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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 넘치는 ‘회문(回文)’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에시오 트롯(Esio Trot)]이라는 영화는 영국의 소설가 로알드 달(Roald Dahl)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 [아북거, 아북거]가 원작이다. 번역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됐고, 영어 원서 ‘Esio Trot’ 단어장까지 나와 눈길을 끌었다. 수사적 원어 표현 하나하나가 절묘해 따로 사전이 필요할 정도다.

인기의 여세를 몰아 그가 쓴 시나리오로 지난 2015년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거북아 거북아(Esio Trot)]라는 이름의 90분짜리 영국 영화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제목이 라틴어가 아닐까 했더니 영어였다. 마치 ‘회문(回文)’같은 이 말은 놀랍게도 영어의 거북이(Tortoise)를 거꾸로 표기한 것이다.

다가구 주택 아래층으로 이사 온 미망인 실버(Silver) 부인에게 첫눈에 반한 호피(Hoppy)씨. 하지만 사교적이지도 못한 이 소심한 남자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어떻게 하면 실버 부인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어느 날, 그녀가 새로 기르기 시작한 거북이가 자라지 않는 것에 속상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호피씨는 불현듯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 줄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떠올려 실버 부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는 로맨틱 에피소드. 실버 부인의 애완동물인 거북이의 크기를 키워주겠다는 황당한 조건을 시작으로 괴상한 주문을 외우게 시킨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실버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에 골인한다는 황혼의 로맨스 코미디다.

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 판타지 [그렘린(Glemlin)]의 작가도 이 작품을 쓴 로알드 달이다. 그는 ‘에드가 앨런 포(Poe)’ 상을 두 차례나 받았고,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세 차례 수상한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한 사람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영국 왕립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이집트에서 격추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 왕자]의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삶을 보는 것 같다.

그가 즐겨 쓴 ‘회문(Palindrome)’은 ‘거북아(Tortoise)’를 거꾸로 쓴 영화 제목 ‘아북거(Esio Trot)’처럼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마찬가지인 단어를 뜻한다. “여보 안경 안 보여” “소주 만병만 주소”가 그렇다. 흔한 단어로는 ‘토마토’ ‘기러기’ 등이 있다. 물론 영어의 회문도 얼마든지 있다. ‘eye’ ‘madam’ ‘level’ 등이 역순으로 읽어도 같은 말이 되질 않는가.

회문은 ‘뛰었다 다시 돌아오다(Running back again)’란 뜻의 그리스어 팰린드로모스(Palindromos)에서 나온 말이란다. 단어뿐만 아니라 문장도 만드는데 “Madam, I’m Adam(부인, 저는 아담입니다)”, “Was I saw?(전생에 톱(鋸)이었나?)” 등이 대표적인 문장 회문이라 할 수 있겠다.

1111년, 2002년은 벌써 지나갔고, 올해가 2019년이니 2112년까지는 93년이나 남았다. 물론 대부분 그때까지 살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운 회문 년(年)이다. 제대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마찬가지인 2222년 2월 2일도 반드시 올 것이다. 2222, 2, 2. 숫자로만 보면 매우 상서로운 날이 아닐 수 없다.

서기 12년 12월 12일도 있었을 것이다. 1111년 11월 11일은 어땠을까. 이쯤 되면 원조 ‘빼빼로 데이’ 수준이자 ‘왕빼빼로 데이’다. 역사 속에서나 나올 33년 3월 3일은 진짜 ‘삼겹살 데이’. 정월 초하루(1월 1일)를 시작으로 삼월 삼짇, 오월 단오(음력 5월 5일), 유월 유두(6월 6일), 칠월 칠석(7월 7일) 등 명절은 대체로 달과 날을 맞춘다. 기억하기 쉽고 모양도 좋다. 북한은 소위 건국 기념일이 ‘구구절(9월 9일)’이고, 중국 건국기념일은 10월 10일 쌍십절이다.

지난 2011년 11월 11일 11시 11분에는 11이 다섯 번 들어갔다. 이날을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라고 해서 금융권까지 마케팅에 가세했다. 행운의 대출금리 0.11%짜리가 나왔다던가. 11이라는 숫자를 젓가락으로 보고, 부(富)의 상징이자 ‘넘버 원’으로도 해석한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소독저(나무 젓가락)를 ‘와리바시(割箸(わりばし)’라고 부르는데, 우리도 입에 붙어 그냥 쓰고 있다.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숫자는 8이다. 그들이 자주하는 말 “부자 되세요”는 ´파차이´라 하는데 ‘파’는 숫자 8의 발음 ´빠´와 비슷하다. 그래서일까.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시도 2008년 8월 8일에다가 오후 8시로 정했을 정도라면 더 말해 뭘 하겠는가.

홍보·마케팅에도 회문은 대접을 받는다. 이를 테면 TV 광고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대리운전 광고 ‘앞뒤가 똑같은 1588-1588’은 연락처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기 쉽게 해준다. 1588, 5588의 경우 앞에 있는 수 ‘1’과 ‘5’를 빼놓고는 모두 588로 같은 숫자다. 특히 1588은 수신자 요금부과번호로 발신자는 돈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기업이나 금융회사, 병원, 고객센터, 치킨 주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국대표 전화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전국 대표 번호란 전국 어디서나 하나의 전화번호로 상품 주문을 하거나 상담 등을 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다. 주로 1588, 1577, 1566 같은 국번을 사용하고 통신비를 발신자가 부담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대표번호의 일부는 ‘무제한 무료’는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져 통신사들의 적극적인 안내가 필요하다. 어찌됐든 사람들이 잘 기억해 낼 수 있도록 중복되는 숫자의 선호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이삿짐센터도 ‘2482’나 ‘2424’를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3082로, 30분 이내에 82(빨리) 온다는 뜻을 가진 피자집 전화번호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문자를 쓰자면 회문이란 ‘순역동의(順逆同意)’ 어구다.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같은 뜻이 되는 순역동의 문장이 이를테면 회문(回文)인데, 몇 가지 소개해본다.

‘다 큰 도라지일지라도 큰다.’
‘생선 사가는가사선생.’
‘다시 합창 합시다.’


영어에도 그럴싸한 것들이 보인다. 누군가 지어냈을 터이지만, 수준 높은 말장난이다.

‘Was it a cat I saw?(내가 고양이를 봤나?)’
‘A man, a plan, a canal, Panama(인류 대 역작(大力作) 파나마 운하)’


회문시(回文詩)라는 것도 있을 수 있겠다. 앞에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뜻은 통한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李奎報)의 ‘미인원(美人怨)’ 첫 줄을 순서대로(順讀) 읽어보면.

腸斷啼鶯春(장단제앵춘, 꾀꼬리 우는 봄날 애간장은 타고)
春鶯啼斷腸(춘앵제단장, 봄 꾀꼬리 우는 소리에 애간장 타네)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1513호 (20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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