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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숙녀의 대결 지지옥션배: 프로바둑 시합 중에는 좀 특이한 대회가 있다. 신사와 숙녀의 대결로 통하는 지지옥션배다. 시니어 기사들과 여성 기사들이 대표를 선발해 연승전 방식으로 대결을 하는 타이틀전이다. 이 시합은 매머드 기전 못지않게 팬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제12기 지지옥션배 제1국이 벌어졌다. ‘대전의 신사’ 안관욱 9단과 이번에 첫 출전한 ‘집념의 여류기사’ 도은교 초단이 맞붙었다. 안관욱 9단은 지지옥션 배에서 좋은 성적을 낸 적이 있고 시니어에서는 알아주는 기사다. 도은교 초단은 32세의 늦은 나이에 지난해 프로로 데뷔한 특별한 이력을 갖고 있다. 소녀 시절부터 바둑에 재능을 보였던 도은교 초단은 프로를 지망하며 바둑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바둑공부를 접고 학업에 전념해 연세대 수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증권회사에 다니다가 갑자기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프로기사가 되려고 했던 소녀 시절의 꿈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새로운 도전 끝에 드디어 프로로 입단을 했다. 이번에 도은교 초단은 지지옥션배에 와일드카드로 선정됐다. 스폰서인 지지옥션의 강명주 회장은 “도은교는 대기만성형 기사”라며 “늦은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룬 것이 대단하다”고 도은교 초단을 특별히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대마의 몰락: 잘 나가던 기업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생기게 된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업의 매출액에 변화가 오기도 하고 리더의 오판에 따라 기업의 존립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바둑도 이와 비슷하다.[3도]에서 형세가 불리한 안관욱이 강하게 버티어 바둑이 복잡해졌다. 그 와중에 백◎의 거대한 대마가 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과정은 흥미진진한데 지면 관계상 그 수순은 생략하기로 한다. 도은교 초단이 흑의 도전에 강하게 대응하다가 오른쪽의 대마가 몰살당하고 말았다. 도 초단은 왼쪽의 싸움을 하는 중에 이 대마의 생사를 간과했던 것 같다. 흑2로 이어 백대마는 전멸이다. 잘 나가던 대기업이 무너지듯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어지는 순간이다.그런데 여기서 해프닝이 생겼다. 안관욱 9단이 흑2에 두는 순간 초읽기를 넘겨버렸다. 초읽기는 제한시간이 지난 후 타임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한 수를 1분이나 30초에 두어야 하고 마지막 초읽기를 넘기면 실격패가 된다. 안관욱 9단은 천신만고 끝에 역전승을 거두려는 순간 마지막 초읽기를 넘겨 시간패를 당하고 말았다. 상대인 도은교 초단은 잘 두었던 바둑을 역전당해 아쉬운 패배를 당하려는 순간 행운의 승리를 거두었다. 첫 판을 승리한 여세를 몰아 도은교 초단은 3연승을 거두며 숙녀 팀을 우위에 올려놓았다.
환경의 영향: 이 바둑은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진 전형적인 한판이다. 일반적으로 바둑에서 대마는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특히 프로들의 바둑에서는 작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 대마를 살려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바둑에서는 전혀 잡힐 것 같지 않았던 백 대마가 쓰러지고 말았다. 그 원인은 도은교 초단이 백이 오른쪽의 대마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를 생각지 않고 왼쪽에서 너무 강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변 환경의 영향을 간과한 것이다. 이런 경우를 경계하라는 바둑격언이 있다. ‘미생마 근처에서 싸우지 마라’. 이것은 비유하자면 기업이 불안정할 때 리스크가 큰 전법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것과 같다. 기업 조직이 흔들거리는 상황에서 부담스러운 사업을 벌이면 이로 인해 도산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환경의 영향이 이 바둑처럼 조직의 생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고수들은 이 격언을 자주 강조한다.한편으로 이 바둑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 쉽지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반에 쌓아놓은 재산이 많은 백이 무난히 이길 것처럼 보였으나 중간에 복잡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복잡다단한 사건이 많아지면 미래 예측은 매우 어렵다. 전쟁이 벌어져 국보급 유물이 파괴된다거나 이산가족이 되는 것과 같다. 기업 운영에서 대마가 쓰러지는 일을 피하려면 상황의 변화를 모니터링해서 적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래 예측이 어렵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환경의 변화를 체크한다면 조직의 생존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필자는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