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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경의 ‘IF’ㅣ부자를 꿈꾸는 당신에게(20·끝) 시간여행을 한다면] 오늘을 값지게 살아야 부자의 꿈도 꾸는 법 

 

시간여행으로 미래 바꾼들 미래를 제대로 살아갈지 의문… 순간순간의 집착부터 내려놔야

▎공전의 히트 영화 [어바웃 타임]은 시간여행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강력한 힘에 항거 불능이다. 누구는 비행기 사고를 당해 죽기 전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주위에 있는 모든 건 의미였어. 힘들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있는 것. 좌절보다는 견딤으로써 희망을 가지는 것. 그것이 삶이었어. 사랑한다. 미안해.”

죽은 연인의 인스타그램에 비행기 타기 전의 웃는 모습이 있다. 안타깝다. 가족, 회사, 관계 그 모든 것이 사실 죽음 앞에서는 속절없다. 수조원을 가진 회장님이 현대 의술에 기대어 살지만 크게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늘 하루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된장찌개 끓여 놓고 먹는 모습이 더 정겨운 삶으로 느껴진다.

죽을 때까지 돈을 버는 사람을 평가절하할 필요까지는 없다. 누군가에겐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자아실현이고 삶의 의미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 가까운 시점에서는 건강·인간관계·비움에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역사에서도 이러한 것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 많다. 시간을 거슬러 1919년으로 가보자. 그때 태어난 사람이면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는 극소수일 것이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맞는 비극적 죽음


▎엘리자베스 키이스가 그린 풍속화.
일제 강점기에 영국인이 그린 백년해로를 꿈꾸는 조선 풍속화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1919년 엘리자베스 키이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한다. 그녀는 가난한 나라 조선의 사람들, 풍습, 경관에 깊이 빠져든 것 같다. 깊은 애정으로 그들의 삶을 그림과 글로 담아냈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림이 너무 예뻐서 멋지다는 표현으로는 의미를 다 전달할 수 없다. 혼례 행렬을 묘사하는 그림을 보니 정겨움이 절절 흐른다. 신부 행차에서 꽃가마가 인상적일 만큼 아름답게 채색돼 있다.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해 가고 있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삶이 영원할 것으로 믿고 오늘을 사는 것 같다. 하지만 그림 속의 신부는 흙으로 돌아갔을 확률이 높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다.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본다. 그들 모두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 보고 있을까?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다.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그림은 참 낭만적으로 보인다. 세상이 우울한 환경이라도 거기에서 나름 의미를 찾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첫날밤은 행복했을까? 그들은 초심으로 끝까지 사랑하며 행복했을까? 모든 순간에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 그림이 그려진 해, 조선인의 마음은 무던히도 추웠을 것이다. 사진 속 낭만을 뒤로 하고 조선 왕 고종이 세상을 떠났고 일제의 잔혹 행위는 이어졌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했지만 즉각 발표하지 않았다. 고종의 죽음을 두고 자연사·독살·자살 등 설이 난무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경험한 뒤로 고종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본 세력에 위협을 느꼈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지배했기에 당시 그의 삶은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생각하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깐 깡통연유와 날달걀 외에는 다른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밤에도 외국 선교사를 번갈아 궁으로 불러 불침번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생전의 명성왕후 역시 밤잠을 거의 못자고 아침 무렵 침소에 드는 바람에 고종 말기의 궁중회의는 한밤중에 열렸다고 한다.

그 많은 재산을 가진 스티브 잡스도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건 그나마 행복하다. 멸망해가는 조선의 왕의 급사는 아직도 사인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죽음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잠이 보약이고 죽음 앞에서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고종의 무덤을 파헤치고 DNA 검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본에 의해 철저히 훼손되고 지워진 역사의 복원을 위해서라도 시계태엽을 돌려 진실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요?”

문득 그가 남긴 재산은 어찌 되었을지 궁금한데, 죽음 앞에 그걸 따져 보았자 무엇 하겠나! 그의 피붙이들이 쓸쓸히 가난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허무함이 감돌 뿐이다. 조선시대 왕에게는 내탕금이라는 비자금이 있었다. 왕의 사유 재산이었다. 고종은 1909년 친한파였던 헐버트 박사에게 상하이의 독일계 중국은행에 가서 51만 마르크(현재 250억원으로 추정)를 찾아오라고 했다. 고종이 그 정도의 거액을 모았다니 상당히 놀랍다. 그런데 헐버트가 인출하려 했을 때는 이미 일본이 인출한 상태였다. 돈이 사라진 것을 안 고종은 분명히 슬퍼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인들에게 돈은 생명줄이다. 아파서 요양병원이라도 가려면 자식에게 의지하든 자신의 자금에 의지하든 돈이 필요하다. 오래 사는 시대에 누군가는 돈이야말로 자식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한다. 죽음 앞에 돈이 필요 없고 가족 간의 유산 다툼의 빌미를 제기한다지만, 돈의 위력을 그렇게 하찮게 치부하기에는 인간 수명이 길어졌고 사회는 더욱 복잡해졌다. 가족관계 역시 많은 변화를 거치고 있다.

