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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세운 손병옥·한경희] ‘이사회 멤버’ 목표 세우는 여성 늘길 

수전 스타웃버그 세계여성이사협회장 “생애 주기에 따른 전략 세워야”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기업 이사회에서 여성의 입지를 넓히는 데 일조하고 있는 수전 스타웃버그 세계여성이사협회장(왼쪽), 손병옥 한국푸르덴셜생명 회장(가운데), 한경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 / 사진:오상민 기자
손병옥 한국푸르덴셜생명 회장은 개척 여성이다. 1970년대 국내 외국계 은행 지사에 입사하며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국내 최초의 여성 금융사 사장(2011년)과 회장(지난해)이란 기록을 세웠다. 손 회장은 스스로를 ‘1세대’라고 불렀다. 앞서 올라가며 길을 터준 롤모델 여성 선배가 없었단 얘기다. 한경희생활과학의 한경희 대표도 스스로를 ‘1세대 창업 여성’으로 칭했다. 2000년 한영전기를 세울 때만 해도, 대기업 오너 가문이 아니고선 여성 창업자가 흔치 않았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 소비자들을 공략하는 가전 제품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입지를 키워왔다.

두 1세대 여성 리더가 의기투합했다. 한국의 기업 이사회에서 여성의 입지를 넓히는 것을 목표로 사단법인을 세웠다. 9월 1일 창립 총회를 연 세계여성이사협회(WCD, Women Corporate Directors)의 한국지부다. 기업체 임원으로 활약하는 여성도 몇 안 되는 지금, 왜 이사회까지 노리는 걸까. 이사회는 기업의 최종의사결정 기관이다. 회사 임원 중 극소수(등기이사)와 회사 외부의 전문가(사외이사)로 구성된다. 회사의 주요 사업 방향과 대표이사 선정, 주식 발행 등 굵직굵직한 사안을 결정하는 회사의 실질적 지배자다. 국내에 이런 요직에 앉은 여성은 몇 명이나 될까. “코스피 상장기업 713곳의 등기임원 4529명 중 여성은 단 94명입니다.” 한경희 대표는 “그나마 대기업 오너 가문의 여성을 빼면 자력으로 등기임원 직에 오른 여성은 50명도 남짓일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얘기를 듣기 위해 8월 31일, 서울 서초동 한국푸르덴셜생명 본사에서 이들을 만났다. 한국지부 창립을 맞아 방한한 수전 스타웃버그 WCD 회장과 함께였다.

어떻게 한국 지부 창립을 결심하게 됐나요.

손병옥: 저는 WIN(Women In Innovation, 혁신 여성들)이라는 여성 임원들의 모임도 이끌고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있는 여성 임원들을 만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들이 더 자라서 기업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이사회 멤버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다른 회사 고위직 남성을 만나면 이런 얘기를 해요. 이사회에 여성을 뽑으려고 해도 쓸만한 사람이 없다고요. 이사회 활동에 준비된 여성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경희: 지부 창립을 준비하면서 여성에 대한 벽이 얼마나 높은지 느꼈어요. 사석에서 “공기업만이라도 사외이사에 여성을 30% 이상 뽑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꺼냈는데, 지도층 남성의 표정이 굉장히 굳어지더군요. 저희는 이사회에서 활동할 만한 여성 인재들의 데이터베이스(DB)를 만들고 이들을 요직에 추천하려고 합니다.

스타웃버그: 한국은 세계의 리더입니다. 여성들의 활약을 이에 걸맞게 늘리려면 초반엔 의도적으로 우대 정책을 펴야 합니다. 프랑스를 예로 들어볼까요. 국회가 이사회 여성 할당제를 도입하려는 논의를 시작하니까, 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기업의 여성 이사 수가 두 배로 늘었어요. 법이 도입되기 전에 먼저 좋은 인재를 확보하려고 앞다퉈 여성들을 뽑은 거에요. 정책의 변화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성 직장인들 중엔 이사회 멤버는커녕, 임원이나 부장직도 멀게 느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들은 늘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구요.

