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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 김춘추, 고구려로 가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실리 챙기다 

 

사위의 요충지 방어 실패 비난 누그러뜨리고 김유신의 군사력 강화 도모

담판은 또 다른 전쟁터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책략과 책략이 부딪히고 말과 말이 합을 겨룬다. 철저한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상대의 예측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과감한 승부수도 필요하다.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담판과 그 주역들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일러스트 김회룡
전래동화 ‘토끼의 간’. 수궁가·별주부전·토생원전·토끼전·구토지설 등 수많은 이름으로 변주된 이 이야기는 책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토끼가 꾀를 써서 죽을 위기를 벗어나는 내용이 줄거리다. 인도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처음 등장한다. 훗날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억류되었다가 이 동화로부터 영감을 얻어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김춘추는 왜 고구려에 붙잡힌 것일까?

642년(선덕여왕 11년) 백제의 의자왕은 대군을 일으켜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라 서부 전선의 요충지 대야성도 백제의 수중에 떨어졌다. 대야성 성주 김품석이 바로 김춘추의 사위였다. 백제군은 김품석과 그의 처자식, 즉 김춘추의 사위, 딸, 외손자를 죽였고 이에 김춘추는 복수하기 위해 고구려로 간 것이다. 고구려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아 백제를 공격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고구려 보장왕에게 군사적 지원 요청

그런데 이와 같은 외교적 접근은 사실 의아하다. 고구려와 백제는 비록 으르렁거리는 사이지만 함께 동명성왕을 시조로 모시는 등 정서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신라는 진흥왕 이후 적극적인 영토 확장 정책으로 고구려의 심기를 건드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빌어 백제를 치겠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뿐만 아니라 ‘적국’ 고구려로 들어갔다가 자칫 김춘추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김춘추는 왜 성공할 확률이 높지도 않은 데다 지극히 위험한 일에 자원한 것일까? 단지 복수심 때문에?

고구려로 간 김춘추는 고구려 임금 보장왕을 만나 이렇게 말한다(표면적으로는 보장왕과 대화한 것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는 연개소문이었으므로, 연개소문과 담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임금께서는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 싶어 하십니다.” 보장왕이 대답했다. “죽령(竹嶺,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에 놓여있는 고개)은 본래 우리의 영토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주겠다.”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세력을 넓히며 고구려로부터 빼앗아간 땅을 반환한다면 출병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김춘추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이 본국 임금의 명을 받들어 원군을 요청하러 왔는데 대왕께서는 환란을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을 돈독히 할 생각은 없으시고 그저 땅을 돌려달라며 사신을 위협하고 계십니다. 신은 이제 죽음을 각오할 따름입니다.” 김춘추의 태도에 격노한 보장왕은 그를 감금 시킨다.

사실 고구려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 아니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연개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아 있는 등 내부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군을 일으켜 국외로 파병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백제와는 평화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깨고 백제를 적으로 돌리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했다. 신라의 입장에서도 죽령 이북을 고구려에게 넘겨주고 대야성 일대를 회복한다면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연개소문이 죽령 땅을 눈여겨보고 있는 터에 향후 분쟁의 소지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연개소문은 2년 후 이 지역을 공격했다).

그런데도 김춘추는 왜 보장왕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을까? 그렇다고 다른 대가를 제시한 것도 아니다. 원병을 요구하면서 반대급부도 내어놓지 않는다니. 혹시 처음부터 협상을 성공시킬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관련 사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정황을 통한 추론이지만 김춘추와 보장왕의 담판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국내용이라는 의심이 짙다. 우선 김춘추를 보자. 백제의 공격으로 사위와 딸을 잃었지만 이는 곧 김춘추의 사위가 국가의 중요한 요충지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뜻도 된다. 김춘추 역시 그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목숨을 걸고 고구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비판을 상쇄한 것이다.

또 김춘추는 고구려에 가기 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며 매형이자 정치적 동지인 김유신이 군권을 확보하도록 조치했다. 김유신을 압량주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이 억류되면 김유신이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구출작전을 감행한다는 계획을 세워 왕의 허락을 받아놓는다. 실제로 김춘추가 연금되자 김유신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남쪽 국경으로 진군하여 무력시위를 했는데, 이 1만 명이 이후 김유신의 사병, 직할부대로 활약하게 된다. 고구려행을 기회로 지지 세력의 군사력을 강화한 것이다.

아울러 김춘추의 고구려행은 당나라를 긴장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김춘추는 대규모 사신단을 조직하여 떠들썩하게 고구려로 입경했다. 그동안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되어 있는 상황에서 신라는 자신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당나라에게 신라가 당나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익을 얻은 것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참변이 벌어지고 정권의 정통성이 미약한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대규모 사신단이 공식 방문해 온다는 것은 새 임금의 권위를 세워주는 일이었다. 현대사회에서도 쿠데타로 집권하게 되면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들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한다. 봐라 국제사회도 우리 정권을 인정하지 않느냐, 그러니 내부의 반대세력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고구려도 정권 정통성 강화에 김춘추 활용

보장왕이 김춘추와의 담판을 결렬시키고 그를 연금하는 강경조치를 취한 것도 정권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 듯, 신라와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긴장국면을 조성함으로써 국내 상황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보장왕이 선도해를 김춘추에게 보내 ‘토끼설화’ 이야기를 들려주게 한 것, 즉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토끼가 간을 집에 놓고 왔다며 용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듯이 죽령 땅을 돌려주도록 건의하기 위해서 신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역사서에서는 김춘추가 뇌물을 바쳐서 선도해가 알려준 것이라고 하지만 그 뇌물의 양은 매우 적었다. 선도해가 그 정도 재물을 얻자고 적국의 주요 인물을 탈출시키는 위험을 감수했겠는가. 고구려든 김춘추든 각자 원하는 바를 이뤘으므로 사태를 끝낼 명분을 만든 것이다.

요컨대 담판에는 처음부터 결렬을 염두에 두는 담판도 있다. 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담판이라는 장을 활용하는 것이다. 다만 이때에도 양측 모두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결렬이 되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하지 않는다. 결렬로 얻는 것이 피해뿐이라면 그 담판은 결렬된 것이 아니라 실패한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88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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