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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산업 선도하는 핀란드를 가다] 노키아 빈자리 헬스산업으로 채운다 

 

헬싱키(핀란드)=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국민 유전자 정보 축적하고 민간 기업과도 공유… 글로벌 제약사 몰리고 헬스 관련 스타트업도 속속 나와

▎헬싱키시의 한 간호사가 원격으로 만정질환 노인 환자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있다. 핀란드의 지방자치단체는 원격의료시스템을 적극 도입해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있다. / 사진:비디오비지트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시 서북쪽에 자리한 헬싱키의과대학 연구동 제2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핀란드 국민의 유전자 정보 분석을 위한 혈액·조직 샘플 저장소가 나온다. 이곳엔 총 15개의 커다란 저장용기가 있다. 각 용기마다 샘플 14만개를 보관하고 있다. 핀란드분자의학연구소(FIMM)는 이 샘플을 가지고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고 데이터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핀란드 정부가 주도하는 ‘핀젠(FinGen)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티나 베스테리넨 FIMM 연구원은 “샘플은 영하 180도에서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며 “1명당 6개의 샘플이 필요하므로 이곳에만 약 35만 명의 유전자가 보관돼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 미래 위한 거대한 실험… 핀젠(FinGen) 프로젝트


▎사진:황정일 기자
2017년 12월, 핀란드 정부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인류 미래를 위한 거대한 실험을 시작한다”는 말로 2023년까지 핀란드 국민 약 10%에 해당하는 50만 명의 유전자를 수집·분석하겠다는 핀젠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지난 4월 29일에는 의료·사회 정보의 2차 이용을 허용하는 법률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핀젠 프로젝트로 축적한 유전자 정보와 그간 핀란드 정부가 쌓아온 국민의 의료·사회 정보는 공공·민간할 것 없이 연구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의료·유전자 정보를 민간에 제공키로 하자 화이자·머크 등 글로벌 제약사는 물론 헬스산업 관련 기업이 핀란드로 몰려들고 있다. 헬스케어·의료장비를 개발하려는 스타트업도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인구수 500만 명이 조금 넘는 핀란드가 헬스산업으로 다시 한 번 기지개를 펴고 있다. 한때 휴대전화 판매 세계 1위 기업 노키아를 키워 내며 경제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2000년대 들어 노키아가 쇠락하면서 핀란드 경제도 급속도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핀란드는 자신들의 향후 100년을 책임질 산업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렇게 내놓은 게 헬스산업이다. 세계적인 고령화 추세로 거대한 시장이 열리고 있고, 노키아를 통해 축적한 정보통신기술(ICT)에 그동안 쌓아온 진료 기록 등을 더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획기적으로 규제를 풀고, 공기업을 통해 관련 스타트업의 성장을 적극 지원하면서 핀란드는 희망을 빛을 보기 시작했다.

현재 핀란드에는 500개 정도의 헬스 관련 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바이엘 등 글로벌 제약사나 GE헬스케어 등 세계적 헬스 기업이 핀란드에 R&D센터를 설립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핀란드의 헬스테크 산업은 쑥쑥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핀란드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졌지만, 헬스산업은 예외다. 지난해 핀란드의 헬스케어 수출액은 22억9300만 유로(약 3조원)였다. 전체 수출액의 4% 안팎이지만 미래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핀란드의 헬스산업 관련 공기업인 비즈니스핀란드의 노라 카레라 국장은 “헬스케어 부문에서 무역수지 흑자를 거두는 국가는 세계에서 7곳에 불과한데 핀란드가 그중 1곳”이라고 말했다. 사라 하시넨 핀란드헬스테크협회장도 “헬스산업의 지속적인 성장 추세를 주목해야 한다”며 “GE헬스케어와 퍼킨엘머·플랜메카 등 글로벌 헬스테크 기업이 핀란드로 몰려오고 있다”고 전했다.

