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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희 테크&라이프] 실리콘밸리를 떠나며 

 

성공과 혁신의 상징 실리콘밸리, 세금·규제·물가 문제 등으로 기업 불만 높아져

▎1. 하이테크 기업이 모여 있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지역의 출·퇴근 시간 고속도로는 항상 정체된다. / 2. 20년 이상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살았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최근 거주지를 텍사스로 옮겼다. / 사진:중앙포토, pixabay
오늘날 실리콘밸리식 혁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세간의 의혹과 불신 속에서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전기차 시장에 도전해 전통의 대기업이 즐비한 자동차 시장을 뒤흔들었다. 로켓을 쏘아 올리고 화성 이주의 꿈을 말한다. 화석 연료를 벗어난 친환경 에너지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혁신 기업가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런데 정작 머스크 자신은 최근 거주지를 텍사스로 옮겼다. 그는 20년 이상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살았고, 테슬라 본사는 실리콘밸리의 중심지 팔로알토에 있다. 캘리포니아 프레몬트에는 테슬라 생산 기지가 있다. 하지만 최근 테슬라는 전기 트럭 ‘사이버 트럭’을 생산할 새 공장을 텍사스주 오스틴 근처에 짓고 있다. 머스크가 경영하는 우주기업 스페이스X도 텍사스에서 로켓을 개발 중이다.

머스크가 실리콘밸리의 현재라면, 실리콘밸리의 뿌리는 HP다. 1938년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패커드가 휴렛 팩커드(현 HP)를 창업한 팔로알토의 차고는 실리콘밸리의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이 HP도 최근 실리콘밸리를 떠났다. 텍사스 휴스턴으로 본사를 옮긴다. 물론 HP 전체가 아니라 HP에서 분사한 기업용 소프트웨어 기업 HPE가 이전하는 것이지만, 실리콘밸리 신화의 첫 장을 쓴 회사의 이탈은 적잖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최근 주요 테크 기업들의 실리콘밸리 탈출이 줄을 잇고 있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 중 하나인 오라클 역시 며칠 전 실리콘밸리 레드우드에 있는 본사를 텍사스 오스틴으로 옮긴다고 밝혔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활용해 정부에 정보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팰런티어는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전했다. 벤처캐피탈 8VC도 실리콘밸리에서 오스틴으로 이전할 계획을 밝혔다. 클라우드 파일 저장 및 공유 서비스 드롭박스 창업자 드류 휴스턴, 팰런티어 창업자 조 론스데일, 빅데이터 분석 기업 스플렁크 CEO 더글러스 메리트도 오스틴으로 이주했다.

이유가 있다. 실리콘밸리의 높은 생활비와 부동산 가격, 각종 세금과 규제 등이 기업을 밀어내는 원동력이다. 스마트폰과 모바일, 클라우드와 인공지능 열풍이 불면서 실리콘밸리는 세계의 인재와 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구글·페이스북·애플 같은 ‘웬만한 나라보다 더 큰’ 빅 테크 기업의 본거지이고, 크고 작은 스타트업의 성장과 투자, 인수합병 스토리가 이어지는 곳이다.

급성장한 테크 기업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직원들을 끝없이 늘인다. 큰 부를 거머쥔 창업자가 늘어나면서 집값도 물가도 치솟았다. 그래서 실리콘밸리 중산층 가정은 2017년 기준 미국 전역의 2배에 가까운 연간 11만8400 달러의 소득을 올린다. 그럼에도 전국 최고 수준의 주거 비용, 늘어난 출퇴근 시간 등으로 삶의 질이 떨어져 갔다. 기술 혁명의 바람에 올라타지 못한 토박이 서민들의 삶이 더 어려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캘리포니아주는 소득세율 13.3%, 법인세 8.4%로 세금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올해도 소득세율을 16.8%로 올리려다 무산되었지만, 언제든 세금이 인상될 가능성이 크다. 우버가 탄생한 곳이지만, 플랫폼 노동자들의 지위를 프리랜서가 아닌 직원으로 규정하는 법을 만들어 우버 같은 플랫폼 기업의 활동을 옥죄는 곳이기도 하다.

머스크는 코로나19를 이유로 캘리포니아주 정부가 공장 봉쇄령을 내리자 크게 반발하며 공장을 이전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텍사스 이주 사실을 밝히며 “캘리포니아는 오랜 시간 동안 이겨왔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안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실리콘밸리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다양성·개방성… 혁신 도시의 조건은

세금과 규제, 물가 등의 문제로 불만이 커지던 가운데 터진 코로나19 팬데믹은 실리콘밸리 이탈 행렬에 불을 붙였다. 본의 아니게 재택근무를 광범위하게 실시해 본 결과, 기업들은 꼭 임대료 비싼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유지하며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격 근무를 하면 직원들이 꼭 회사 가까운 도심에 살아야 할 필요도 없고, 세계 각지의 우수 인재들과 더 쉽게 일할 수도 있다.

이미지 공유 소셜미디어 핀터레스트는 팬데믹을 지나며 굳이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 9000만 달러를 손해 보며 사무실 임대 계약을 해지했다. 부동산 중개 플랫폼 오픈도어도 위약금 520만 달러를 물고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계약을 해지했다.

사실 부유한 창업자들이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다. 텍사스는 소득세를 물리지 않는다. 테슬라 실적이 급상승하면서 머스크는 지난 10월 4번째 스톡옵션 행사 권리를 얻었다. 844만 주를 주당 70 달러에 살 수 있으니, 현재 주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거의 30억 달러, 약 3조원 이상을 벌 수 있다. 텍사스에 이주하면 엄청난 절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여기에 기업들까지 법인세가 없고 규제가 적은 곳을 찾아 실리콘밸리 탈출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물론 실리콘밸리가 한순간에 무너질 가능성은 작다. 여전히 세계의 우수 인재들이 모여 꿈을 좇는 혁신 중심지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 성향의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 창업자와 종사자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 정치인들이 이들 기업의 발목을 잡는 아이러니도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기업들의 실리콘밸리 탈출도 계속될 듯하다.

그렇다면 실리콘밸리를 떠난 기업들이 주로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뉴욕, 텍사스, 플로리라, 콜로라도 등 여러 지역이 있지만 특히 텍사스의 주도 오스틴이 주목받는다. 오스틴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월까지 39개 기업이 오스틴으로 이전했다. 주로 IT 기업들이다.

사실 오스틴은 ‘실리콘 힐스’라 불릴 정도로 이미 IT 분야의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곳이다. 컴퓨터 제조사 델과 반도체 기업 AMD가 오스틴에 있으며, 삼성전자도 오스틴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갖고 있다.

명문 학교인 텍사스주립 오스틴대학을 중심으로 20개가 넘는 대학이 있다. 노동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대졸자일 정도로 우수 인력이 많은 지역이다. ‘힙’한 음악과 테크, 스타트업 분야 최대 축제인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가 열리는 도시이다. 독특하고 다채로운 현지 기업들이 대기업과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급 인력, 문화의 다양성과 개성, 외국인과 외지인에 우호적인 개방적 사회 분위기가 특징인 도시다. 여기에 기업친화적 환경이 맞물려 실리콘밸리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혁신을 이끄는 곳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

※ 필자는 전자신문 기자와 동아사이언스 데일리뉴스팀장을 지냈다. 기술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해가는 모습을 항상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디지털과학 용어 사전]을 지었고, [네트워크전쟁]을 옮겼다.

1566호 (202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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