다. 루밍차는 16세기에 갑자기 사라진 쓰촨의 보족이 이빈시 공시앤을 중심으로 재배해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던 황실공차였다. 보족은 2500년 전부터 중국 서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소수민족 집단이었다. 진나라 이전에는 복후국이란 나라를 세워 진과 대치하기도 했다. 보족은 높은 절벽에 관을 매다는 현관풍속을 최초로 시작한 민족이다.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던 황실공차


▎보족 민속문화유적지.
보족의 전설에 따르면 루밍은 옥황상제를 위해 불로장생차를 만들던 신선이었다. 매년 3월 3일 모든 신선이 모여 연회를 열 때 옥황상제가 공이 가장 큰 신선에게만 하사하던 귀한 차가 루밍이 만든 차였다. 루밍에게는 16세의 총명하고 아리따운 외동 딸 바오주가 있었다. 딸 바보인 루밍은 모든 일을 바오주의 뜻에 따라 결정하며 부녀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바오주는 어려서부터 루밍을 따라다니며 다원에서 놀며 자연스레 다원관리와 차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아버지를 도와 차를 만드는 루밍의 효심과 미모는 신선들 사이에서 회자돼 옥황상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바오주의 소문에 반한 옥황상제는 “바오주를 후궁으로 택했으니 3일 안에 채비를 하여 천궁으로 데리고 오라”고 루밍에게 명했다. 청천벽력 같은 명령에 루밍과 바오주는 비탄에 빠졌다. 이를 불쌍히 본 바오주의 외삼촌, 천둥의 신이 부녀를 몰래 빼돌려 인간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 하늘에서 가져온 차나무를 심어 차로 만들어 보족 사람들과 나누고 재배기술을 가르쳤다. 바오주는 용감한 보족 청년과 결혼해 살며 차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다. 보족은 이를 감사히 여겨 차의 이름을 ‘루밍차’라고 지었다. 전설 속의 루밍차를 현지에서 마셔보았다.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는데도 차의 맑고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며 나른해진 심신을 일깨워줬다.

사실 루밍이란 한자는 사슴이 좋은 풀을 발견하면 울음소리로 동료를 불러 함께 먹는다는 뜻으로 BC 470년경에 만들어진 시경의 소아편에 나오는 노래다. 독식하지 않고 함께 나눈다는 뜻이 좋아 왕실에서 신하들과 함께 하는 연회에서 자주 부르던 위로와 회유의 노래였다. 삼국지의 조조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부른 시에도 부하장수들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사슴소리를 흉내까지 내서 부르며 ‘루밍’을 활용했다.

루밍차를 만들던 보족은 독립정신이 강해 수시로 중원의 역사에서 이탈하려 했기에 수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다.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 때는 루밍차를 황실에 바치며 한동안 평화를 유지했지만 거듭되는 봉건군주의 폭정에 보족을 중심으로 농민의용군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제13대 신종이 10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로 오르자 보족은 반란을 일으켜 루밍차를 황실에 보내는 것을 막았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14만 대군을 보내 보족을 진압하려 했다. 보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진압군은 저항군과 민간인 구별 없이 보족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증오와 광기 어린 인종청소가 벌어졌다. 산골짜기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572년 5월에 첫 승전보를 올린 진압군은 7월부터는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한 초토화 작전에 나서 야습을 위주로 60여 개의 촌락을 불태웠으며 36곳 산채의 촌장을 생포하고 4600명을 척살했다고 한다.

거듭되는 전투 속에 살던 마을을 떠나 산 위로 쫓기던 보족은 조상들을 장례 지낸 높은 절벽 위를 천연요새로 삼아 최후의 항전을 맞이했다. 지루한 공성전을 벌이던 진압군은 황제의 거듭되는 재촉에 밀려 9월 9일 밤 절벽 위로 올라가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절벽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사항전을 하던 보족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들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근 400여리 반경의 보족이 모두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당시의 진압군 일지에도 ‘이 일대에서 융성하던 보족이 어떻게 한순간에 이처럼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라는 기록이 있다.

오늘까지도 이곳에서 자취를 감춘 보족의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보족의 저항에 대한 비장한 이야기는 쓰촨성 이빈에서 태어난 황페이진의 소설 [하대왕(阿大王)]에 장엄한 서사시로 잘 묘사돼있다. 보족을 멸족시킨 신종은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통치하며 임진왜란 때는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지어놓은 지하 능에서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연회로 소일하며 국정을 돌보지 않아 신하도 황제도 서로의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재상이 여러 번 사표를 내도 재가를 하지 않아 고향으로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죽을 때까지 정무를 보살피지 않고 쿨하게 살았던 그의 무덤이 문화혁명 때 파헤쳐졌다. 홍위병에 의해 부관참시의 모욕을 당하고 유골이 불태워졌다. 그의 죄상은 농민군 탄압이었다. 누구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멸족이 되어 사라진 보족의 복수는 홍위병의 몫이었다.

보족이 일시에 사라진 후 384년이 지난 1956년에 중국에서 실시한 민족 분류작업 과정에서 보족의 후예가 나타났다. 이족으로 분류되기 직전에 자신을 보족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나타났다. 6개 지역의 44개촌 가운데 19곳이 순수하게 보족만 모여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족의 후예는 “우리 선조께서 전란을 피해 강을 건너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살았다”고 밝혔다. 언어 습관과 복장 등 보족의 풍습이 남아있는 것을 일부 확인했지만 좀 더 철저한 고증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보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등장

보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보족이 만들던 루밍차도 부활했다. 1960년대부터 전통 루밍차를 제조하는 기술을 복원해 현대 공법과 접목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원래 보족이 살았던 지역에서 루밍차 판매가 이뤄졌다. 2005년 전국 차 박람회에서 금상을 거머쥐며 루밍차의 존재를 중국 전역에 알렸다. 지역명물로 일찍부터 한족이 재배해 별다른 굴곡 없이 곱게 자라온 이빈자오차와 쌍벽을 이루는 루밍차는 16세기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소수민족의 유산이다. 경국지색보다 더 매서운 경국지차의 사례가 근대사에도 있었지만 차로 말미암아 멸족이 된 사태는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보족은 역사에 묻혔어도 그들이 남긴 루밍차는 아직도 명차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보족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절벽 아래에 복원된 보족 문화유적지에서 보족 민속공연을 하는 사내에게 “보족이냐?”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배시시 웃기만 했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1305호 (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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