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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스티븐슨 作 '보물섬'의 ‘조세피난처’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국가의 규정, 법, 규제 우회하도록 편의 제공해 사업 유치

▎OECD가 지목한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
얼마 전 한국 어선이 또 해적에 피랍됐다. 이번에는 악명 높던 소말리아 해적이 아닌 나이지리아 해적이다. 해적들은 참치어선인 마린 711호에 승선했던 한국인 선원 3명을 납치한 뒤 사라졌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문무대왕함이 출동했다. 해적은 약탈과 폭력, 방화를 일삼는 바다 위의 범죄집단이다. 과거 해적들은 상선을 털었지만 요즘 해적은 선원들의 몸값을 요구한다. ‘해적 비즈니스’라는 말까지 생겼다. 어선들이나 상선들에게 해적은 실존하는 위협이다.

문학이 기억하는 해적은 다르다. 해적이란 거친 바다와 싸우며 목숨 건 모험을 즐기는 바닷사나이다. 잔악하고 비열하지만 때론 유머러스하고 순정도 있다. 두려움의 상징인 해골깃발도 문학에서는 낭만의 아이콘이다. 해적을 친근하게 만든 원조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이다. 소설 [피터팬]의 후크선장,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애니메이션 [하록선장]에서 만나는 해적들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돈키호테]로 인해 삐쩍 마른 기사에 땅딸보 조수, 다리 짧은 당나귀가 기사의 전형이 됐다면 [보물섬]은 어깨에 앵무새가 앉아있는 외다리 해적선장을 해적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일본의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제작한 TV용 애니메이션 [보물섬]을 보고 자란 4050세대에게 이 소설은 특히 정겹다. 애니메이션 [보물선]은 국내에서 칼라로 방송된 첫 애니메이션이었다.

“조세피난처는 현대판 보물섬”

17XX년 어느 날 ‘벤보우제독’이라는 상호의 여관에 선장 빌리가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빌리는 외다리 선원이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술독에 빠져 산다. 겨울 바람이 유난히 매섭던 날 ‘블랙독’이라는 남자가 여관에 나타나더니 마침내 사단이 생긴다. 빌 선장은 블랙독과의 칼부림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이어 나타난 정체불명의 맹인으로부터 검은 쪽지를 받고는 돌연 사망한다. 알고 보니 빌 선장도, 그를 찾았던 남자들도 모두 해적들이다. 여관집 아들 짐 호킨스는 빌이 아끼던 궤짝 안에서 보물섬의 지도를 발견한다. 전설의 해적선장 플린트가 숨겨놓은 75만 파운드의 보물이 묻혀있는 곳이다. 짐은 이 지도를 지주 트릴로니와 의사 리브지 선생에게 건네고, 이들은 선박 ‘히스파니올라호’를 마련해 보물이 묻혀있는 해골섬으로 떠난다. 이 배의 주방장으로 존 실버가 탄다. 외다리로 목발을 짚고 걷는 그의 한쪽 어깨에는 언제나 앵무새 플린트선장이 있다.

영국 소설에서는 해적들이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보물섬]이 그렇고,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그렇다. 영국은 해적의 수혜를 본 나라다. 영국의 해적 존 호킨스와 플랜시스 드레이크는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장악하던 해상질서를 뒤흔들었다. 이들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비호 아래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을 약탈했다. 해상권 장악이 필요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들이 필요했다. 해적들은 주변국 상선에서 약탈한 장물을 영국에 반입시켰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한 해적들을 내칠 이유가 없었다. 화가 난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이끌고 1588년 영국을 침공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화공전으로 열흘 간의 전투에서 무적함대를 무찔렀다. 스페인을 굴복시킨 영국 해군은 이어 네덜란드를 제압하고 유럽의 뱃길을 장악한다.

