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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의 팝콘 심리학] 조직 생산성 떨어뜨리는 당신, 혹시 스파이? 

 

美 OSS ‘간단한 사보타주 현장 교범’… “위계와 권력 앞세워라”

▎사진:© gettyimagesbank
일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해서 이 험한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일과 함께 성장했다. 개미나 꿀벌의 일은 예나 지금이나 내용과 방식이 그대로다. 그들이 짓는 집은 매우 정교하고 거대하기까지 하지만 이미 수만 년 전에 완성된 형태를 그대로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일은 진화한다. 수렵채집에서 시작해 유목이나 농경으로, 교류의 시작과 함께 상거래와 보험으로, 산업혁명과 함께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그리고 정보화와 함께 가상공간의 산업들로 계속 진화해왔다. 이렇게 일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 자체도 진화했다.

우리는 직업이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젊은이들에게 그 의미를 가르치려고도 한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진짜 일이라면 누가 봐도 명백하게 그 일의 필요성이나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갈 때마다 나는 쓰레기 수거라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쓰레기 수거가 중단되는 주말 마지막 밤의 수거장은 말 그대로 쓰레기 더미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단 이틀만 이 일이 멈춰도 이 지경인데, 만약 일주일간 그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도시 전체가 이 수거장 처럼 변할 것이다.

우리가 먹고 입을 것을 생산하는 일, 우리가 거주하고 일하는 곳을 유지하는 일들은 도시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기초다. 코로나 사태와 함께 방역이라는 일의 중요성도 커졌다. 방역은 단지 의료인만의 일이 아니다. 의료 인력을 양성하고, 방역물품을 생산하고, 의료시설을 유지하는 수많은 일들에 의해서 작동하는 거대한 체계다. 이런 일들은 왜 필요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 일을 아무도 하지 않을 때 우리 삶이 어떻게 무너질 지를 상상해보면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일에 부여하는 가치와 실제 중요성의 불일치


흥미로운 건, 사회가 일에 부여하는 가치가 그 일의 실제 중요성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되고 필수적인 일일수록 더 낮은 가격을 부여하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일에 더 큰 의미와 값을 치르곤 한다. ‘베블렌 효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일의 가치보다는 ‘힘든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음의 가치’를 더 높이 쳐주는 방향으로 사회가 진화했다고 지적했다. 근대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드라마 [다운튼애비]에서 주인공 그랜섬 백작은 자기 딸이 결혼하려는 남자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 당혹해한다. 귀족의 과업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명예와 재산을 지키고 키우는 것이지 직업 따위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는 행동과학자 스키너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일의 가치 부여체계와는 정반대다. 스키너는 자신의 소설 [월덴II]에서 하수구 청소 같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고되어서 하려는 사람이 적은 일 일수록 크레딧을 많이 부여하고, 사무실에서 하는 서류작업 같이 편안한 일에는 지원자가 많으니 크레딧을 적게 부여하는 시스템을 제시했다. 어찌 보면 공산주의 체계 같지만 평생 보상과 행동의 관계를 연구한 그는 이렇게 해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왜 이런 모순이 벌어질까? 권력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조직 체계가 필요해지고, 그 체계에는 반드시 위계와 권력이 형성된다. 그 권력은 일의 배분을 통해서 구현된다. 하버드 대 심리학 교수였던 무자퍼 셰리프가 1950년대에 미국의 한 국립공원에서 12살짜리 아이들을 모아놓고 했던 ‘케이브 실험’에서도 한 집단의 리더가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이 집단 구성원들에게 역할을 배분하는 것이었다. 이 조직과 권력은 대개는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일과 권한을 나눠주며 제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히 위계가 명확한 사회에서는 필수적이고 고된 일일수록 그 가치를 가볍게 여기고 그에 비하면 껍데기에 가까운 일들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조직에서 그런 경우가 자주 벌어진다면 그 조직은 과연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2차 대전 당시 CIA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전략사무국(OSS)에서 적국에 침투할 스파이들에게 가르친 행동강령이 있다. 2008년에 비밀등급이 해제되어 대중에게 공개된 이 문서의 제목은 [간단한 사보타주 현장 교범(Simple Sabotage Field Manual)]이다. 침투한 적국 조직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려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직급별로 간단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 매뉴얼은 2018년 삼성의 글로벌 전략회의에서도 인용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전략회의에서는 주로 일반 직원급이 해야 할 행동규범들이 언급되었던 모양이다. “상사의 지시를 못 알아들은 척하고, 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고, 회의에서 엉뚱한 개인적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다른 직원들의 불만을 여기저기 전달하라”는 등이 그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이 매뉴얼 중에서 조직의 상급관리자 직급에 해당하는 행동 강령을 인용해보려 한다.

이 강령의 목표는 단지 조직의 생산성을 낮추는 데만 있지 않다. 그런 행위를 하고서도 스파이 본인이 의심을 받아 체포되거나 나쁜 평가를 받아 조직에서 퇴출되지 않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오히려 조직에서 승진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그러면 더 오랫동안, 더 효과적으로 조직의 생산성을 저하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이 행동강령을 읽은 한국의 회사원들은 거의 신앙 간증에 가까운 공감을 표하곤 한다. 바로 자기 회사에서 누군가가 딱 저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거다. 그 이유가 뭘까. 더 흥미로운 것은 회장이나 사장들이 모인 회의에서는 이 매뉴얼에서 직원 행동강령이 인용되고, 직원들이 대부분인 SNS에서는 임원에 해당하는 행동강령이 인용된다는 점이다. 다들 자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험인간], [심리학오디세이], [팝콘 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1548호 (20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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