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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2) 송시열과 허목] ‘예송논쟁’으로 갈라선 두 거목이 존경받는 이유 

 

‘상복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로 격론… 그러나 제거 아닌 경쟁으로 승화

▎국보 제239호 송시열의 초상화.
노(老) 재상이 큰 병을 얻었다. 이런저런 약을 써 봐도 차도가 없자 그는 아들을 불렀다. “내 병은 미수 대감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 너는 지금 대감을 찾아뵙고 내 증상을 말씀드려라. 그러면 처방을 알려주실 거다.” 아들은 의아했다. “아니 미수 대감은 아버지의 정적이 아닙니까? 원수나 다름없는 분께 치료를 부탁하다니요?” “시끄럽다. 냉큼 다녀오지 못할까!”

재상의 아들이 찾아와 상황을 설명하자 미수 대감은 몇 가지를 질문한 후, 약방문을 적어주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이를 열어본 아들은 깜짝 놀랐다. 미수가 나열한 약재에는 비상(砒霜)을 비롯한 극약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분개했다. “이것 보십시오. 이 자가 아버지를 해치려고 이러는 겁니다.” 하지만 재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미수가 낸 처방 그대로 약을 지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한입에 마셔 버렸다. 재상은 어떻게 됐을까? 며칠 지나지 않아 병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정적이 처방한 약재, 극약이 담겨 있었지만…

여기서 재상은 17세기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이다. ‘미수’ 대감은 남인 청남(淸南)의 영수 미수(眉) 허목(1595~1682)을 가리킨다. 정치적, 학문적 견해가 달랐던 두 사람은 매우 극명하게 대립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예송(禮訟)논쟁’이다. 성리학에서 ‘예(禮)’는 “하늘의 이치가 현상으로 드러난 것으로(천리지절문天理之節文), 인간이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법칙(인사지의칙人事之儀則)”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예학을 다룬 유교 경전이 인간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변칙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기존 예의 규칙을 가져와 적용해야 하는데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두고 해석하는 사람마다 서로 의견이 다를 수가 있다. 예송논쟁도 같은 맥락이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효종을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가 논란이 됐다. 예법에 따르면 적장자가 죽었을 때 그의 부모는 삼년복을 입는다. 둘째 아들 이하는 기년복(1년)을 입게 되어 있다.(효종은 장렬왕후의 친자는 아니지만, 법적으로 모자 관계다) 그렇다면 효종은 둘째 아들이고, 조카이자 왕가의 적장손도 살아 있으니 장렬왕후는 기년복만 입으면 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서인과 남인의 견해가 달랐다.

처음 이 문제에 대해 자문한 송시열은 “대행왕(효종)이 비록 왕통을 잇긴 했지만,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음으로 예법상 정통이라고 볼 수 없다”라며 ‘체이부정(體而不正)’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왕위를 이은 것은 인정하지만 가문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데 송시열의 주장은 자칫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에 상황을 우려한 영의정 정태화의 조율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아들이면 무조건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정리된다. 송시열로서는 표면적 이유를 양보하되 실질적 결과를 챙긴 것이다.(현종 즉위년 5월 5일)

그런데 이듬해 3월 16일, 허목이 송시열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조정은 소용돌이에 빠졌다. 허목은 “소현세자가 이미 세상을 뜨고 효종께서 인조대왕의 둘째 장자로서 종묘를 이었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은 예제(禮制)로 보아 의심할 바 없는 일입니다.…효종으로 말하면 대왕대비에게는 적자이며, 또 조계(祖階)를 밟아 왕위에 오른 존엄한 ‘정이자 체’인데, 그의 복제에 대해 ‘체이지만 정이 아니다’라며 3년을 입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일인지 신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효종이 아버지 인조의 왕위를 승계했으니 그가 곧 적장자라는 것이다. 허목은 송시열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상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왕실 역시 사대부의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과 왕실은 왕실만의 특수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한 것이다. 송시열이 전자라면 허목은 후자라 할 수 있다. 아무튼 허목의 주장에 대해 송시열이 반박하고, 다시 허목이 반론하면서 논란은 더욱 심화했다. 양 붕당 예학의 대가들이 치열하게 논전을 벌이니 조야의 관심이 모두 여기에 집중됐고 서인의 송준길, 남인의 윤선도 등이 참전하면서 전선은 확대됐다. 이후 예송논쟁은 서인, 즉 송시열의 승리로 끝나지만, 이는 허목의 주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1674년, 장렬왕후가 며느리이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2차 예송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경쟁자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반면교사로

여기서 송시열과 허목의 주장이 구체적으로 어떠했고, 1~2차 예송논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다룰 주제가 아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끼친 영향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인정한 일화를 소개했지만, 사실 이것은 야사다. 다양한 이야기로 변주되어 전해지는데다 사실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두 사람은 자주 상대방을 비난하고, 심지어 매섭게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목이 “송시열과 더불어 조정에서 나랏일을 볼 때는 서로 친선(親善)하며 뜻을 존중하였다”([미수기언] 중에서)라고 한다. 송시열은 허목을 두고 “그는 애초 목적이 예를 논하는 데에만 있었으므로 나는 그가 비록 이 일을 벌인 사람이지만 다른 의도가 있지 않다고 여겼다.”([송자대전] 중에서)라고 하였다.

비록 상대의 관점과 견해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고 감정적으로도 못마땅해 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은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았다. 서로의 진심을 존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논쟁 과정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자신의 주장을 정밀하게 보완하고 다듬는 계기로 삼았던 것도 이처럼 서로의 실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흔히 정적(政敵)을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제거 대상으로 보거나 경쟁 대상으로 보거나. 전자라면 상대는 나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증오하고 말살해야 할 존재에게 무엇을 배울 것이며,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정적이더라도 필요할 때는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아예 기대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쟁 대상으로 본다면 다르다. 그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서로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노력할 것이며, 내가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강화해 나갈 것이다. 이는 요즘도 다르지 않다. 반대 당을 제거 대상으로 보는 정치와 경쟁 대상으로 보는 정치, 라이벌 기업을 제거 대상으로 보는 경영과 경쟁 대상으로 보는 경영. 어떤 쪽이 실패하고 어떤 쪽이 성공하는지는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67호 (202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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