돈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수단


▎가난한 자에게는 성녀이자 우상이었던 에바 페론은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준비 없이 세상을 뜬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역사에라도 길이 남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돈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게 하는 수단이다. 이 세상과 작별하는 길에서 그래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살만큼 유산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은 든든해 보인다. 아무리 인생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라지만…. 게다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에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 사람은 가지만 그의 유산은 남아 사회에 훌륭한 용도로 사용될 것이며 그의 이름은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물질주의적 사고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빚만 남기고 쓸쓸히 떠나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뭔가 남기고 떠나는 게 도리인 듯하고, 그게 우리네 정서 같다.

고종이 죽은 그해 7월,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 판파스의 작은 마을에는 한 여자아이가 농부의 사생아로 태어난다. 그녀의 이름은 에비타(에바 페론의 애칭). 창녀였던 그녀는 수많은 남성을 이용해 삼류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다. 그녀의 슬픈 과거가 권력층에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노동자의 단결을 부추기는 그녀의 연설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에비타의 남편 후안 페론이 드디어 쿠테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마침내 그녀는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그녀는 ‘에비타 페론’ 재단을 만들어 노동자·미혼모·노약자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했다. 그에 따라 하층민의 구세주로 각인됐다. 아르헨티나 독재에 봉사했다는 이미지도 있으나 가난한 자에게는 성녀이자 우상이 됐다. 이른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녀는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아르헨티나는 광적인 슬픔의 도가니에 빠진다.

그녀 역시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1940년대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인 그녀의 죽음을 보고 많은 생각을 떠올려 본다. 가난한 농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나이트클럽 댄서를 거쳐 퍼스터레이디에까지 올랐던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정말 한편의 드라마였다. 누구도 그녀가 9년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평가는 엇갈린다. 그녀는 국모이자 성녀로 추앙되기도 하는 반면, 아르헨티나를 몰락으로 이끈, 계산 빠른 악녀로 불리기도 한다. 극과 극의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느 게 진실인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 있다. 관능적인 탱고 춤을 추는 그녀를 생각하며 그녀가 태어났고 고종이 죽은 1919년을 떠올려 본다. 그해는 유독 슬픔을 잉태한 해로 다가온다.

에비타의 삶은 1978년 6월 21일 런던의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에서 뮤지컬 [에비타]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에비타를 보며 명성왕후를 생각해 본다. 어찌보면 일본인이 시해한 명성왕후는 더 슬픈 운명의 여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해석을 통해 죽음의 본질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서 보고 싶은 심정이 생긴다. 에비타를 추모하며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불러본다. 그의 남편 페론이 대통령이 된 직후 부른 노래로, 대통령 선거의 성공이 있었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하는 그녀의 희망이 담겨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생각하며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당시 왕과 왕비의 죽음을 오늘날 유명 부자의 죽음으로 대치하는 게 무리일 수는 있다. 혼란한 시기의 비운의 왕과 퍼스트레이디의 삶은 민주주의 시대의 부자의 죽음과 다르리라. 하지만 에비타의 노래처럼 진정 어떤 삶을 살기를 원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죽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비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나요. 하지만 이제 절 지켜보면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녀는 ‘부와 명성’보다 ‘사랑과 진실‘이 영원하다는 말을 남긴다. 그녀의 죽음을 느끼며, 고종이 떠난 100년 후의 한국의 모습을 생각하며 죽음의 의미가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본다.

잘 사는 것? 잘 죽을 필요도

100세 시대에 많은 사람은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해 더 고민하고 있다. 준비된 죽음,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이 뭔지 생각하게 됐다. 먹고 살기에 바빴던 과거에는 한가롭게 노후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물리적·정신적 여유가 없었을지 모르겠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어차피 홀로 왔다가 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인생 여정을 지혜롭게 개척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 이제는 누구나 죽음을 의미 있게 준비해야 한다. 고종도, 명성왕후도, 에비타도 그런 면에서는 실패했다.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는 자세로 삶을 아름답고 의미있게 살아가도록 하자는 사회문화운동이 바로 웰빙, 웰다이잉이다. 웰빙(Well Being)이 건강하게 부자로 오래 잘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웰다이잉(Well Dying)은 살아온 날에 대한 후회의 최소화로 준비된 죽음과 좋은 죽음을 의미한다. 인생은 성장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보다 늙어가며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아름답게 마무리를 하는 연습도 그래서 필요하다. 물론 이는 죽음을 지나치게 의식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통 사람은 사는 것만 큰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죽는 일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들은 아름답게 늙어가기 위해 일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을 잃지 않으려 한다. 열정을 가지는 것과 욕심을 부리는 문제는 다른 것이다. 노년을 초라하지 않고 우아하게 보내기 위해서 사랑·여유·용서·부드러움·아량과 친하려 한다. 예순 이후에도 역사상 업적을 남긴 사람이 많다. 성취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아름답게 늙어 가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좋은 인연을 유지하고,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아 보인다.

