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고용 지출 2021년까지 해마다 9.8% 늘려...
“복지에만 돈 쏟으면 다음 세대 부담”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8월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018년 예산안 및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브리핑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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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큰 정부’를 표방한다. 7월 국가재정 전략회의에서 “작은 정부가 좋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전 정부가 재정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아 저성장·양극화를 방치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문재인 정부 첫 예산안의 실체가 드러났다. 큰 정부 기조를 반영한 ‘수퍼 예산’이다. 8월 29일 국무회의에서 확정한 2018년도 예산 총지출액은 429조원이다. 올해 본예산(400조5000억원)보다 7.1% 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경기가 고꾸라졌던 2008년에 짠 2009년도 예산(10.7%) 이후 9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내년 경상성장률 전망치(4.5%)보다도 2.6%포인트나 높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양극화 심화와 같은 구조적 문제로 서민의 삶은 나아지지 못하고 있다”며 “재정의 적극적·선도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정의 적극적·선도적 역할 필요하다나랏돈은 복지 분야에 주로 쓰인다. 정부는 내년도 보건·복지·노동 분야에 146조2000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전체 예산의 34.1%를 차지한다. 전년 대비 증가율도 12.9%로 가장 높다. 보건·복지·노동 예산 중 일자리 창출에는 19조2000억원이 사용된다. 전년 대비 12.4% 늘었다. 이와 달리 내년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17조7000억원으로 올해 대비 20% 줄었다.정부가 이날 함께 발표한 ‘2017~2021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2021년까지 연평균 재정 지출 증가율은 5.8%다. 2021년에는 재정 지출 규모가 500조9000억원으로 500조원을 돌파한다. 불과 1년 새 씀씀이가 대폭 커졌다. 지난해 기재부가 내놓았던 ‘2016~202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20년 지출 규모는 443조원이었는데 올해 계획에선 476조7000억원으로 불어났다. 특히 보건·복지·고용 지출은 2021년까지 해마다 9.8% 늘어난다. 지난해 재정운용계획에서 이 분야 연평균 지출 증가율은 4.6%였다.한정된 재원 속에서 복지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2021년 보건·복지·고용 예산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7.6%에 이른다. 이 비중은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복지 재원의 특성상 한번 돈을 집어넣으면 이를 돌이키기 어려워서다. 최종찬(전 건설교통부 장관)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은 “무작정 복지에 돈을 쏟아부으면 재정 사정만 악화시켜 다음 세대에 부담을 안길 수 있다”고 말했다. 성장을 위한 투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은 올해 대비 0.9% 늘어나는 데 그쳤다. 산업·중소기업·에너지 예산은 올해보다 되레 0.7% 줄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창출하고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정부가 일정 부분 혁신의 길을 터 줘야 하는데 이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SOC 예산 감축 속도가 가파르다는 의견도 있다. 이인실(전 통계청장)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의 성장률이 건설 투자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점을 감안할 때 SOC 예산 감축 폭이 과해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기획재정부는 재정 지출을 크게 늘리는 동시에 재정 건전성도 훼손시키지 않겠다는 복안이다. 내년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 임기 말기인 2021년까지 이런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했다. 기재부가 밝힌 내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39.6%로 올해 예상치 39.7%보다 오히려 낮다. 2021년 예상치도 40.4%에 불과하다. 내년에 7.1%, 2021년까지 연평균 5.8%씩 지출을 늘리겠다는 계획에 비춰 보면 선뜻 믿기지 않는 비율이다. 정부는 순(純) 재정 상황을 나타내는 관리재정수지도 올해(-1.7%)보다 내년(-1.6%)에 오히려 더 좋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요약하면 나랏돈을 많이 쓸 계획이지만 빚을 많이 내지 않겠다는 얘기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정부가 믿는 구석은 세수 등 정부 수입 증가다. 당장 내년 수입 증가율은 7.8%로 지출 증가율(7.1%)보다 높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양입제출(量入制出)이라는 4자 성어로 설명했다. 수입을 헤아려 보고 지출을 계획한다는 뜻이다. 수입이 많이 늘어나는 만큼 지출을 많이 늘려도 된다는 얘기다.이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경기라는 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무쌍한 존재라서다. 올해는 경기 회복세 덕택에 4.6%의 경상성장률 달성이 예상되지만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간신히 4%에 턱걸이하는 수준이었다. 2012년에는 3.4%까지 추락했다. 경상성장률이 4%를 초과하지 못했던 2012~2014년은 한 해도 예외없이 ‘세수 펑크’가 발생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 잠재성장률이 2.8% 정도에 불과해 4%의 경상성장률을 달성하는 것도 쉽지 않다”며 “세입 측면에서 정부가 너무 희망적인 전제 조건을 달고 있다”고 말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상성장률 이상의 지출을 한다는 건 대놓고 적자를 쌓겠다는 것이며 이는 미래 세대로 짐을 떠넘기는 것”이라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 세대를 상대로 정부가 ‘도덕적 해이’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기대만큼 세수 늘어날지 미지수지출 구조조정도 기재부가 강조하는 재원 마련 방안 중 하나다. 실제 내년 예산안에서 11조5000억원의 지출을 절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방안도 한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SOC 예산 20% 감축 등의 ‘극약처방’을 내년 이후에도 계속할 순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복지 지출이 늘면 늘수록 지출 구조조정은 더욱 어려워진다. 손댈 수 있는 예산 자체가 줄어들어서다. 상당수 전문가는 재정 확대와 건전성 유지를 동시에 달성하려면 획기적인 성장률 제고 방안이나 추가 증세가 단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성장률 제고를 위해서는 기업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규제프리존 등을 확대해 기업이 부담 없이 마음껏 실험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정 지출도 줄이지 않고 증세도 하지 않으려면 결국 지난 정부처럼 ‘증세 없는 복지’라는 이름 하에 ‘증세 아닌 증세’를 할 수밖에 없다. 초고소득자 증세만으로는 부족한 만큼 합리적인 추가 증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