헬스산업 성공 열쇠는 ‘데이터’

이처럼 핀란드의 헬스산업이 쑥쑥 자라는 건 방대한 의료 데이터와 정부의 지원 덕분이다. 핀란드는 1954년부터 국민 건강상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국민의 진료·사회 기록을 수집해왔다. 환자에 대한 기초 자료는 물론 처방전, 치료 계획 등이 망라돼 있다. 이렇게 쌓은 진료·사회 기록을 데이터베이스(칸타)화하고 있다. 사리 팔로요키 핀란드 사회보건부 수석고문은 “2007년 관련법을 개정하면서 칸타 시스템 구축에 나섰고, 현재 기존의 종이 처방전 등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해 중앙정부가 관리하고 있다”며 “진료기록과 사회기록을 하나로 통합해 국민에게 더 정확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핀란드는 특히 칸타를 정부출연연구소는 물론 민간에도 개방하고 있다. 각종 질병에 대한 연구는 물론 헬스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환자의 MRI 영상을 입체화해 골절 여부를 진단하는 장비를 개발한 핀란드의 스타트업 디스이오루사도 정부가 제공한 진료기록 덕을 봤다.

노키아 엔지니어였던 이 회사의 사카이 소이니 최고기술책임자는 “노키아에서 영상을 입체화하는 기술을 이미 완성했지만 노키아가 쇠락하면서 쓸모없는 기술로 전락했다”며 “하지만 정부가 진료기록을 민간에 개방한 덕에 이 기술이 환자를 위한 혁신적인 제품으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가 개발한 의료장비는 현재 중국 등지로 수출되고 있다. 사카이 소이니는 “병원이나 의사가 정보통신기술을 갖고 있는 업체나 인력을 먼저 찾아와 새로운 의료장비를 제안하기도 한다”며 “진료기록이라는 확실한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핀란드에서는 환자 치료에 획기적인 의료장비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핀란드 정부는 칸타 서비스에 핀젠 프로젝트까지 어느 정도 가시화하면 신약이나 혁신적인 의료장비 개발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내다본다. 유까 라헤스마 사회보건부 디지털개발전략 담당은 “유전자 정보는 신약 개발 등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며 “기업에게는 물론 환자에게도 맞춤화한 약을 처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핀란드 정부는 이미 14만6000명에 대한 유전자 수집·분석을 마쳤다. 이것을 다시 칸타에 저장된 개인별 진료·사회기록과 조합해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내의 한 제약사 관계자는 “양질의 유전자 정보가 있다면 신약 개발의 불확실성을 확 줄여 개발 기간이나 성공 확률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개인 정보의 상업적인 활용에 대한 거부감과 규제 때문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보를 모으고 이를 민간에 개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핀란드 정부는 각종 규제를 풀고 지원을 늘려 헬스산업 생태계 조성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복용약이나 주사제의 입자를 나노 크기로 축소하는 기술을 갖고 있는 스타트업인 나노폼은 6년 전 비즈니스핀란드의 도움으로 창업 자금과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회사의 에드워드 헤그스트로 최고경영자는 “비즈니스핀란드가 당시 펀딩을 통해 200만 유로를 지원해 준 덕에 기술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며 “200만 유로를 펀딩하는 데 1년이 채 걸리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회사 운영 등에 필요한 것들을 조언하거나 지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미 수십여 개의 특허를 확보했다. 에드워드 최고경영자는 “이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지원이 있었는데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나노폼을 설립하고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내는 일은 불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규제 풀어야 비용 줄이고 환자 편의성 높여

이 같은 규제 완화와 지원은 서서히 성과를 내고 있다. 예컨대 헬싱키시는 2014년부터 원격의료시스템 스타트업인 비디오 비지트사와 손잡고 고혈압 등을 앓고 있는 만성질환 노인 환자 1000여 명에게 원격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한 해에만 900만 유로의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간호사가 만성질환 노인 가정을 한 번 찾는 데 드는 비용(45유로)을 확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에서는 헬싱키뿐 아니라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가 원격의료 업체와 계약을 맺고 이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레페 하마넨 비디오비지트 최고경영자는 “세계적으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회적 비용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며 “원격의료와 같은 규제를 풀어야 이 같은 비용을 아낄 수 있고, 환자의 편의성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의료정보의 소통과 활용을 막는 개인정보보호법과 원격진료를 금지하는 의료법 규제 때문에 앞으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이 막대한 규모의 의료정보를 보유하고 있지만 개인정보보호법에 막혀 무용지물이다. 원격진료도 꽉 막혀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종 헬스케어·의료장비를 개발하고도 해외로 눈을 돌리거나 아예 포기하는 기업도 있다. 네오펙트는 환자가 치료사에 진단 정보를 원격 전송해 치료정보·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라파엘 스마트 재활 플랫폼’을 개발했지만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서비스하고 있다. 셀트리온도 인공지능(AI) 원격진료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지만, 현재로서는 국내에서 사업 추진이 어려운 실정이다. 삼성전자의 건강기록 관리 앱 ‘삼성헬스’는 해외에서는 실시간 의사 면담, AI 진단 서비스 등이 제공되지만, 국내에서는 극히 한정된 서비스만 제공하고 있다.

