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놓치면 개혁 어려워1649년, 김육(金堉)은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며 우의정에서 물러나겠다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대동법이란 백성이 나라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특산물 대신 쌀로 일원화한 제도로, 나라에서는 그 쌀을 가지고 필요한 특산물을 구입하게 된다. 또한 부과기준을 ‘가구(戶)’에서 ‘토지 면적’으로 전환해 소득수준에 따라 세액이 결정되도록 했다.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낮춘 것이다.그러자 양반 지주층이 거세게 반발한다. 자신들이 소유한 땅의 넓이만큼 내야 할 세금도 늘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대신들도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백성들은 대동법을 편하게 여기는데 호족들이 달갑지 않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 말이 근사해 보이기는 하지만, 거가대족(巨家大族, 지체가 높고 번창한 집안)이 불편하게 여기며 원망을 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우려스러운 일입니다”(상촌집).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 당할 뿐 아니라 지지기반의 이탈을 가져올 수 있는 사안으로 본 것이다. 광해군과 인조 시절에 이미 시도된 적 있던 대동법이 계속 좌절한 이유도 그래서였다.이러한 시각은 효종이 즉위한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기근이 계속되고 기존 공납 체제의 문제점이 심화되면서 백성의 불만이 폭증하자, 어떻게든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다. 대동법의 시범 실시도 그런 맥락에서 진행된 것인데, 김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조판서이자 당시 여론을 주도했던 김집 등이 강하게 반대했고, 이에 김육은 우의정을 사직하겠다며 배수의 진을 친다. 앞의 사직상소에서 이어지는 부분이다.‘신이 지금 대동법을 시행하기 위해 급급해하는 것은, 이 일은 왕위를 이어받은 처음에 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농사가 흉작이었다면 시행하기 어려웠을 텐데, 다행히 올해 농사는 조금이나마 풍년이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이 법을 시행할 수 있도록 편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또한 내년부터 시행하려면 반드시 겨울이 오기 전에는 결정해야 합니다. 신이 시기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이 올린 말이 혹 쓸만하다면 백성들에게 다행일 것이요, 만일 채택할 만하지 못하다면, 이는 제가 노망하여 일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니, 장차 이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요즘에도 자주 쓰는 말이지만 개혁에는 적기가 있다.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고 인적 구성이 물갈이 되며 여론의 지지가 뒷받침 되는 ‘정권 초기’가 대표적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개혁의 추동력은 현저히 감소한다. 김육이 효종의 즉위 초기에 이 일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다. 정책시행 환경도 적절해야 하는데 가령 세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흉년이 든 상황에서는 세제를 바꾸어봤자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다. 새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수반되는 행정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재정 여건이 좋은 시기를 택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책이 행정 스케줄에 따라 무리 없이 집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처리 시점도 중요하다. 김육은 이 세 가지 사항을 지적하며 지금이야말로 세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때라고 강조하고 있다.김육은 그러면서 우의정을 사임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말이 채택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재상은 존재할 필요가 없으니 차제에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밝힌다. 자신이 그대로 있길 바란다면 대동법을 시행해달라고 효종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효종은 이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았다. 재상으로서 김육의 경륜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김육을 대체할 만한 경제관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대동법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특히 대동법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그러자 김육은 거듭 사직상소를 올렸다. ‘어리석은 제가 밝은 성상(임금)을 만나 조금이나마 충성을 바칠 수 있을까 하였는데 사람들이 비난하며 반드시 저지하려고만 드니, 참으로 한스럽습니다…(중략)…신은 몹시 고루한 사람이라 기묘한 꾀나 비밀스러운 책략 따위는 알지 못합니다. 신은 오직 [서경]의 ‘백성들을 감싸주어 보호하라’는 것, [논어]의 ‘용도를 절약해서 백성을 사랑하라’는 것, [중용]의 ‘여러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라’는 것, [대학]의 ‘백성의 뜻을 얻으면 나라를 얻는다’는 것이 만세에 마땅히 행할 도리라고 여깁니다. 이에 부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들을 안정시켜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효종1.1.10).
유언에서도 대동법 폐지 우려김육에 따르면 대동법은 유교경전의 가르침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학자를 자임하는 대동법의 반대세력들도 이 법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법의 실행을 위해 나서는 것이 유학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일이다. 김육은 이처럼 명분을 내세워 반대세력의 논리를 제압하고자 했다. 김육은 이후에도 좌의정과 영의정을 거치면서 대동법의 시행과 확대를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다시 십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모두 대동법과 관련되어 나왔다. 요컨대, 김육의 사직서는 대동법에 대한 입법취지이자 정책설명서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동법을 향한 집념의 기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동법만 시행될 수 있다면, 그래서 보다 많은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백성들의 삶이 보다 편안해질 수 있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재상의 자리는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무릇 어떤 일의 관철을 요구하며 사직하겠다는 것은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는 의미이다. 사사로운 의도나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임명권자의 신임을 재확인해 반대세력과 싸울 힘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다. 김육은 대동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인생의 사직서라고 할 수 있는 유언에서조차 이렇게 말한다. ‘호남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일과 관해서 신이 이미 서필원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신이 죽고 나면 이를 도와주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 폐지되고 말까 염려됩니다. 부디 전하께서 격려해주셔서 신이 뜻한 대로 일을 마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옵소서.’(효종9.9.5).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