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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호적수(4) 성왕과 진흥왕] ‘정보전’에서 갈린 두 나라의 명군(名君) 

 

국익 위해 동맹 버린 신라 진흥왕… 백제 성왕, 매복에 지다

▎ 사진:영화 ‘황산벌’ 장면
554년 음력 7월, 백제의 성왕(聖王, 재위 523~554)이 신라군에게 참수되었다. 신라가 빼앗아 간 한강 하류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백제는 왕자 부여창을 사령관으로 삼아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성왕이 아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백제군 진영으로 가던 길에 신라군의 기습을 받았고, 불행히도 붙잡혀 죽고 만 것이다. 이때 백제도 신라에 대패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최고위 관리인 좌평 네 사람을 비롯하여 백제군 2만96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왕은 호칭에 ‘성스러울 성(聖)’자가 들어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제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다. 아버지 무령왕의 개혁정치를 이어받아 지방·군사·행정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다. 대중, 대일 외교를 통해 백제의 위상을 높였으며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사비(泗泌, 충남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남부여’로 국호를 개칭하며 백제를 중흥한 군주가 바로 성왕이다.

성왕은 고조할아버지 개로왕이 고구려에 처형당하고 수도 위례성이 함락 당했던 원한을 갚고자 했다. 하여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략한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이른바 ‘나제동맹’ 관계에 있었다. 고구려가 공격해올 때마다 양국은 구원병을 파병해 서로를 도왔다. 성왕은 나제동맹을 활용, 551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의 땅을 점령한다. 한강 상류의 10군은 신라가, 하류의 6군은 백제가 각각 나누어 가졌는데 바로 70여 년 전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되찾은 것이었다.

성왕의 기세를 꺾어야했던 진흥왕

하지만 성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개로왕의 원한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고구려는 돌궐의 침략으로 정신이 없었다. 왕위승계를 놓고 내전까지 벌어졌던 터라 대내외적으로 허약한 상태였다. 성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며 신라에 북진을 제의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백제는 황해도→평안도로, 신라는 강원도→함경도로 양면에서 진군하자는 것이다. 성왕은 신라가 함께 출병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후방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백제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 말이다.

한데 신라는 성왕의 제안을 거부했다. 심지어 백제가 북진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라 하고, 백제의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가 감동하여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국의 신뢰는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 6군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흔히 이 사건은 신라가 무력을 써서 탈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백제가 모종의 이유로 그 땅을 비워뒀고, 신라가 냉큼 점령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어느 쪽이든 신라가 백제 땅을 빼앗아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도대체 신라는 왜 백제를 배신한 것일까? 백제의 땅이 탐나서? 신라의 선택 자체를 뭐라 할 수는 없다. 국익이 최우선인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신의란 부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이해가 잘 되질 않는다. 1, 2, 3등이 있으면 보통 동맹은 2등과 3등이 맺는다. [삼국지]에서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하여 오나라와 촉나라가 연합했듯이 말이다. 1등과 동맹하면 손쉽게 적을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곧바로 1등의 매서운 칼날이 자신을 향해온다. 물론, 2등과 3등도 1등이 사라진 후에는 적으로 돌아선다. 다만 1등과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므로 손을 잡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역시 백제와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진흥왕은 신라의 국토를 비약적으로 넓힌 임금이다. 각 방면에서 나라를 크게 성장시켰다. 진흥왕은 신라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는 백제를 경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신라로서는 백제로부터 인적, 물적 자원을 가져와야 국력을 도약시킬 토대를 마련할 수가 있다. 또한, 성왕의 기세를 꺾을 필요도 있었다. 여러모로 능력이 뛰어난 성왕을 견제하지 않는다면 신라에 큰 위협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국익 위해선 권모술수도 당연, 의리는 없다

더욱이 진흥왕이 보기에,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협공하는 것은 신라에 이득이 되질 않았다. 성왕의 제안을 따르게 되면 백제는 교통의 요충지나 곡창지대로 진군하지만, 신라의 진출로는 강원도와 함경도, 험준한 산악지대다. 군대가 나아가기 힘들 뿐 아니라 영토로서도 매력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의 왕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비하여, 신라는 고구려와 특별한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공존할 수 있는 처지였다. 1등이 무섭긴 하지만 2등이 주는 위협이 더 크다고 판단한 상황, 이에 진흥왕은 백제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와 손을 잡은 것이다.

성왕은 분노했다. ‘동맹국’의 결정을 낙관하고 있던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한 것이다. 이제는 고구려에 대한 북진을 꾀하기는커녕, 고구려와 연합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올 경우를 걱정해야 했다. 하여 성왕은 초기에 신라를 제압하고자 대가야, 아라가야와 연합군을 편성하고 일본에도 전쟁물자와 병력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신라가 방심하도록 저자세를 보인다. 신라가 한강 유역의 백제 영토를 점령한 것에 대해 일체의 항의를 하지 않았고, 553년에는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신라와 계속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연출한 것이다.

그런데 진흥왕은 이와 같은 성왕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성왕이 비밀리에 신라를 공격할 백제-가야-일본 연합군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만전술을 벌여 백제와 가야를 혼란에 빠트렸다. 성왕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554년, 관산성 일대에 총공세를 펼쳤는데, 대승을 거두는 등 초기 전황은 백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성왕의 움직임이 신라군에 노출되면서 매복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왕이 적군에게 참수되었으니, 충격을 받은 백제군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만다. (*성왕이 신라군에게 참수되었다는 것은 [일본서기]에 근거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죽임을 당했다고만 되어 있다.)

성왕과 진흥왕의 대결은 각자의 국익을 도모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사람이 특별히 오판했다거나 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다. 성왕과 진흥왕의 능력만 본다면 승패를 예측하기 힘든 싸움이었을 것이다. 한데 결과는 성왕의 실패와 진흥왕의 성공. 이를 가른 것은 정보전이었다. 백제가 진흥왕이 배신할 것을 알아차렸다면, 신라가 성왕의 연합군 조성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성왕의 관산성행이 신라군에게 유출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비슷한 수준의 적수와 대결할 때는, 전장 이외의 요소들도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49호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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