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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떠오르는 ‘서브프라임의 악몽’] 비우량 회사채의 금융 소외현상과 외화 유동성 위기 

 

같은 돈을 쓰더라도 미래지향적 금융 인프라 투자에 집행해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3월말 각국 중앙은행이 미국 국채를 맡기면 달러를 빌려주는 ‘레포’ 창구를 설립했다. / 사진:미국 연방준비제도 홈페이지
코로나19의 확산이 촉발한 전례 없는 글로벌 충격 속에서 가뜩이나 불확실했던 시장 여건이 더욱 어두워졌다. 충격의 규모가 전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정책 당국들의 대응도 강도와 규모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렵다. 특히 전면적 자금경색으로 경제 주체들의 유동성에 경고음이 커지자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돈을 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대대적인 유동성 공급에도 필요한 곳에 자금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충격은 자금 지원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매번 상황 논리에 휘말려 유동성 공급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금융당국이나 중앙은행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 상황은 도덕적 해이와 대마불사만 재확인하는 결말로 이어지기 쉽다. 금융당국이나 중앙은행의 직접 개입을 통해 그려볼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불안한 회복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국내 상황만 놓고 봐도 이런 시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중앙은행 직접 개입은 ‘대마불사’만 재확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 3월 말 외국 통화 당국을 위한 임시 레포 기구(FIMA Repo)를 만드는 등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달러 유동성 공급 채비를 마쳤다. 사진은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경기가 급격히 위축된 가운데 비우량(서브프라임) 회사들이 위기에 몰렸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가 위기의 시발점이었다면 이번에는 서브프라임 등급을 가진 회사채가 화약고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에서는 코로나19가 본격화되자 기업어음(CP)매입 방침을 내놓았다. 7000억 달러를 투입해 유동성이 막힌 기업에 우회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매입 대상이 신용등급이 높은 기업에 한정돼 있어 정작 유동성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BBB등급 이하 기업은 지원받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은 4월 9일 투기등급 채권까지 유동성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한국에서도 비우량 회사채들의 만기 도래에 대한 걱정이 많다. 당장 A등급 이하 채권들이 시장에서 소화가 되지 않으면서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반면 금융 당국에서 조성한 채권시장안정펀드는 대상이 AA등급 이상이기 때문에 실제로 돈이 필요한 곳에는 투입이 안 된다는 불만도 나온다. 신용등급 하락이 분명한 기업들에게도 회사채와 기업어음 매입에 제도권 금융기관이 선뜻 나서기 어렵다. 취약부분에 자금이 닿지 못하는 상태에서 심화되는 금융 소외현상은 점차 무차별적 지원의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시장에서는 일시적이라도 포괄적 옵션부 정부보증을 기대하고 있다.

회사채 상환과 기업어음 만기 도래 문제 외에도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은 외화 유동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외화 유동성에 의존하고 있는 다수의 수출 및 해외투자 주체들의 상황은 심각하다. 특히 중소영세기업과 소상공인은 제도권 밖으로 내몰린 상태다. 외화유동성의 경우 지난 3월 연준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준은 미 국채 시장을 포함한 금융시장의 원활한 기능을 지원하고 미국 가계와 기업에 대한 신용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유동성 살포에 나선 데 이어 3월 말에는 외국 통화 당국을 위한 임시 레포 기구(FIMA Repo)를 만드는 등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달러 유동성 공급 채비를 마쳤다.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재무성 증권을 처분해서 달러 유동성을 확보할 경우 예상되는 금리인상을 방지하면서 당장 급한 달러 유동성 부족을 완화할 수 있다. 다만 세계적 달러 유동성 부족현상이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국가에서 달러 유동성은 위기 때마다 시급한 문제로 떠오른다. 모두가 달러 유동성을 원하고 안전자산수요가 급격히 높아지는 상황에서 연준이 신흥시장의 달러 수요까지 충족시켜주기는 어렵다. 과거 50여년간 유로(역외) 달러 시스템으로 제공했던 유동성 공급채널의 핵심 은행들도 규제강화와 거래상대방 위험증가, 그리고 우량담보의 부족에 시달리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여파는 2019년 9월 미국의 레포 금리의 급등에서 현실화됐다. 미국의 레포 시장은 이제 시장에 달러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위기 때마다 달러 유동성이 부족한 이유는 자체적인 담보 기반이 구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의 모습은 축소되고 거대한 중앙은행들의 존재감이 시장을 압도하게 된다. 시장이 소화해야할 금융 기능을 중앙은행이 대신할 수는 없다. 사전 대비에도 불구하고 달러 자금조달에 장애가 발생한다면 원화 시장에서 유동성 문제도 불가피하다. 이 경우 유동성 위기 자체가 신용위험으로 이어지게 된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모든 경제 주체들이 움츠려든 상황에서 기업 도산이 어어 진다면 대량 실업과 장기 침체를 걱정해야 한다.

달러 유동성은 위기 때마다 시급한 문제

코로나19가 촉발한 전세계 경기 침체 상황의 뒷면에는 이미 오래 전에 준비했어야 할 금융시스템의 개선노력의 공백이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19 보다 더 심각한 위험요인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최대한 우리의 대응 능력을 신중하게 활용해야 한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과도한 주문일지 모르지만 민간에서의 시장참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모든 요소에 연결시켜야 한다.

같은 돈을 쓰더라도 미래지향적 금융 인프라 투자와 연관시켜 집행할 경우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 더불어 중장기적 관점에서 지금까지 방치된 달러 유동성에서의 담보 체계를 보다 포용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담보 체계의 포용성에 변화가 없다면 해법을 찾기 어렵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지나가더라도 또 다른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달러 부족 현상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채무만 일방적으로 늘리는 신용공급 체제로는 ‘공도동망(共倒同亡)’을 피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정공법을 선택해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자문위원

1530호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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