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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에 도미노식 ‘정권 교체’] 남미·동유럽 右로, 남유럽 左로 

반(反)정부 정서 고조되면서 올해 10여 개국 표심 돌아서 


▎베네수엘라 야당 지도자들이 12월 6일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한 후 환호하고 있다.
summary | 역시 먹고 사는 문제가 이념보다 민감했다. 올해 유럽·남미 등에서 정권 교체가 활발했다. 정권 교체의 가장 큰 동력은 경제 불안이었다.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경제에 반(反)정부 정서가 고조되면서 표심이 우에서 좌로, 또는 좌에서 우로 돌아섰다.

12월 6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에서 우파 야권 연대가 16년 만에 좌파 정권을 누르고 승리했다. 베네수엘라 얘기다. 이뿐만이 아니다. 올 한 해 아르헨티나·캐나다·크로아티아·폴란드·핀란드·미얀마 등 10여 개 국가에서 정권이 교체됐다. 정권 교체의 가장 큰 동력은 경제 불안이었다.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경제에 반(反)정부 정서가 고조되면서 표심이 우에서 좌로, 또는 좌에서 우로 돌아섰다.


이들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건 남미다. 정권 교체가 종종 있었던 다른 지역과 달리 오랜 기간 좌파정권 연대가 유지됐기 때문이다. 12개 남미 국가 중 콜롬비아·파라과이를 제외한 10개 국가는 좌파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변이 속출했다. 브라질과 더불어 남미의 2강으로 꼽히는 아르헨티나의 대선에서 중도 우파인 공화주의제안당(PRO)의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당선됐다. 12년 만의 정권 교체다. 베네수엘라도 한 달여 뒤 치러진 총선에서 아르헨티나의 길을 따랐다.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가 우파 정권 국가에 합류하면서 이 지역에 우향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공고했던 좌파 블록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브라질의 정권 지형도 급변하고 있다. 좌파 정권의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경기 침체에다 불법 선거 자금 의혹으로 탄핵 위기에 몰렸다. 미첼 바첼리트 칠레 대통령도 과거 85%에 달하던 지지율이 권력형 비리 문제로 20%로 떨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는 ‘아르헨티나를 기점으로 경제 위기에 봉착한 중남미에 도미노식 정권 교체가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원자재값 하락에 남미 좌파 블록 균열

유럽에서도 정권 교체 물결이 감지된다. 12월 6일 치러진 프랑스 광역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뽑는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N)이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여당을 누르고 역대 최대 득표율로 1위를 기록했다. 앞서 3월 도의원을 뽑는 지방선거에서는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이끄는 우파 대중 운동연합(현 공화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11월 치러진 크로아티아 총선에서도 크로아티아민주동맹(HDZ)이 이끄는 야당 연합이 조란 밀라노비치 총리가 이끄는 중도 좌파 집권당인 사회민주당(SDP)을 누르고 제1당 자리에 올랐다. 앞서 1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선 HDZ의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가 연임을 노리던 SDP의 이보 요시포비치 전 대통령을 누르고 승리하면서 일찌감치 바람몰이를 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대부분의 실권을 총리가 장악하고 있으며, 대통령은 국방과 외교를 담당한다.

폴란드에서도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10월 총선에서 보수 성향의 ‘법과 정의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좌파 정당은 1990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총선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하는 참패를 맛 봤다. 핀란드 국민들도 정권 교체를 선택했다. 4월 총선 결과 지난 4년 동안 야당이었던 중앙당이 국회 총 의석 수인 200석 중에서 49석을 차지해 제1정당으로 올라섰다. 스위스 총선에서는 극우 성향의 국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해 하원의 성향이 중도 좌파에서 중도 우파로 바뀌었다.

