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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희의 테크&라이프] 반도체 안보 전략 성공할 수 있을까 

 

기술 패권주의 대두 속 우리 선택은?

반도체 기술력이 세계 최강 국가들의 패권 경쟁을 좌우할 결정적 무기가 될 수 있을까?

미국이 중국의 ‘굴기’를 막기 위한 초강력 카드를 내밀었다. 중국의 대표 IT 기업 화웨이에 대한 실질적인 반도체 공급 금지령을 내렸다.

미국 상무부는 최근 해외 기업이라도 미국 기업의 기술을 바탕으로 제조된 반도체를 수출하려면 사전에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새로운 제재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의 소프트웨어와 기술을 사용해 화웨이와 그 자회사가 설계한 반도체 디자인, 그리고 화웨이와 자회사가 설계하고 미국의 생산 장비를 사용해 만든 반도체가 대상이다.

끝장 보겠다… 미, 화웨이 겨냥 새 제재 발표

화웨이가 반도체를 구할 경로를 차단하는 것은 물론, 규제를 피해 스스로 반도체를 생산하지도 못 하도록 하는 조치다.

미국은 지난해 화웨이를 제재 리스트에 올리면서 미국 기업이 화웨이와 소프트웨어나 반도체 등을 거래하는 것을 규제했다. 화웨이는 스마트폰에 지메일 같은 구글 앱을 쓰지 못 하게 됐고, 인텔이나 퀄컴 같은 미국 기업의 반도체도 넣을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화웨이는 이에 대응해 구글 앱 대신 자체 개발한 모바일 앱을 탑재하고 앱 생태계도 새로 구축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반도체는 자회사 하이실리콘의 ‘기린’ 시리즈를 사용했다. 지난 1분기 화웨이 매출은 257억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4% 성장했다. 작년 1분기 39% 성장한 것에 비추면 큰 타격을 입었음을 알 수 있지만, 어느 정도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음도 보여주었다.

사실 화웨이는 하이실리콘에서 스마트폰과 네트워크 장비, IoT 기기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생산하며 꾸준히 기술력을 쌓아왔다. 스마트폰 경쟁력을 높이려면 애플이나 삼성전자처럼 핵심 반도체 기술을 스스로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재로 반도체 기술 확보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이번 조치로 화웨이의 반도체 자립 노력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개발한 반도체를 생산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하이실리콘은 반도체 설계만 하고 생산은 대만 TSMC에 맡긴다. TSMC는 고객에게 반도체 설계도를 받아 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위탁 생산, 이른바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 같은 기업들이 TSMC에 생산을 맡긴다. 하이실리콘 역시 제품의 90%를 TSMC에 맡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TSMC건 세계 어느 반도체 기업이건 미국산 장비 없이 생산 라인을 꾸린 곳은 없다. 미국은 KLA, 어플라이드머터리얼스, 램리서치 등 핵심 반도체 제조 장비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첨단 공정에서 이들 기업의 대안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사실상 모든 반도체 기업은 화웨이와 거래하기 위해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로써 아마도 상당 기간 동안 미국은 화웨이의 손발을 묶어 둘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철저한 글로벌 분업에 기초한 반도체 산업 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과 대만의 대기업은 첨단 반도체 생산 기지 역할을 하고, 미국과 일본은 핵심 제조 장비와 소재를 공급한다. 파운드리는 첨단 반도체 설계 역량을 가진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막대한 시설 투자 없이 혁신적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중국은 이렇게 생산된 반도체 등 부품을 모아완제품을 만들어 세계에 공급하고, 동시에 이런 제품의 시장이 되어 준다.

그러나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맞물린 톱니바퀴들이 삐걱거리게 했다. 반도체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미국의 제조 장비를 시장 외적인 이유로 못 쓰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싹텄다. 지난해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이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번지면서 산업에 리스크를 안긴 사례를 연상시킨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 질서 어디로?

TSMC는 대형 고객 하나를 통째로 잃을 판이다. 현재 TSMC 매출의 15% 정도가 화웨이에서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TSMC로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미국 상무부가 화웨이 제재를 발표한 날, TSMC는 미국 아리조나 주에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 건립 의향을 밝혔다. 120억 달러를 들여 월 2만장의 웨이퍼를 생산하는 5나노 공정 라인을 건설, 2024년부터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집요하게 압박한 결과다. TSMC가 미국에 생산 라인을 만들기로 한 것은 화웨이와 거래를 막지 말아 달라 요청하기 위한 성의 표시 측면도 있었을 터나, 이번 미국의 조치로 당분간 불확실성은 이어질 전망이다. TSMC의 미국 라인은 규모도 애매하고, 가동에 들어갈 2024년에는 이미 최첨단 공정도 아니게 된다. 미국의 우수한 반도체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시장 상황에 맞는 선택이라 하기 어렵다. 반면 미국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첨단 기업을 유치하는 효과를 거뒀다.

결국 미국은 반도체 기술을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에 무기로 사용한 셈이 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파격적으로 산업을 지원하고 때로는 기술 훔치기나 지적재산권 침해, 해외 기업에 대한 불공정한 규제 등의 꼼수를 쓰며 미국의 기술 주도권에 도전하는 중국을 줄곧 경계해 왔다.

기술 경쟁의 핵심 분야 중 하나인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은 설계와 디자인, 첨단 제조 장비, 혁신 역량 등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갖고 있으나 대규모 제조 역량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다. 비싼 인건비와 천문학적 투자 경쟁으로 미국이 반도체 생산에서 손을 뗀 결과다. 물론 미국에도 인텔이나 마이크론,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대형 반도체 제조사가 있지만, 이들의 생산 라인은 자체 제품 제조에 쓰인다.

반도체 생산 역량이 아시아에 집중되면서 미국의 불안은 커져 갔다. 여기에 코로나19 판데믹으로 세계 시장의 문이 막히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글로벌 공급망이 위축되면서 제조 역량을 아웃소싱한 나라는 선진국이라도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 마스크 하나 생산해 공급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전략 물자의 생산력을 어느 정도는 내재화해야 할 필요성이 확인됐다.

기술 패권에 대한 미국의 의지와 반도체 제조 역량의 아시아 집중에 대한 우려 등 안보적 이유들이 미국의 최근 기술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은 과감한 조치들로 반도체 안보를 지켰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나라들은 미국의 반도체 기술력이 자국의 기술 안보를 해치는 무기가 될 가능성을 보았다.

중국 역시 미국과 각을 세우며 거대한 시장과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앞세워 다른 나라 기업들에 협력을 요구할 것이다.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앞으로 화웨이와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할 지 고민될 것이다. 두 회사는 화웨이에 각각 연간 8조원과 5조원 상당의 메모리 반도체를 팔고 있다. 한편으로 삼성전자는 스마트폰과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서 화웨이의 경쟁사이기도 하다.

중국의 굴기와 강경한 미국 정부의 대응, 팬데믹 등의 영향이 겹치면서 반도체 산업이 요동치고, 우리도 어려운 선택 앞에 섰다. 기술 안보가 개방 시장보다 우선시되는 새로운 시대로 우리는 들어서고 있다.

※ 필자는 전자신문 기자와 동아사이언스 데일리뉴스팀장을 지냈다. 기술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해가는 모습을 항상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디지털과학 용어 사전]을 지었고, [네트워크전쟁]을 옮겼다.

1536호 (20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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