혼탁한 세상에서 맑고 깨끗한 생각을 가지고 죽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인연을 맺었다 할지라도 과거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갖고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면 선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는 깨우침은 오랜 수련을 통하지 않으면 달성하기 어려워 보인다. 살고 죽는 것은 ‘잠을 자고 깨는 것’과 같다. 우리가 잠들기 전에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생각이 그대로 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잠이 들었다고 쳐보자. 바로 그 사람이 생각난다. 못 잊어 죽을 것 같을 수도 있다. 훗날 이 세상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나를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성취는 열정으로 나의 하루를 즐겁게 하지만 비움은 참됨으로 나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장수하면서 객사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하루 이틀 앓다가 잠자듯 가는 사람을 죽을 복을 타고 났다고 한다. 아프지 않고 세상과 이별하는 것도 행복인 것은 사실이다. 노인 빈곤율과 고독사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지금 좋은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게 사치일 수는 없다. 노인이 되어 질병, 고독감, 경제적 빈곤, 역할 상실과 싸우지 않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이런 부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온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이 이것저것 나면 그건 좋은 죽음이 아닐 것 같다. 흔히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하는데, 집착은 과거에 얽매여 생기는 마음이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것이다. 한국 대기업 이사들 중 대부분이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한다. 경쟁이 심한 나라 성인의 상당수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다 집착 때문이다. 집착을 버리는 게 삶을 버리는 것 같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비우고 내려놓으면 편안해 질 수 있다. 죽을 때라도 편안한 얼굴을 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이제부터 집착은 없다’ ‘나의 집착은 이 시간부터 죽었다’라고 죽는 연습을 하고 아침이면 다시 태어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라고 하는 사람의 집착을 놓아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 순간 우리가 챙겨야 할 마음이다. 젊어서는 열정으로 남보다 좀 더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인정받고 싶은 게 당연하다. 늙어서도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좋다. 하지만 언젠가 떠날 운명이라면 지나친 집착은 내려놓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어느 순간 집착을 놓아버리면 진정한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여행에서 느낀 오늘의 중요성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성취하지 못한 것에 후회를 하기도 한다.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할 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세상을 비관하게 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어느 순간 나보다 남을, 일과 성취보다 믿음과 관계를 중시할 때 어쩌면 우리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살아 있는 동안 죽은 사람이 되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려면 집착이 생기지 않도록 나의 이기심을 온전히 죽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나친 기대나 욕심을 죽이고, 나다운 원래의 나를 찾아서 비교하지 않고 원하는 것에 매진할 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제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부자이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분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향기가 있어요. 부자이지만 물질에 연연해하지 않잖아요.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분 특유의 향기를 맡으며 나의 모습을 비춰봅니다. 정신적인 풍요로움과 덕으로 쌓아올린 그분의 존재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1919년보다 훨씬 전인 1895년 허버트 조지 웰즈는 ‘타임머신’을 이미 생각했다.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은 특유의 상상력으로 수많은 시간여행 이야기를 만들었다. 시간을 여행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어서, 미래에 다가올 일을 미리 알고 싶어서. 그렇게 시간여행을 하는 동기는 다양하다. 우리가 어떤 순간을 다시 살게 된다면, 과연 완벽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그 순간은 완벽하게 바꿀 수 있지만, 그에 따라 바뀐 미래가 완벽하지는 못할 것 같다.

공전의 히트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보며 시간여행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시간여행으로 과거로 가는 것을 즐기던 주인공 팀에게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다. 아내 메리가 둘째 아이를 갖자고 제안한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금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시간여행으로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팀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차마 작별을 고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팀을 보고 오늘이 ‘그 날’임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산책을 하자며 담담히 작별을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아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생각하면 누구나 가슴이 아플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다. 자기 때문에 자식의 가족의 삶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버지와 아들은 짧은 산책을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영화의 의미가 되새겨진다.

부자든 빈자든 자신의 삶을 돌이키기 위해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빈번한 시간여행으로 미래가 바뀐들 그 미래를 또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물며 우리에게 시간여행을 하는 능력은 현실에는 없다. 만약에 내가 시간여행을 한다면, 1919년으로 돌아가 볼까? 그래서 고종의 죽음도 에비타의 탄생도 막아 볼까? 그렇게 된다한들 역사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버지와의 짧은 추억여행 후,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팀은 더 이상 시간여행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주하는 하루가 평범한 일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그냥 일상을 살아가려 애쓸 뿐이다. 매일매일 열심히 사는 것. 마치 그 날이 내 특별한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 그게 우리의 삶이다.

누구나 시한부 인생 살아

시간여행으로 부자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오늘 하루 열심히 좋은 부자가 되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내 인생이니까. 하나 밖에 없는 내 인생이니까. 죽음 앞에서 열정을 불사르는 부자들도 마지막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히 살 것 같지만, 누구나 이 세상에서 시한부 인생을 산다. 죽음이 있기에 인류는 무한한 발전을 이루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값지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시간은 내 편이되고 부자의 꿈도 꿀 수 있다.

※ 필자는 국제경제 전문가로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이다. 대한민국OECD 정책센터 조세본부장, 대외경제협력관 등을 지냈다. 저서로 [한 권으로 읽는 디지털 혁명 4.0]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등이 있다.

1488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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