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시열 둘러싼 찬사와 비난 극단적으로 엇갈려예송논쟁 당시 송시열은 효종을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규정했다. 효종이 왕위를 계승(體)했지만 적장자가 아니므로 바르지 못한 경우(不正)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입는 상복의 등급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학에 대한 학문적 견해에 따른 것이었지만, 효종의 정통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남인들은 이 점을 지적하며 “송시열은 적자니 서자니 하며 효묘(孝廟, 효종)를 등극하지 않았어야 마땅할 임금으로 만들었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비판했다(숙종 5년 5월 13일). 자칫 송시열이 임금을 부정한 대역 죄인이 될 판이었다. 따라서 송시열은 어떻게든 해명해야 했을 것이다. 자신은 결코 효종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효종이 중대한 사업을 부탁한 충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악대설화’를 기술하고 이를 공개한 것은 그래서였다고 판단된다.송시열의 기록에 따르면 이 날 두 사람은 ‘북벌(北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효종은 “하늘이 나에게 10년의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성패(成敗)와 상관없이 거사하고자 하니,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오”라고 하며 북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고, 자신에게 실무 책임을 맡겼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하늘이 주상을 더 사시게 하여 그 대업을 마칠 수 있게 하였다면 이 기록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미 일이 끝나고 말았으니, 만약 그 당시 하셨던 말씀까지도 끝내 매몰되게 한다면 나의 죄는 또한 어떠하겠는가. 누설하지 말라고 되풀이하며 당부하신 그 날의 경계를 저버리는 일이기는 하나, 이 죄는 도리어 작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효종이 북벌이라는 숭고한 대의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덮는 것이야말로 더 큰 죄가 되겠기에, 이때의 일을 밝힌다는 것이다.송시열이 남긴 유언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제자인 권상하에게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위주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묘(孝廟)께서 하고자 하신 뜻을 위주로 삼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효종의 친필편지를 손자에게 맡겨 임금에게 올리라고도 했다(숙종 15년 6월 3일 [우암연보]). 자신은 효종의 뜻을 늘 가슴에 새기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해왔으며, 효종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그런데 송시열이 정말 효종과 그런 관계였을까? 송시열은 효종이 세자였던 시절 잠시 사부를 맡으면서 효종과 인연을 맺었다. 효종은 즉위 후에도 그를 깍듯이 예우하며 곁에 두고자 했는데, 재위 기간 내내 끊임없이 관직을 내리며 궁궐로 부르고, 출사(出仕)를 종용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효종의 초빙을 거절한다. 가끔 수양에 힘쓰라, 학문을 닦아 선정(善政)을 펴라(효종 1년 8월 4일), 왕도정치를 위해 노력하라(효종 2년 5월 26일)와 같은 상소를 올리긴 했지만, 효종을 도와주지도, 효종의 부름에 응하지도 않았다. 효종이 신하로서의 분의(分義, 분수에 따라 지켜야 할 도리)를 거론하며 관직에 나오라고 명령하자, 임금이 분의를 내세워 신하를 압박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효종 5년 4월 18일). 이러한 송시열의 태도에 효종은 “나의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개탄스러울 뿐이다”라며 한탄할 정도였다(효종 5년 10월 7일). 요컨대, 송시열은 효종이 예우한 신하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송시열 자신이 효종을 위해 헌신한 신하라고는 보기 힘든 것이다.
예송논쟁에서 효종의 정통성 문제 삼아더욱이 효종은 원손(元孫, 형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위를 이어받음으로써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을 계속 조정으로 부른 이유 중 하나도, 산림(山林)의 영수 송시열의 인정을 받아 왕권을 확립하고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이러한 임금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예송논쟁에서 효종의 정통성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볼 때, 효종의 정권에서 관직에 나서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아 했다는 의심마저 든다.그런데 이러던 송시열이 1658년(효종 9년)이 되면서 조정에 나선다. 그 전에도 잠깐 출사했던 적은 있었지만, 이 때 나와서는 효종이 승하할 때까지 2년 가까이 계속 조정에 복무했다.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 이전까지는 경연직(經筵職, 임금의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이 제수되었다면 이번에는 조정의 핵심 요직이 내려졌다. 송시열이 이조판서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양송(兩宋)’이라고 불렸던 송준길이 대사헌이 되는 등 조정의 핵심 포스트를 모두 산림이 차지했다(효종 9년 9월 18일). 자신에게 전권이 주어지다시피 한 것이다. 또한 효종은 ‘북벌(北伐)’을 기치로 내세움으로써 송시열의 존주대의(尊周大義) 노선, 즉 사악한 것(청나라)을 물리치고 치욕을 갚아, 명나라로 상징되었던 문명질서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국가 차원의 핵심 의제로 만들어주었다. 한마디로 송시열이 조정에 나오지 않을 수 없게끔 판을 깔아준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송시열이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나 헌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면서 불행의 씨앗이 자라게 된다. 설령 그것을 신념에 따른 진퇴(進退)라고 인정하더라도, 신하로서 임금의 은혜를 입었으면서 그것을 갚는 일에는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그 임금의 정통성을 뒤흔드는 발언까지 했으니, 본인의 정치적 생명이 위협받은 것은 결국 자신이 선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신하가 임금을 ‘필요’로 대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 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