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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몇 번으로 머신러닝의 위력 발휘지난 8월 10일 솔리드웨어의 엄수원(29) 대표를 만났다. 그는 2년 전까지 세계 최대 보험사 악사(AXA)의 한국 지사인 악사손해보험 전략기획실에서 일했다. 그러다 금융 현장의 한계에 눈을 떴다고 한다. 엄 대표는 “대다수 금융사엔 이미 고객 관련 데이터가 차고 넘칠 만큼 방대하게 쌓여있는데도 실제 업무에 활용하는 데이터는 전체의 10%도 안 된다는 게 놀랍고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극히 일부 데이터만 활용하는 통계기법으로 만든 기존 신용평가모델은 고객의 신용도를 정확히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날 금융 심사에서도 머신러닝을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며 “이때부터 인공지능 전문가인 남편과 의견을 나눈 게 창업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현재 솔리드웨어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엄 대표의 남편 올리비에 듀센은 프랑스 국립정보과학자동화연구소(INRIA) 출신의 컴퓨터공학자다. 머신러닝을 연구하는 실리콘밸리 NEC연구소와 프랑스 로봇회사 알데바란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아내의 나라로 오면서 인텔코리아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매일 신혼집 서재에서 노트북을 나란히 펼쳤다.엄 대표는 “알고리즘을 적용하면 고객의 손해율(손해보험사)이나 부도율(대출은행) 등 금융회사의 수익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를 더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며 “시제품 솔루션으로 우리 기술의 효과를 검증한 후 직원을 뽑았다”고 말했다. 전략적 제휴를 맺은 악사손해보험과 함께 솔리드 웨어의 솔루션으로 신용평가모델을 다시 만들고 손해율을 뽑아보니, 연간 수십 억원 이상의 추가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팩스로 주고받는 통장거래 내역이나 콜센터 상담내역 등까지 머신러닝에 적용할 수 있게 처리해 금융사 안에 잠자고 있는 빅데이터를 깨운 게 주요 비결”이라고 말했다. 가령, 팩스용 문서 자료를 컴퓨터가 인식해 분석 자료로 변환하는 식이다. 이렇게 날 것 상태의 데이터를 머신러닝용으로 자동 변환하고, 다양한 알고리즘을 조합해 최적의 예측 모델을 만드는 과정이 클릭 몇번으로 이뤄진다. 분석 결과는 알아보기 쉽게 그래프로 시각화할 수 있다. 여러 알고리즘의 분석 결과를 비교할 수도 있다.엄 대표는 “사람이 일일이 하자니 품이 많이 들어 안 하는 게 나은 일을 컴퓨터가 대신 처리해주니 사람은 더 가치있는 일에 시간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신용평가모델을 하나 만드는 데 3개월 걸렸다면, 머신러닝 솔루션을 활용하면 3일 안에 끝낼 수 있는 식이다. 게다가 고객의 부도율을 예측하는 능력(예측력)도 올라간다. 특히 솔리드웨어는 금융 머신러닝 솔루션의 가치를 ‘기술의 확산’에서 찾았다. 누구나 클 릭 몇번으로 머신 러닝 기술의 가치를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엄 대표는 “머신 러닝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쉽게 그 가치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솔루션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애플 매킨토시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셀을 솔리드웨어 솔루션에 비유했다. 그는 “1980년대 애플 매킨토시가 나오면서 누구나 컴퓨터 화면 속 그래픽만 클릭하면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며 “애플 매킨토시가 PC의 가치를 끌어올렸고, 엑셀이 누구나 쉽게 대용량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게 해줬듯 우리가 머신러닝을 확산시키고 싶다”고 말했다.전 직원 15명 규모의 작은 스타트업의 빠른 성장 뒤에는 부부 공동창업자의 실력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기술인력이 있다. 삼성전자·파스퇴르연구소 등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인력들이 포진해 있다. 처음부터 몸값 높은 이들을 쉽게 끌어모은 것은 아니었다. 엄 대표는 “이력서에 머신러닝이 써 있기만 해도 몸값이 확 오르는 게 최근 몇 년 새 분위기”라며 “스타트업이다 보니 연봉으로 인재 유치 경쟁을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솔리드웨어의 채용 경쟁력은 다른 데 있었다. 이 분야 학계에서 우수 논문으로 유명했던 올리비에 듀센을 보고 국내외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모여든 것이다. 국적도 스웨덴·러시아·독일·프랑스·한국 등 다양하다. 듀센 대표는 “한국 기업들의 ‘보고 문화’ 같은 데 익숙하지 않아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젠 많이 적응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엔 국내 최대 규모의 핀테크 스타트업 그룹인 옐로금융그룹(YFG) 자회사로 들어갔다. 엄 대표는 “기술 개발과 경영에 집중하려면 우리를 지원해줄 수 있는 경험 많은 파트너가 필요했다”며 “경영권을 보장 받았고, YFG 소속 기업들과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어 빠른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엄 대표는 서울과학고와 서울대 화학·경영학, 프랑스고등경영대학원(HEC) MBA를 졸업한 재원이다. 졸업후 금융 전문 글로벌 컨설팅 업체 올리버 와이만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보험사로 옮겼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 ‘잘나간다’는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대학원이 아닌 기업을 택했고 다시 창업을 했다”며 “출산 예정일을 나흘 앞둔 날 고객사 대표 앞에서 중요한 발표를 한 적도 있지만 내가 원한 일이라 즐거웠다”고 말했다.
다국적 인재들이 부부 창업가 뒷받침솔리드웨어는 금융권에서 얻은 신뢰와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을 위한 인공지능 솔루션 전문 업체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공개한 기업용 인공지능 솔루션 브랜드 ‘다빈치랩스(Data Analysis, Visualization, and Creation of Insight)’는 기업용 빅데이터 분석의 모든 단계에 인공지능을 적용한 상품이다. 엄 대표는 “당분간 금융권과의 작업에 집중하지만 다른 분야로도 확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 진출도 준비중이다. 국내 금융사의 머신러닝 시스템을 구축하며 진화된 다빈치랩스는 일본·프랑스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악사 글로벌 그룹은 적극적이다. 악사가 최근 전 세계 4개국에서 개최한 머신러닝 기반 심사(언더라이팅) 모형의 성과를 비교해 보니 솔리드웨어만 기존보다 향상된 모형으로 입증돼 우승을 차지했다. 악사 측은 한국 지사에 먼저 도입한 후 성과에 따라 글로벌 그룹 차원에서 도입할지 결정할 계획이다. 또 지난 5월엔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박람회 ‘ICT 스피링’에서 아시아 기업 최초로 핀테크 분야 대표로 본선에 진출하며 해외 시장의 관심도 확인했다. 엄 대표는 “좋은 머신러닝 솔루션은 데이터를 구워 더 나은 빵을 만드는 오븐”이라며 “머신러닝이나 인공 지능 기술이 일부 전문가들의 전유물에 그치지 않게, 좋은 오븐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기계학습): 컴퓨터에 방대한 학습자료(데이터)를 주고, 인간처럼 학습을 통해 상황을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게 하는 시스템. 머신러닝 전문가들은 컴퓨터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알고리즘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