보물섬에 거의 다가갔을 무렵, 짐은 우연히 사과통 안에 있다가 실버의 반란모의를 엿듣는다. 히스파니올라호가 보물섬에 도착하자 스몰릿선장과 짐 일행은 배를 버리고 탈출한다. 오래 전 해적 플린트선장이 해골섬에 만들어놓은 통나무 요새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3년 동안 해골섬에 남겨졌던 벤건도 짐 일행을 돕는다. 짐은 몰래 히스파니올라호에 잠입해 배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다시 돌아온 요새는 해적 실버 일행이 점령해 있다. 해적들은 짐을 인질로 잡고 보물을 찾으러 떠난다.

현대에도 보물섬이 있다. 니컬러스 색슨 조세정의네트워크 상근연구원은 저서 [보물섬]을 통해 “조세피난처는 현대판 보물섬”이라고 주장했다. 조세피난처(tax haven)란 법인이나 개인의 실제 발생소득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에 대해 조세를 부과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을 뜻한다. 스티븐슨의 [보물섬]에서 해적들이 약탈한 보물을 쌓아둔 곳이라면 조세피난처는 금융자본가들이 세금을 피해 자신의 돈을 쌓아둔 곳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조세피난처에 쌓아둔 돈의 상당액은 비자금이나 부정한 돈일 가능성이 크다. 색슨은 “조세피난처는 단순히 조세회피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다른 주권국가들의 법과 규정을 무시한다”며 “조세피난처란 개인이나 법인들로 하여금 여타 국가의 규정, 법, 규제를 우회할 수 있게 정치적으로 안정된 편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유치하는 곳으로 폭넓게 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조세피난처나 조세회피처에 돈을 맞기는 주 고객이 범죄자나 불량 국가가 아닌 부자 국가·기업이나 부자들이라는 점이다. 조세피난처의 절반은 영국계다. 런던 금융가 시티를 중심으로 영국령인 저지, 건지, 맨섬, 케이맨제도, 영국에서 독립한 홍콩, 바하마, 싱가포르 등이 ‘거미줄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고 색슨은 밝혔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선원을 납치해 받은 돈도 런던 시티를 거친다. 1920년대 영국 법원이 외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런던 본사 기업에 대해서 세금을 매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후 영국 본토와 영국령 해외 영토가 조세피난처로 떠올랐다. 다른 유럽계와 미국계도 조세피난처의 한 축을 이룬다. 1934년 스위스는 은행이 금융소비자의 신원을 노출시키는 것을 범죄로 규정했다. 이후 비밀보장을 내건 조세피난처가 급증했다. 룩셈부르크와 네델란드도 20세기 초부터 조세피난처를 제공했다.

2012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아마존 영국 법인이 지난 3년 간 76억 파운드(약 8조56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아마존은 본사가 있는 룩셈부르크에 저율의 세금을 냈다. 애플·구글·페덱스·오라클 등은 돈 버는 족족 조세피난처로 돈을 빼돌렸다. 삼성·LG·SK·롯데 등 국내 대기업들도 조세회피처에 법인을 두고 있다. 조세회피처는 세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절세 혹은 탈세를 위해 찾아낸 세법적 탈출구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외국에 재산을 숨기는 방식의 조세회피가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789년 프랑스혁명 때”라고 밝혔다. 프랑스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수수료를 주고 비밀리에 스위스은행에 맡겼다.

조세피난처로 유입된 자금 세계 GDP의 3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소득세나 법인세를 부과하지 않거나 15% 이하인 국가와 지역으로 조세피난처를 규정하고 있다. OECD가 조세피난처로 규정한 곳은 36개국이다. 조세피난처로 유입된 자금은 2010년 말 기준 최소 21조 달러(약 2경4200조원)로 이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0%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 

스티븐슨의 [보물섬]은 카리브 해에 있는 외딴 작은 섬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로 추정된다. 이 섬은 대표적인 조세회피처다. 100년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인연이 재밌다.

1432호 (201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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