우클릭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리스에선 지난 1월 반(反)긴축을 주장한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급진좌파연합)로 정권이 넘어갔다. 치프라스 총리는 1월 총선에 이어 7월 긴축안 찬반 국민투표, 재심임을 위해 총리 사퇴 후 치른 9월 조기 총선 등 올해 치른 세 번의 선거에서 모두 이겼다. 포르투갈에서는 총선에서 승리한 우파 여당이 11일 만에 실각되면서 조기 총선을 거쳐 좌파 연립정부가 탄생할 전망이다.

캐나다에서는 쥐스탱 트뤼도 대표가 이끄는 자유당이 집권 보수당을 누르고 약 10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미얀마 총선에서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승리해 53년간 이어진 군부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밖에 카리브해의 섬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 총선에서 야당인 인민민족운동(PNM)이 여당인 국민통합의회(UNC)에 승리를 거뒀다. 나이지리아 정권은 군정 종식 이후 16년간 장기 집권해온 인민민주당(PDP)에서 제1야당인 범진보의회당(APC)으로 넘어갔다.

정권이 바뀐 대다수 나라에서 표심을 자극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였다. 경제가 흔들리자 불안과 불만이 현 정권에 대한 교체 요구로 표출됐다. 특히 남미 국가들의 경우 최근 들어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고 중국 특수가 사라져 경기 침체에 빠져든 것이 기폭제가 됐다. 철광석·원유 수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탓이다. 또 기존 정권이 이를 극복할 경제 개혁안을 추진하지 못하면서 장기 집권 체제가 속속 바뀌었다.

전체 재정수입에서 원자재가 65%, 전체 수출에서 원유 비중이 95%인 베네수엘라는 유가가 반 토막 나면서 경제에 직격탄을 맞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베네수엘라 경제는 마이너스 10% 성장하는 데 이어 내년에는 마이너스 6%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통화가치는 폭락했고, 물가상승률은 100%를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로 인해 ‘석유 외교’는 힘을 잃었고, 대중영합주의를 유지할 총알도 떨어졌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22%로 하락했다.

브라질 국내총생산(GDP)은 올해 3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4.5%나 감소했다고 브라질 통계청이 밝혔다. 이는 브라질의 현 통계방식이 시작된 1996년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이다. 전분기 대비로는 1.7% 감소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파이낸셜타임스는 국내총생산의 기록적인 위축으로 브라질이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에 빠졌다는 우려가 확인됐다고 전했다. 실업률은 지난해 10월 4.7%에서 올해 9월 현재 7.9%로 치솟았다. 6년 만의 최고치다. 물가상승률은 2002년 이후 처음으로 10%대를 넘었다. 정부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9.5%로 늘었다.

경제 위기에 친(親)시장주의 득세

아르헨티나도 경제가 침체된 상황이다. 아르헨티나의 올해 경제 성장률은 0.4%, 물가상승률은 25%에 달할 전망이다. 재정적자와 실업률은 고공행진 중이다. 12년 좌파 정권 동안 복지 확충과 소득 불평등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 장벽을 높여왔지만, 2010년 이후 경제는 정체됐다. 이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친(親)기업 성향의 우파 정권을 택했다. 친시장주의를 표방하는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신임 대통령은 보호무역정책을 폐기하거나 수출 농산품에 대한 과도한 세금을 줄이는 등 개방주의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또 외환시장 개입도 최소화할 전망이다. 그의 새 내각 인사 25명 가운데 9명이 은행과 대기업 수장을 지낸 친시장주의자로 분류된다. 주로 JP모건을 비롯해 IBM, 셸, 몬샌토, 제너럴모터스 출신이다. 마크리 자신도 경영인 출신이다. 아버지 회사인 소크마 그룹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고, 아르헨티나에서 푸조와 피아트 자동차를 생산하는 세벨아르헨티나와 자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단 보카 주니어스를 경영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버스 전용차선 도입 등 대중교통 체계를 바꿨다. 시청의 계약직 공무원 2400여 명을 해고해 행정 효율화에도 나섰다.

