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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와 김유신, 서로 필요했던 존재이처럼 김춘추와 김유신은 굳건한 연대를 보여주었다. 매제와 처남으로서, 동지로서, 그리고 주군과 신하로서 평생 같은 길을 걸었다. 김유신은 진덕여왕 사후, 신라 귀족의 수장인 알천과 담판을 벌여 김춘추를 왕으로 옹립했고(654년), 김춘추의 칼이자 방패가 되어 삼국 통일전쟁의 최전선을 누볐다. 이러한 그의 충성은 조카인 문무왕(재위 661~680)에게까지 이어졌는데, 673년 7월 1일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김유신은 신라의 수석 재상이자 총사령관으로서 임금과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그가 죽기 전 문무왕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역사 속의 임금들을 보면 처음에는 누구나 잘하지만 끝까지 한결같은 이가 드물었습니다. 하여 여러 대에 걸쳐 쌓아 온 빛나는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곤 했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는 일 또한 어렵다는 것을 유념하시옵소서. 소인배를 멀리하시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며 위로는 조정을 화목하게 하시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을 편안케 하시옵소서. 나라의 기반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나이다.”실로 임금과 신하가 보여줄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믿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냉혹한 권력의 세계는 끊임없이 이들의 사이를 시험하게 된다. 권력 앞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처럼, 이해타산에 따라 사적인 감정쯤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김춘추와 김유신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호감과 신뢰를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거기에 더해진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최고의 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김춘추와 김유신은 서로 필요를 채워주었다. 김춘추는 할아버지(진지왕)와 외할아버지(진평왕)가 모두 임금으로서 진골 중에서도 빼어난 출신 성분이었다. 다만, 할아버지가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위 경쟁에 나서는데 핸디캡이 있었다. 따라서 김춘추는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김유신의 경우는 신라에 의해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으로서 비록 진골 신분을 받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웃사이더였다.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불이익을 받았던 김유신으로서는 자신의 배경이 되어 줄 권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성골 출신의 진골로서 왕위 계승의 가능성이 있었던 김춘추,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며 신라 군부의 중심이었던 김유신은 바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파트너였다.
절대적 충성과 파격적 대우이에 두 사람은 혼인을 매개로 결속을 다진다.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가 김춘추의 아내가 되었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뒤인 655년에는 임금의 딸인 지소가 김유신에게 시집을 갔다. (처남·매제가 사위·장인이 되고, 조카가 아내가 되는 이상한 관계지만 근친혼이 일상적이었던 당시로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중으로 사돈을 맺고 한 가족이 됨으로써 유대를 강화했을 뿐 아니라 배신을 예방하는 효과도 거두었을 것이다.그런데 아무리 뜻을 같이하고 이해가 일치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신분의 차이가 생겨나게 되면 그 관계는 변할 수밖에 없다. 김춘추가 왕이 되면서, 매제·처남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의 사이는 주군과 신하로 달라졌다. 이전과는 다른 예의와 응대 방식이 요구된 것이다. 이것은 특히 김유신이 주의해야 할 부분이었는데, 즉위 과정의 일등공신인데다가 나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신하는 임금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라 귀족들은 가야계인 김유신을 여전히 의심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신으로서는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야 했던 것이다.그리하여 김유신은 나라와 임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보여준다. 전장에서의 백전불패로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무열왕(김춘추)과 문무왕을 대를 이어 충실히 보좌했다. 백제 멸망 후 백제의 땅을 나눠주겠다는 당나라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사심 없음을 보였다(660). 그는 항상 남들이 꺼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에 자원했는데, 일흔 가까운 나이에도 고구려의 영토 깊이 들어가 평양성까지 식량 수송을 책임지는 업무를 맡은 바 있다. 모든 신하들이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었던 일이었다(661). 이때 김유신은 “나라의 일이라면 비록 죽는다고 한들 피하지 않겠나이다”라며 출정했는데, 모범과 헌신, 대체 불가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위상뿐 아니라 정치적 안정까지 확보했다고 생각된다.이러한 김유신에게 김춘추를 비롯한 왕들도 최고의 예우를 다했다. 김유신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직에 오르는데(668년), 원래 신라의 최고 관위는 각간(角干)이지만 김유신의 공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그 앞에 대(大)와 태(太)를 붙여 권위와 존귀함을 부여해준 것이다. 심지어 김유신은 흥덕왕 때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된다. 신하로서 왕으로 높여진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이다.요컨대 보스와 참모의 관계에서 서로 필요를 채워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을 보스로 모시고 또 참모로 곁에 두는 것이다. 그런데 ‘필요한 사람’이라는 판단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변화되는 상황에 따라, 서로의 성장에 맞춰 끊임없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관계가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