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이왕 열심히 사는 김에 

 

인생이든 사업이든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하는 게 좋다고들 한다. 정말 장기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보내는 오늘 하루가, 이런 하루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삶이 어떤 이야기로 엮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삼국지연의』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후반까지, 약 백 년에 걸친 중국 대륙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오랜 전란으로 급감한 시기가 있긴 했지만, 당시 중국 대륙의 인구는 대략 50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중에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인물은 1000명이 조금 넘는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아직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인구는 『삼국지』 시대와 얼추 비슷하다. 만약 누군가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등장인물 1000명이 나오는 장엄한 대하소설로 풀어낸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이 꼽힐까. 여간해선 소설에 이름 한 줄 올리기 어려울 테다. 역대 국회의원 수를 합치면 1000명이 넘고, 상장사만 2000개가 넘는 나라니까.

유비, 조조, 손권이 천하를 삼분하기 이전, 중국 대륙에는 여러 군웅이 저마다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엄백호나 도겸처럼 『삼국지연의』에서 하찮게 묘사되는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수만 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소설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절대 그럴 리 없다. 엄백호와 도겸도 나름 당대에 위세를 떨치던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봤을 때 최소한 3선 국회의원이나 상장사 대주주 정도의 지위는 됐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뭐 그래도 우스운 건 우스운 거다. 어쨌든 엄백호는 떠오르던 신예 손책에게 꼼짝없이 당했고, 도겸은 나름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두려워 유비에게 권력을 양도한 사람으로만 남았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남을 수 있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남기지 못한 탓이다.

이런 관점으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가끔 아찔해질 때가 있다. 기를 쓰고 역사 앞에 우스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어서다. 성실하게 노력해서 마침내 성취한 타이틀이 ‘21세기 한국의 엄백호’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데!

인생이든 사업이든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하는 게 좋다고들 한다. 정말 장기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보내는 오늘 하루가, 이런 하루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삶이 어떤 이야기로 엮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 이야기의 테마는 무엇일까? 사랑? 우정? 도전? 욕망? 비극? 명사 앞에 붙는 형용사는 무엇일까? 아름다운? 위대한? 안타까운? 어리석은? 추잡한?

물론 사람이 꼭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왕 열심히 사는 거, 시간이 지나도 향기로울 수 있는 삶을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우리는 튤립 파동이 일었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부유했던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렘브란트가 남긴 빛과 어둠의 마법은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실제로 기억되지 않아도 좋으니,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추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고 나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 윤수영 트레바리 대표

202103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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