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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장공시 사태’ 한미약품, 1심 판결 파장 커진다] 4년 만에 나온 판결 ‘지연공시 책임’ 더 넓게 해석… 한미는 항소 

 

법원 “BI와 상호합의 당시부터 공시의무 발생”… 추가소송 여지 열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소재 한미약품 본사 사옥. / 사진:한미약품
2016년 미공개정보를 통한 주식거래와 공매도 문제를 표면에 올린 ‘한미약품 늑장공시 사태’와 관련해 1심 법원이 ‘투자자들의 손해를 한미약품이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국내에서 공시 문제와 관련해 회사 측의 손해배상 책임을 물은 첫 사례라 증권가와 법조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코노미스트] 취재 결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한미약품의 늑장공시 사태에 대해 원고들이 소장에 담은 내용보다 훨씬 폭 넓은 범위의 ‘공시 책임’을 물은 것으로 확인됐다. 법원의 판결대로라면 사태가 발생하기 약 두 달 전부터 한미약품 주식을 매입한 사람들도 민사소송을 제기, 승소할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법조계에선 한미약품이 1심 판결을 받아들여 사태를 매듭짓는 대신 항소를 한 것도 이런 판결이 추가적인 소송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1심 “상호합의 당시부터 공시의무 발생”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6부는 11월 19일 김모씨 등 투자자 120여명이 한미약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총 청구금액 13억8700여만원 중 13억7200여만원을 한미약품이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한미약품 늑장공시 사태는 2016년 9월 발생해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다. 한미약품은 2016년 9월 29일 주식시장 마감 후(오후 4시33분) 표적 항암제(HM95573) 기술을 글로벌 제약업체 제넨텍에 1조원 규모로 수출했다고 공시했다. 이어 다음날인 9월 30일 장 개장 후인 오전 9시29분경 ‘앞서 베링거인겔하임(이하 BI)에 수출한 8500억원대 내성표적폐암 신약(HM61713, 올무티닙) 기술수출 계약이 파기됐다’는 악재성 공시도 냈다. 악재성 공시가 나온 뒤 한미약품의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이로 인해 9월 29일 호재성 공시를 보고 9월 30일 악재성공시 전까지 한미약품 및 모회사 한미사이언스 등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호재공시에도 불구하고 직전 한 달간 일평균 공매도 수량의 4배에 달하는 공매도 물량이 몰려들어 미공개 정보가 유출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검찰은 회사 업무와 관련한 미공개 중요정보를 주식매매에 이용한 혐의로 임직원을 구속하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이런 정황을 근거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한미약품이 ‘늦어도’ 30일 주식시장이 개장하기 전에 악재를 공시했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 소송은 약 4년간 공전만 거듭하다가 최근에서야 1심 판결이 났다. 결과는 원고의 승소였다. 공시 지연의 책임으로 상장회사에게 투자자들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온 건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판결 후 언론을 통해 보도된 것은 이 정도 내용이다. 다만 이번 판결의 의미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게 법조계의 의견이다. 해당 사건의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한미약품의 책임을 단순히 ‘9월 30일 개장 전에 공시하지 않은 것’에 한정짓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에서 (2016년 7월 28일에 맺은) 상호합의는 기술이전계약의 해지 또는 변경 중 한 가지를 예정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이 사건 기술이전계약에 변경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피고회사로서는 공시규정 제45조에 따라 이 사건 상호합의가 이루어졌음을 공시했어야 하는데 이를 제 때 이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기술계약 해지가 확정된 9월 29일 뿐 아니라 앞서 상호합의서를 체결하는 시점부터 공시의무가 발생했다는 게 1심 판결의 요지다.

여기서 말하는 ‘상호합의’란 사태가 발생하기 약 두 달 전인 2016년 7월 28일 한미약품과 BI간 작성한 ‘상호합의서’를 뜻한다. 폐암치료제 분야에서 올무티닙의 경쟁자로 꼽히던 아스트라 제네카의 ‘타그리소’가 2016년 7월 의미 있는 3상 결과를 발표했고, 이에 반해 올무티닙은 2상 임상실험 도중 부작용 사례가 나타나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두 회사가 체결한 상호합의서에는 ‘한미약품이 BI에 60일 내에 새로운 사업 또는 개선된 개발계획 옵션을 제시하고, BI가 이 옵션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90일 이후 기술이전 계약이 종료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와 관련해 재판 과정에서 한미약품 측은 “상호합의는 이 사건 기술이전계약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일부 개발계획을 변경하기 위한 것에 불과해 공시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설령 피고 회사가 위와 같은(BI 측이 요구한) 내용을 담은 옵션을 BI에게 제시해 이 사건 기술이전계약이 유효하게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 자체로써 이 사건 기술계약이 변경되는 것”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상호합의서 4조에 명시된 ‘새로운 사업 제안서 또는 개정된 개발 계획(a new business proposal or a revised Development Plan)’이라는 표현과 5조의 ‘개정 및 재작성된 사용권 계약서(an amended and restated license agreement)’ 라는 표현을 그 근거로 봤다. 재판부는 “아무리 늦어도 호재 공시 전에는 상호합의를 공시했어야 한다고 보는 게 기업공시제도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한미약품 측은 1심 판결에 대해 12월 2일 항소했다. 회사 관계자는 “계약은 마침표가 찍어져야 공시를 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상호합의 이후에 새로운 제안이 오고가는 과정이 있었다”면서 “1심 판결은 공시의 의무를 너무 광범위하게 규정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한미약품은 매출과 R&D가 선순환하는 구조를 탄탄히 구축했고, 혁신신약 창출을 통한 글로벌 제약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내실경영’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원고 변호인 “소송인단 모이면 추가소송 검토”

1심 재판부의 판단은 한미약품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현재 한미약품의 소액주주 손해배상 소송 참여인단은 ‘호재공시 후 악재공시 이전’에 주식을 매수한 사람들로 한정돼 있다. 이번에 1심 판결이 난 사건 외에도 거의 유사한 소송이 두 건 더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되고 있다. 소송 참여자들은 총 370여명이고 청구금액은 모두 44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1심 판결로 인해 이 소송단 규모가 커질 가능성이 나타난 것이다. ‘상호합의서 체결’이 공시 의무대상이라고 본다면 상호합의서 체결(2016년 7월 28일) 후 공시의무가 생긴 그 다음날부터 주식을 소유해 2016년 9월 30일 악재성 공시 이후 매각한 사람들도 민사소송을 제기해 승소할 가능성이 열린 셈이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한 대형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는 “한미약품 입장에선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해 상급법원 판결에서도 패할 경우 현재 손해배상 금액에 지연배상금도 물어야 하는 리스크가 있다”며 “그럼에도 한미약품이 즉각적인 항소에 나선 것은 이번 판결을 근거로 추가적인 소송이 이어질 경우 소송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추가적인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창천의 윤제선 변호사는 “앞서 소송인단을 모집하던 당시부터 호재공시 이전 주식을 보유했던 사람들에게도 문의가 있었다. 최근 1심 판결이 나온 이후에도 일부 문의가 온다. 소송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면 추가적인 민사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최윤신 기자 choi.yoonshin@joongang.co.kr

1563호 (20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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