한국에선 의료정보 무용지물, 원격진료 금지

그나마 업계는 정부가 올해 추진키로 한 ‘스마트진료’에 기대를 걸고 있다. 보건당국은 3월 14일 입법이 무산된 원격의료를 스마트진료로 바꿔 재입법을 추진키로 했다. 도서벽지나 교도소, 군부대 등 의료취약지에 한해 의사-환자간 원격진료를 허용한다는 방침이다. 스마트진료를 시행하면 연간 836만 명이 혜택을 볼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허용 범위가 제한적이지만 정부 계획이 실현되면 국내 헬스산업의 새로운 단초가 될 것이라는 반응이다. 관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원격의료만 해도 만성질환 노인 환자 등을 위해서라도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며 “이 같은 규제 완화를 통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창의적이고 획기적인 기술이 등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스기사] 아누 얄란코(Anu jalanko) 핀젠 프로젝트 매니저 -“핀란드인 유전적 동질성 높아…정보 제공 거부감 적어”


▎사진:황정일 기자
“사람마다 유전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도 치료 효과는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치료가 되레 악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핀젠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개인별 맞춤 치료를 통해 이 같은 차이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개인화 맞춤 진료야말로 핀젠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핀젠 프로젝트 아누 얄란코 매니저는 “지금까지는 같은 질병의 환자에게 모두 같은 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 같이 말했다. 개인별 유전적 특성에 따라 치료를 하면 치료 효과를 높이는 것은 물론 의료 불평등도 크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누 얄란코 매니저를 헬싱키 의과대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핀젠 프로젝트에는 민간 제약사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한 나라 국민의 유전자 정보가 글로벌 제약사에 어떤 도움이 되나.

“핀란드 국민은 유전적으로 동질성이 높다. 한국과 같은 단일민족에 가깝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핀란드 국민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한 의학적 연구는 다른 국가의 유전자 정보보다 ‘특정한 유전적 요인’을 찾아내기가 훨씬 수월하다. 유전자 분석 기술이 발달한 미국의 경우 여러 민족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유전자 정보가 있다고 해도 특정 요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특정한 유전적 요인을 찾아 낸다면 신약 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국민의 거부감이나 유전자 수집에 어려움은 없나.

“거부감이 애초부터 없었던 건 아니다. 진료·유전자 정보는 민감한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학·연구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기 때문에 핀젠 프로젝트가 출범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랫동안 진료·사회 정보를 모아 온 역사가 있는 만큼 유전체 수집도 어려움 없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14만6000여 명에 대한 데이터 분석을 끝냈다. 이 속도라면 2022년 이전에 국민 10%에 해당하는 50만 명의 유전체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확보한 유전자는 어떻게 데이터화 하나.

“일선 병원에서 확보한 유전자는 일단 전국 10곳에 마련된 바이오뱅크(BioBank)에 모으고, 이 유전자를 미국에 보내 각각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한다. 이것을 다시 가져와 칸타 서비스 등에 보관된 개인별 진료·사회 정보와 조합한다. 개인별 유전자 정보 자체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그동안 이 사람이 받았던 진료·사회 정보를 더해야만 정말 쓸 만한 데이터가 된다. 진료·사회 정보와의 매칭은 6개월마다 한 번씩 진행하고 있다.”

이미 확보한 유전자 정보로 연구도 이뤄지고 있나.

“그렇다. 신경학·소아학 등 8개 분야의 수십여 가지 질병을 연구하고 있다. 이미 성과물도 나오고 있다. 이것을 지금 밝힐 수는 없지만 꽤 유의미한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

1483호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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