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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보상 기대할 수 있는 일에 도전그런데도 여불위는 자초를 보고 “내게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나 좋은 물건을 보면 미리 투자하라는 뜻의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유래했다). 아마도 여불위에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계산이 오고갔을 것이다. ‘안국군은 아들이 스무 명이나 되지만 안국군이 사랑하는 정실 아내 화양부인의 슬하에는 자식이 없다. 이인을 화양부인의 양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후계싸움에서 유리하지 않을까? 이인은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꿈에도 해 보지 않았을 테니 내가 그를 왕으로 만들어준다면 헤아릴 수 없는 큰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여불위가 아버지와 했다는 대화도 같은 맥락이다. “농사를 지으면 몇 배를 남길 수 있습니까?” “열배 정도겠지.” “귀한 보석을 구해 좋은 가격으로 되팔면 몇 배의 이문이 남습니까?” “백배는 되지 않을까?” “만약 누군가를 도와 한 나라의 왕으로 만든다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야 천배 만배 뿐이겠느냐?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킹메이커가 되는 것은 농사나 보석장사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매우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성공 확률도 높지 않다. 하지만 막대한 보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만큼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결심을 굳힌 여불위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이인의 마음을 얻은 그는 막대한 재산을 털어 진나라로 건너갔다. 현란한 말솜씨로 화양부인과 세자를 구워삶았고 왕비를 비롯해 조정의 실세였던 양천군까지 이인의 편으로 만들었다. 결국 화양부인은 이인을 양자로 들였으며 세자는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화양부인이 초나라 출신이라는 점에서 자초(子楚)라는 새 이름까지 하사했다. 이 과정에서 조나라가 자초를 제거하려 들었지만 여불위의 활약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이후 여불위는 세자 안국군과 자초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으며 진나라의 실세로 부상해갔다. 그런데 진나라 소양왕이 죽고 왕이 된 안국군, 즉 효문왕이 즉위한 첫 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열국지]에서는 그 배후로 여불위를 지목하고 있다. “여불위가 세자 자초를 속히 왕위에 올리기 위해 술에 독약을 타서 왕에게 먹였다”는 것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뒤이어 자초가 보위에 오르면서 여불위가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것은 분명하다.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지고 승상에 임명되었으며 낙양 10만호가 식읍으로 하사되었다. 여불위가 던진 투자의 승부수가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온 것이다.이런 여불위의 권력은 자초(장양왕)가 승하한 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자초의 아들 정(政, 훗날의 진시황) 역시 여불위를 깍듯이 예우했는데, 상국(相國)으로 직함을 높였고 아버지처럼 예우한다는 뜻에서 그를 ‘중보(仲父)’라고 불렀다. 여불위의 위세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여불위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열국지]에 따르면 진시황의 출생과 즉위에는 여불위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다. 장양왕의 부인이자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희는 본래 여불위의 여자였다. 조희로 하여금 여불위의 자식을 임신한 상태로 장양왕에게 시집을 가서 진시황을 출산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규명되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의심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사마천도 [사기]에서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진시황을 격하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무튼 장양왕이 죽고 나자 태후 조희는 옛 남자인 여불위를 불러들여 간통했는데 여불위가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고 한다. 관계를 지속하다가 들통이 나서 화를 겪게 될까 두려웠던 여불위는 노애라는 사람을 대신 태후전에 들였다가 더 큰 분란을 만들었다. 오만방자 해진 노애가 태후와 통정해 낳은 아들을 보위에 올리려다 발각된 것이다.진시황은 즉각 노애의 3족을 멸하고 여불위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여불위로 하여금 관직에서 물러나 근신하게 했는데 그러자 각 나라들이 앞 다투어 사람을 보내 자국의 재상으로 와 달라며 간청했다고 한다. 그의 능력이 널리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는 또 다시 진시황의 심기를 건드렸다. 진시황은 여불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기에 진나라가 그대에게 10만호를 식읍으로 내렸는가? 그대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중보라 불러야 하는가? 진나라가 그대를 후하게 대접했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노애에게 반역을 일으키게 하였는가? 그런데도 과인이 용서해주어 봉읍에 내려가 살게 해주었거늘 그대는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다른 나라들과 연통하였으니 이는 또 무슨 뜻인가? 이것이 그대에게 관대하였던 과인에 대한 보답인가?” 여불위의 모든 공로를 부정하는 말이었다. 결국 여불위는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진시황의 심기 건드려 결국 자결이처럼 진시황이 여불위를 제거한 것은 그가 자신의 생부라는 루머(혹은 사실)가 왕권의 정통성에 부담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후인 어머니와 사통한 죄도 묵과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사실(史實)이라고 확인되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그보다는 여불위가 왕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선왕과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세운 절대적인 공, 오랜 기간 승상으로 재임하면서 생긴 막강한 권력과 수많은 추종자들, 다른 나라에서 서로 초빙하려고 다툴 정도의 능력과 명성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진시황에게 걸림돌이었던 것이다.요컨대 여불위는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희박한 확률에도 치밀한 설계와 아낌없는 투자로 자신이 원하던 바를 쟁취했다.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거둬들이며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거둔 성공을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욕심을 부렸고 물러나야 할 시점을 알지 못한 것이다. 왕과 나라에 위협이 되는 사건을 초래했으며 어느새 왕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승부는 그 결과뿐만 아니라 사후관리까지 중요하다는 것, 여불위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