손병옥: 그런 생각을 좀 버렸으면 좋겠어요. 여성 후배들은 아이가 태어나거나 입학하는 식으로 큰 일이 생길 때마다 ‘회사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런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남성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잖아요. ‘나는 평생 일을 할 거야. 아이가 생겼으니 방법을 찾아야지’라고 생각해야죠. 한국 지부를 세운 이유 중 하나가 젊은 여성들이 더 큰 꿈을 가졌으면 해서입니다. 지금은 과장·부장 달기도 어려운데 이사회 멤버를 목표로 노력하는 여성이 얼마나 있나요. 우리 활동이 알려지면서 ‘나도 이사회 멤버가 돼야겠다’고 마음 먹는 여성들이 늘길 바래요.

스타웃버그: 많이 힘들겠지만 육아와 직장 생활은 분명히 둘 다 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동시에 잘하려고 하면 어려워요. 전 워킹맘들에게 ‘생애 주기에 따른 전략’을 세우라고 말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아이가 어릴 땐 가정에 좀 더 힘을 쏟아야겠죠. 이럴 땐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찾기보다 돈은 적게 벌더라도 능력을 쌓을 수 있는 일을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좀 자라서 엄마의 손을 덜 필요로 하게 되면 그때 쌓은 능력을 활용하는 일을 찾아볼 수 있겠죠. 그리고 멘토뿐 아니라 스폰서(sponsor·후원자)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도 해주고 싶어요. 멘토는 당신의 능력을 키워주는 사람이지만, 스폰서는 당신의 능력을 눈여겨봤다가 좋은 자리가 나면 그 자리에 앉혀줄 사람입니다. 멘토가 바로 위에서 같이 일하는 상사라면 스폰서는 보통 훨씬 고위직에 있는 상사지요. 이들과 어떻게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도움을 주고 받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국내 기업의 요직에 여성 비중이 적은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스타웃버그: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기도 하고 시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WCD는 2년에 한 번씩 세계 이사회의 남녀 이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해요. 지난해 조사 결과가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4000명의 이사들이 설문에 참여했죠. ‘왜 여성 이사가 많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55세 이상의 남성 이사들은 “준비된 여성이 없어서”라고 답했어요. 이와달리 55세 미만의 남성 이사들은 “여성들이 자질은 우수하지만 이사회 네트워크에서 소외돼 있어서”라고 답변했어요. 젊은 남성들은 학교와 일터에서 우수한 여성들을 늘 만나왔기 때문에 여성의 능력에 대해 훨씬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거죠.

한경희: 실제로 여성들이 회사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정말 많아요. 예를 들면 포춘200 리스트의 기업에선 이사회 여성 비율이 40%가 넘습니다. 또 기업의 여성이사 비율이 30% 이상인 경우가 실적이 더 좋다는 통계도 있고요. 기업이 여성 친화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걸 비용이라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위한 큰 투자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경제 발전 속도에 비해 여성의 위상이 더디게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WCD 한국지부가 어떤 역할을 할 걸로 기대하나.

손병옥: 우선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여성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이사회 멤버로 활동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이 연락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창립을 1년 동안 준비했는데, 1년 동안 수소문해서 이사회 멤버인 여성을 40명 정도 모았어요. 더 많은 분이 참여해서 서로 돕고 정보를 나눴으면 합니다.

한경희: 그동안 한국 사회에 이사회라는 제도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능력있는 여성들도 제도를 잘 모르니 활약할 생각도 하지 못 했고요. 저는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조직이 기업을 성장시킨다고 믿습니다. 기업이 잘되면 국가 경제도 잘되는 거죠. 결국 이 활동이 우리나라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웃버그: 한국이 그동안 일군 놀라운 발전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의 요직에 여성을 30% 이상 의무적으로 할당하는 등의 정책을 도입하면 더 먼 길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351호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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