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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연의 흉계로 나락으로 떨어져손빈은 미친 사람인 척하며 때를 기다렸다. 돼지우리에서 잠을 잤고 개밥을 먹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울고 웃고를 반복했으며 아무 곳에서나 쓰러져 잠을 잤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방연의 감시가 소홀해지자 손빈은 모국 제(齊)나라로 탈출한다.제나라에 온 손빈은 제나라의 재상이자 명장 전기(田忌)의 휘하로 들어갔다. 군사(軍師)가 된 그는 뛰어난 용병술과 전략으로 제나라 군대를 일약 강군으로 만들었다. 다음 세 가지 일화는 그의 활약상을 잘 보여준다. 우선 손빈이 제나라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제나라 군주 위왕은 왕족과 신하들을 모아 놓고 경마 시합 벌이기를 좋아했다. 위왕과 재상 전기의 말이 가장 뛰어나다 보니 두 사람이 결승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위왕이 승리했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손빈이 전기에게 말했다. “제가 시합에서 이기게 해드릴까요?” 눈이 휘둥그레진 전기가 물었다. “나는 이제껏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소. 과연 그게 가능하겠소?” 손빈이 웃으며 답했다. “이 시합은 상·중·하 세 등급의 말이 각기 겨뤄서 삼전이승을 하는 사람이 승리를 차지합니다. 지금 재상의 말은 임금의 말에 비해 조금 못 미칩니다. 그러니 시합을 할 때마다 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조건 상급 말끼리 겨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재상의 하급 말을 임금의 상급 말과 겨루게 하시고, 재상의 상급 말을 임금의 중급 말과 겨루게 하시고, 재상의 중급 말을 임금의 하급 말과 겨루게 하시지요. 그러면 한 번을 지더라도 두 번은 이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나의 말이 상대방의 말보다 느리다면 보통은 말을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치중하기 쉽다. 하지만 타고난 능력이 다르다면 이 차이는 비록 작을지라도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따라서 기약할 수 없는 결과를 위해 역량을 투입하기보다는 손빈처럼 현재 가지고 있는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나와 상대방의 역량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다음은 조나라에 대한 구원전이다. 중원의 패자가 되고 싶었던 위나라 혜왕은 방연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했다. 수도 한단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조나라는 제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에 제위왕은 전기를 지휘관으로 손빈을 군사로 하는 지원군을 출병시킨다. 그런데 손빈은 한단을 향해 진군하려던 전기를 말렸다. “지금은 한단으로 갈 때가 아닙니다.” 의아해진 전기가 물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단을 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손빈이 대답했다.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고자 할 때 주먹으로 쳐서는 안됩니다. 싸우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 그 사이에 끼어들어 손으로 밀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빈틈을 노리고 급소를 공략하면 형세가 바뀌어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위나라의 정예군이 모두 조나라로 나와 있어 위나라 안에는 늙고 병든 자들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공격하는 것처럼 하면 방연은 필시 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위나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때 길목에 군대를 숨겨 회군하는 방연의 군대를 치면 우리는 조나라를 구하고 위나라에 타격을 가하는 두 가지 성과를 함께 이룰 수 있습니다.”전기는 손빈의 전략을 충실히 따랐고 방연의 군대는 계릉(桂陵)에서 손빈의 복병을 만나 괴멸당하다시피 했다. 요컨대 강한 상대와 대결할 때는 정면승부를 벌이지 말고 약점을 노린다. 빈틈을 이용해 판을 흔들어야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승리의 길이 보이게 된다. 남을 도와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취한다는 점에서도 염두에 둘 부분이다.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마릉(馬陵) 전투다. 제나라에 패해 절치부심하던 위나라는 13년이 지난 기원전 340년, 이번에는 한나라를 공격했다. 한나라는 제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손빈은 구원에 나서되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칫 제나라의 국력을 많이 소모하게 될 수도 있으니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느라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나라를 도와줄 때와 마찬가지로 한나라가 아닌 위나라의 수도 대량으로 진군했다. 제나라가 이전과 똑같이 움직이자 위나라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태자 신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한나라에서 회군하는 방연과 함께 제나라 군대를 치도록 했다. 군사력을 총동원해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태도였다. 이처럼 위나라 군대가 기세등등하게 몰려오자 손빈은 병력을 철군한다. 흡사 겁을 먹고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했는데, 여기서 유명한 ‘감조지계(減竈之計)’가 펼쳐진다.
전쟁의 규칙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감조지계란 밥을 지어먹은 흔적을 줄인다는 뜻이다. 처음 제나라 군대를 뒤쫓던 방연은 10만 명분의 아궁이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나라의 군력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계속 추격하다 보니 취사 규모는 5만 명, 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버려진 병기와 전차도 나뒹굴고 있었다. 방연은 점점 방심하게 되었고 제나라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며 얕잡아봤다. 그래서 하루빨리 제나라 군을 섬멸하겠다는 조바심에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그저 맹렬하게 좇아갔다. 하지만 이것은 손빈의 계책이었다. 방연이 오판하도록 상황을 꾸민 것이다. 결국 위나라 군대는 마릉산 협곡에서 손빈의 매복에 걸려 전멸하고 방연은 자결로 최후를 맞는다.이상 손빈의 전략은 첫째, 상대방의 역량과 형세를 면밀히 분석했다는 점, 둘째, 유리한 전장 환경을 구축했다는 점, 셋째,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며 능동적으로 대응했다는 점, 그리하여 넷째, 전쟁의 규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승리의 조건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