아르헨티나에 마크리가 있다면 핀란드에는 유하 시필레 총리가 있다. IT기업인 출신 백만장자로 알려진 시필레 총리는 의회에 입성한 지 4년 밖에 안 된 ‘정치 신인’이다. 그러나 핀란드 대표 기업 노키아의 몰락과 맞물려 이어진 경기 침체 후 경제 부활을 기대하는 표심이 그를 리더로 올렸다는 분석이다. 그는 선거 전부터 일자리 20만개 창출 등을 외치며 경제 회생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을 석권하던 핀란드는 국내총생산(GDP)의 25%까지 차지하던 노키아의 몰락과 주요 수출산업이던 목재산업 등이 쇠퇴하면서 15년 만의 최고치인 10%의 실업률을 보이고 있다.

남유럽 국가의 정권 교체는 긴축에 대한 국민투표 성격이 강하다. 그리스의 치프라스 총리는 올 1월 반(反) 긴축을 내걸고 당선됐고 7월 국민투표도 이겼지만, 860억 유로(약 115조원) 규모의 3차 구제 금융 협약을 체결하면서 혹독한 긴축안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반감을 샀고 시리자 내 급진파 의원들이 탈당해 연정이 붕괴했다. 이에 그는 조기총선으로 재신임을 받겠다며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고, 조기 총선을 통해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다. 국민들의 긴축에 대한 반대는 여전하지만, 이미 긴축안이 받아들여진 상황이어서 정책 차별화가 없었던 데다, 대안정당의 부재가 그의 재심임으로 이어졌다.

포르투갈 집권당은 재집권에 성공했다가 11일 만에 실각했다. 연립 여당은 총선에서 38.5% 득표로 제1당이 됐다. 이후 연정을 꾸렸지만 과반 의석에는 못 미쳐 불안한 소수당 정부로 출범했다. 이후 집권당이 계속 긴축책을 추진하려 하자 총선에서 32.4% 득표로 연립 여당을 바짝 추격했던 사회당이 반기를 들고 야권을 규합해 여당을 실각시켰다. 포르투갈은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 때 그리스와 아일랜드에 이어 세 번째로 780억 유로(약 103조원)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은 후 각종 긴축안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이번 실각으로 안토니우 코스타 사회당 대표를 총리로 하는 새로운 좌파 정부가 출범할 것으로 알려져 긴축정책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프랑스와 크로아티아, 폴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의 정권 교체에는 경제 침체에다 난민·테러 등 지정학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프랑스에서는 10%가 넘는 높은 실업률 등 가중된 경제난에 파리 연쇄 테러 여파로 반이민 정서가 높아진 점도 극우정당 득세에 힘을 보탰다. 크로아티아 총선에서도 중동 난민 유입 사태와 지지부진한 경제 개혁 등이 주요 이슈로 부각됐다. 폴란드의 경우 러시아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서방 정책을 통한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는 욕구가 좌파 대신 우파를 선택한 이유로 꼽힌다.

경제 개혁안이 정권 좌우

캐나다의 정권 교체에도 경기 침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남미와 마찬가지로 자원 부국 캐나다 역시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타격을 받았다. 캐피탈 이코노믹스는 캐나다의 2015·2016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대로 예상했다. 그러나 선택은 남미와 다르다. 캐나다 국민은 20만 달러 이상 고소득자 증세, 과감한 적자 재정과 소비 진작을 통한 경기 부양책을 제시한 좌파 야당을 선택했다. 친기업 정책보다는 재정확대와 양극화 해소를 통한 경제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 모습이다.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석유 자원에 의존하는 트리니다드토 바고의 케이트 라울리 총리는 총선 과정에서 석유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 산업 확장 등 경제적인 이슈와 함께 지방정부 개혁 등의 공약을 내걸어 선거에서 승리했다. 국제 유가 하락으로 부족해진 사회 프로그램 예산 집행이 당면 과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밖에 미얀마·나이지리아의 경우 정치적 의미가 더 많이 담긴 정권 교체로 분류되지만, 경제 성장을 어떻게 이끌지가 이들 새 정권의 앞날을 좌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함승민 기자 ham.seungmin@joins.com

1315호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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