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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9) | 태종과 황희] 아끼는 참모는 함부로 버리지 않는 법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태종, 불충했던 황희를 세종의 참모로 중용 … 능력 있다면 정적이라도 참모로 쓸 줄 알아야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황희 초상화.
황희(黃喜,1363~1452) 정승하면 연관 검색어처럼 떠오르는 세종대왕이 아니라 태종(1367~1422)이라고? 제목을 보고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황희가 19년간이나 영의정으로 장기 재임하며 세종의 시대를 떠받친 명재상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태종을 보좌한 시간 역시 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황희는 태종과 비슷한 연배로 고려가 멸망한 후 은둔했다가 1394년(태조3) 태조의 요청에 의해 조선왕조에 출사하며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임금의 뜻에 거슬리는 말”을 자주 해 파면된 적이 많았지만 각 부처를 두루 거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기복출사(起復出仕, 임금의 특명에 의해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치지 않고 조정에 나오는 것으로 조선을 통틀어 드문 편이다)’하라는 어명을 받기까지 했다.

총애 받던 황희, 폐세자 반대하며 삭탈관직

황희가 태종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은 전임자인 박석명의 추천으로 지신사(知申事,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격)에 임명되면서부터다. 황희는 일솜씨가 빈틈이 없었을 뿐 아니라, 태종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숙청하는 일 등 여러 기밀사무를 매끄럽게 처리함으로써 인정을 받았다. 이처럼 임금의 신임이 쌓여가자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황희는 아첨하고 간사한 자라며 탄핵하곤 했지만 태종은 “경은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 대우한다. 하루 이틀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반드시 불러 보며 하루라도 나의 곁을 떠나 있지 못하게 했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변함없는 신뢰를 보였다. 황희가 병석에 누웠을 때는 어의를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고 하루에 세네 번이나 병세를 물었다고 한다.

황희는 지신사를 지낸 이후에도 대사헌을 거쳐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핵심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육조판서를 모두 역임했다는 것은 태종이 그를 재상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태종의 재위 마지막 해에 이르러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세자(양녕대군)의 폐위 문제를 둘러싸고 황희가 이를 강력히 반대하면서 태종의 진노를 산 것이다.

당시 세자는 임금이 되기 위한 학문과 수양공부를 소홀히 했고 기생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었으며 신하의 첩과 통정하는 등 태종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세자로서는 도저히 수성(守城)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 대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긴 태종은 마침내 세자를 폐위하고자 했는데, 황희는 세자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라며 변호하고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는 적장자 승계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이 넌지시 경고했지만 황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세자의 외숙(민무구, 민무질)의 숙청을 주도한 황희가 장차 자신에게 닥칠 화를 모면하기 위해 세자에게 아첨하는 것이라며 삭탈관직하고 그의 자손까지 영원히 등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얼핏 보면 태종에게 거역한 황희가 역린을 건드려 몰락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태종은 황희를 집안의 연고가 있는 남원에 거처하게 했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황희의 죄를 묻는 교서를 내릴 때도 황희의 조카가 전달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죄인을 다루듯 압송하지 않고 알아서 자유롭게 가도록 배려했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황희에게 ‘군부(君父)의 원수’라는 공격이 가해졌는데 황희가 세종의 세자 책봉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폐세자를 추종했을 뿐 아니라 세종이 보위를 승계하는 것을 방해했으니 새 왕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역적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대신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말하지 말라”(세종즉위.10.28)는 명을 내렸으며 황희에게 엄히 죄를 물으라는 사헌부와 의정부의 연이은 상소에도 (세종즉위.12.14) 오히려 황희의 죄는 가볍다며 처자를 보내 함께 편하게 살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세종1.5.9). 황희에 대한 태종의 마음은 여전했던 것이다. 더욱이 1422년(세종4) 2월 12일 황희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인 것도 다름 아닌 상왕 태종이었다. 태종은 세종으로 하여금 황희를 용서하고 중용하도록 했고, 세종 또한 “경은 아버님이 신임하셨으며 과인 또한 의지하고 신뢰한다”며 그에게 재상의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태종의 안배로 빛을 발한 명재상 황희

이상 태종과 황희의 일화에는 보스와 참모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도 곱씹어봐야 할 점들이 있다. 우선, 황희가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한 것은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지만 동시에 태종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세자를 폐위한다는 것은 아무리 대의명분이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처음 세자를 정해 책봉한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물며 모두가 한 목소리로 폐세자를 찬성하고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아무도 없다면 임금의 착오는 그만큼 더욱 부각되게 되는 것이다. 적장자 승계 원칙을 이유로 든 황희의 강경한 반대는 애초에 적장자 양녕대군을 세자로 봉한 태종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원칙이 중요한가, 임금의 자질이 중요한가의 문제에서 강조점이 다를 뿐이 된 것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태종이 황희를 대했던 방식이다. 황희에게 국가의 주요 업무를 두루 경험하게 하고, 세종으로 하여금 귀양을 갔던 그를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게 한 것은 황희가 자신의 대뿐만 아니라 다음 대까지도 공헌할 수 있는 신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직접 황희를 복귀시키지 않고 세종의 손을 빌린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원래 선왕의 신하는 다음 왕에게는 불편한 존재다. 아버지(혹은 할아버지)의 신하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경험과 연륜을 무기로 새 왕에게 이런저런 간섭과 잔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지난 회에서도 살펴봤지만 그래서 태종은 후계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공신들을 제거하거나 억눌러버렸던 것이고, 후계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신하들은 한직으로 돌리거나 귀양을 보내는 등 일정한 시련을 겪게 하곤 했다. 그리고는 세종에게 이들을 요직에 등용하는 은혜를 베풀게 함으로써 이들이 세종에게 충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특히나 황희는 세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세종에게 불충한 신하, 정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임금의 원수’라고까지 불리기도 했다. 이런 신하를 벌주고 재기불능으로 만들기는커녕 재상으로 등용해 정무를 맡김으로써 황희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는 헌신을 이끌어낸 것이라고 본다. 능력만 있다면 그런 신하까지 등용해 중임하는 세종의 포용력을 과시하는 효과도 가져오고 말이다.

요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명재상 황희 정승의 탄생에는 태종의 안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아끼는 신하가 비록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는 않았지만 그를 버리지 않고 다음 대에까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후계 승계를 앞두고 있는 보스들이 참고할 부분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86호 (201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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