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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33) 숙종과 김석주] 촉망받던 인재가 사악한 모사꾼으로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출신 성분 탁월하고 문무에 능했던 김석주, 숙종의 정치공작 희생양으로 전락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사진:ⓒgetty images bank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문장은 절대 쉽게 배울 수가 없다. 필력이 막힘이 없어 하늘을 나는 기상이 있고, 격조가 건실하며 짜임새는 단단하다.” “근래에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식암을 으뜸가는 거장으로 꼽는다.”[홍재전서].

뛰어난 글솜씨로 이렇게 정조 임금의 극찬을 받은 김석주는 요즘 말로 ‘금수저’이자 ‘엄친아’였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국방과 외교, 경제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탁월한 식견을 자랑했으며, 예학에도 밝았다. 왕을 진찰할 정도로 의학(醫學)에도 조예가 깊었다(숙종 9년 10월 27일). 풍채 또한 위풍당당해 중국 사신이 놀랄 정도였다.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겸임했던 보기 드문 케이스로, 그야말로 문무를 겸전(兼全)했다고 할 수 있다. 가문도 화려했는데, 효종대의 명재상 김육이 그의 할아버지고, 조야의 존경을 두루 받았던 대신 김좌명이 그의 아버지다. 뿐만 아니라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가 사촌누이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출신 성분과 능력을 함께 갖춘 인재였던 것이다.

병조판서와 대제학 겸하기도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원래 ‘척신(戚臣)’, 즉 왕실의 외척인 신하는 견제를 많이 받는다. 그중에서도 ‘똑똑하고 능력 있는 척신’은 요주의 대상이다. 언제 왕을 등에 업고 전횡을 휘두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김석주가 주목을 받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신하가 많았던 것은 그래서였다. 그도 계속 견제와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김석주의 정치적 여건은 왕들이 그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한다. 현종은 그를 측근에 두고 총애했으며 숙종은 병권을 일임하다시피 했다. 오랜 기간 병조판서를 맡겼을 뿐 아니라 우의정이 되어서도 호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숙종 8월 7일). 남인정권이 군사를 총지휘하는 체찰부(體察府)를 만들었을 때에도, 숙종은 그를 부체찰사에 임명해 실권을 갖게 했다. 국왕과 왕실을 지키고 신하들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이처럼 김석주에게 권력이 모아지자 제 세력들은 어떻게든 그를 자기편으로 포섭하려 했다. 숙종 초기에 집권한 남인은 서인인 김석주를 깍듯이 예우했으며, 그의 말이라면 대부분 따라주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김수항도 그와 손을 잡고자 나섰다(송시열은 김석주 가문과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인의 재집권을 위해서는 그의 힘과 영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1680년(숙종 6년),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났는데, 김석주가 연출을 맡는다. 남인의 무능과 부패, 권력을 강화하려는 욕심(체찰부를 설치해 군권을 차지하려는 시도가 숙종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해석이 있다)에 염증을 느낀 숙종이 환국(換局)을 결심하자, 그가 책략과 정보전 등을 통해 임금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바꾼 것이다. 김석주는 정원로를 시켜 허견과 삼복(三福, 숙종의 당숙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합쳐 말함)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하게 했다. 사실 이 사건은 허견과 복선군의 철부지 같은 말장난에 불과했지만, 김석주가 이를 확대해 남인 대신을 연루시켜 숙종이 환국을 단행할 명분을 제공해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쳤다면 모르겠지만, 김석주는 무리수를 둔다.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경우 자신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남인을 재기불능으로 만들고자 정치공작을 벌였다. 이른바 ‘임술삼고변’이 그것이다. 1682년(숙종 8년), 임술년(壬戌年)에 벌어진 세 건의 반역 고발 사건이라는 뜻의 ‘임술삼고변’은 ①김환이 남인인 허새와 허영의 역모를 고변한 것 ②김익훈이 유명견의 반역을 고변한 것 ③김중하가 민암의 모반을 고변한 것을 가리킨다. 모두 남인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으로, 김석주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김석주는 어영대장 김익훈(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작은 할아버지)과 함께 ‘정탐’과 ‘기찰’을 통해 사전에 사건을 인지하고 이를 적발했다고 하는데, 이 중 ②번과 ③번은 무고로 밝혀졌다. ①번도 함정 수사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이 컸다. 남인을 숙청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벌인 것이다.

이러한 김석주의 행동은 같은 서인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젊은 대간들이 그와 김익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재상이었던 민정중도 “김석주 등이 화를 즐기고 공을 탐하여 크게 확장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중략)…김익훈 등 패려하고 악독한 무리들로 하여금 기찰과 염탐을 일삼도록 하여 무고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다스리면서 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라며 직격탄을 날렸다(숙종 9년 1월 22일). “은밀한 길과 밀고하는 문을 만들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이미 익숙해졌고, 수단이 더욱 교활해져 은연중에 한 편을 제거하려는 뜻이 있었다”는 평가도 받는다(숙종 10년 9월 20일).

그리고 그가 죽은 지 5년 후인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의 관작은 박탈되었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그의 아들 김도연은 음독 자결하였으며(숙종 15년 윤3월 11일) 아내도 귀양을 가는 등(숙종 17년 12월 3일)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남인이 혹독한 정치 보복을 자행한 것이지만,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김석주 자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의 암묵적 동의와 지시

그런데 촉망받던 젊은 인재가 ‘권모술수를 숭상하는’ 노회한 정객으로 변모한 것이, 과연 그 혼자만의 책임일까? 아름다운 문장을 써내려갔던 손으로 거침없이 공작정치를 자행하게 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서였을까? 궁극적인 책임이야 물론 김석주 본인이 져야 하겠지만, 그를 그런 길로 인도한 것은 다름 아닌 보스 숙종이었다. 왕실을 수호하고 왕권을 뒷받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 신권을 견제하라는 것, 이는 숙종의 요구였다. 왕이 원하는 정국을 만들기 위해 은밀하고 비정상적인 시도를 해도 괜찮다는 것, 이것도 숙종의 동의를 받은 일이었다. 김석주의 정탐과 공작에 대해 숙종이 질책한 적이 없으며, 김석주의 부족한 해명에도 ‘사건의 진상이 명확해졌다’며 마무리 짓는 숙종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술삼고변’조차 시작은 남인의 동정을 살피라는 숙종의 지시였다.(임술삼고변으로 김석주에 대한 숙종의 신임이 약해졌다는 견해가 있지만, 그가 죽기 직전에도 특명에 의해 병조판서를 겸임하게 한 것으로 볼 때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숙종 10년 9월 3일).

요컨대 우리가 아는 ‘김석주’는 ‘숙종’이 만든 것이다. 흔히 임금은 목수에 비유된다. 목수가 재목(材木)의 특성에 따라 알맞은 쓰임을 찾듯이, 임금도 인재의 자질에 따라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숙종은 김석주의 알맞은 위치를 찾아준 것일까? 김석주를 다르게 활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보스는 언제나 참모의 최적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답이 없는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진다.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 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14호 (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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