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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23) 교훈이 된 레이캬비크 회담] 실패를 통해 나아가다 

 

레이건·고르바초프의 담판… 실패 원인 복기, 새 합의점 찾아

▎1985년 11월 제네바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 참석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모습.
1983년 3월, 로널드 레이건 美 대통령은 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핵무기 동결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월하다고 단언하고, 양측 모두 잘못이라고 규정하며, 악의 제국의 공격적인 충동과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군비경쟁을 거대한 착오라 부르면서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투쟁을 외면하는 그런 자만 말입니다.”

아무리 적대국이라고 해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는 것은 그때껏 어느 미국 대통령도 해본 적 없는 극단적인 발언이다. 더욱이 2주 후, 레이건은 전략방위계획(Strategic Defense Initiative, SDI)을 발표했다. 소련의 탄도미사일(ICBM)을 방어하기 위해 인공위성으로 실시간 감시하고, 레이저를 활용해 요격한다는 구상이다. 우주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이름을 따서 ‘별들의 전쟁(스타워즈)’ 계획이라고도 불렸다.

SDI는 소련을 크게 긴장시켰는데, 그동안 애써 구축한 핵 전력이 무력화될 뿐 아니라 SDI가 공격무기로 전환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경제난을 겪던 소련으로서는 그에 대응할 체제를 갖출 수 없었던 터라,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서로의 마지노선 파악 후 조율 집중

그러던 와중에 소련의 리더가 교체됐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했고, 뒤이어 집권한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1984년 2월에 병사했다. 후계자인 체르넨코 서기장도 1985년 3월, 눈을 감는다. 해마다 최고권력자가 교체되는 혼란 속에서 새로 서기장에 오른 사람이 바로 미하일 고르바초프다. 소련이 건국된 이후 태어난 최초의 서기장으로, 전임 서기장들에 비해 훨씬 젊은 나이였다.

고르바초프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소련의 위기를 타개하고, 국가를 일신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개혁)’와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개방)’를 내세웠다. 공산주의 경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패한 관료제를 개혁하며, 정보의 자유를 추구한 정책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원이 필요했는데, 미국과의 체제경쟁을 위해 과도하게 지출하고 있는 군비를 절감하고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자마자 동유럽에 SS-20 미사일 배치를 중단하고, 6개월간 핵실험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래서다. 외무장관도 개혁파인 셰바르드나제로 교체했다.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대소 강경파이자 ‘힘을 통한 평화’를 강조해 온 레이건은 처음에는 고르바초프가 보내는 신호를 믿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기만, 선전 전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5년 11월 1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양국 정상이 만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제네바회담은 일종의 탐색전이었다. 어떠한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 실무진의 노력은 양국이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다. 오랫동안 등을 졌던 두 나라 정상이 만나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그리하여 1986년 10월 11일, 두 정상은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제네바회담이 만남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 레이캬비크에서는 어떻게든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했다. 처음에는 희망적이었다. 유럽에서 중장거리핵무기(INF)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즉시 제거하고, 5년 안에 전략무기 50%를 감축하며, 다시 5년 안에 100%를 제거하자고 의견이 모였다. 레이건이 “10년 뒤, 마지막 미사일을 제거한 후에 이곳에 와서 다시 축배를 듭시다”라고 말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SDI에 대한 양국의 견해 차이가 담판을 가로막는다. 고르바초프는 SDI가 공격용으로 전용될 수 있고, 우주에서의 핵무기 경쟁을 촉발할 것이라며 향후 10년간 ‘실험실 수준으로 제한’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이건은 SDI는 순수하게 방어목적이라며, 의심스럽다면 연구결과를 소련과 공유하겠다고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고르바초프는 SDI의 포기를 요구하고, 레이건은 SDI를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하면서 결국 회담은 무위로 돌아갔다. 소련의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훗날 후손들이 우리가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낸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SDI는 이렇게 논란이 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SDI는 미국 내에서도 부정적인 목소리가 컸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될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이 SDI를 고집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SDI를 통해 자유진영의 시민을 핵미사일로부터 방어한다”는 명분(회담 직후 레이건이 나토 기지에서 한 발언), 그리고 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다.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고 게임의 룰을 미국이 정하겠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미국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하여 SDI 포기를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레이캬비크 회담은 실패로 끝났지만, 영원히 실패로 기록된 것은 아니었다. 1987년 12월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워싱턴에서 ‘중거리핵전력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 Treaty, INF)’을 체결했는데, 양측 모두 레이캬비크 회담이 돌파구가 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서로의 마지노선을 알았기 때문에, 즉 SDI가 문제 해결을 위한 전제라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에, 이 사안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상충 안건 연계치 않고 새 합의점 찾아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와 꾸준히 소통하며 의견을 조율했고, 고르바초프도 군축 논의에서 더는 SDI를 연계하지 않았다.(고르바초프는 소련의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의 조언을 받아 SDI의 허점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양보해도 괜찮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양국은 핵탄두 장착용 중·단거리 미사일 폐기에 합의했고, 4년 후에는 ‘전략무기감축협정’까지 체결할 수 있었다.

레이캬비크 회담이 무산되었을 당시, 미국 백악관은 “99야드를 날아올랐지만 1야드를 날지 못해 추락했다”고 논평했다. 고르바초프는 “(비록 실패했지만) 우리는 처음으로 수평선을 보았다”라고 밝혔다. 담판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하게 된 원인을 잘 복기하고, 계속 대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 실패를 전환점으로 삼아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다. 99야드를 날아봤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는 마지막 1야드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고, 처음 바라본 수평선을 믿고 계속 날아가면 되는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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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호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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