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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찬이 만난 부울경 혁신 리더(3) | 김진백 디오 대표이사 부회장 

기술혁신으로 이뤄낸 최고 품질 임플란트 

장진원 기자
디오는 부산과 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임플란트 전문 제조기업이다. 기계제조업으로 창업해 임플란트 시장의 강자로 변신하기까지, 디지털과 글로벌은 김진백 대표가 한시도 놓지 않는 화두다.

임플란트는 치과 치료와 관련된 업종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 가운데 하나다. 인체의 특정 부위 중 하나를 인공적으로 대체하는 만큼, 매우 정밀한 가공과 처리 기술이 요구된다. 구미 선진국들의 전유물이었던 임플란트 제조에 국내 기업이 뛰어들기 시작한 건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다. 그 후 기술력 확보와 품질 향상에 힘써 현재는 대부분 외산 제품을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임플란트 국산화와 생활수준의 향상이 이어지면서 한국은 전 세계에서 임플란트 시술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됐다. 가장 큰 시장은 여전히 미국이지만, 인구당 시술 비중을 보면 한국이 미국을 절대적으로 앞서는 수준이다. 잘 갖춰진 건강보험 체계와 높은 의료 수준까지 더해진 결과다.

임플란트 시술이 보편화되면서 관련 업체 간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 됐다. 품질, 기술력, 가격 등이 제조업체마다 일정 수준에 오른 상황이다 보니 사용 환경의 편리함이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으로 떠올랐다. 단순히 시술 성공률이나 품질, 가격경쟁력을 판단하던 시대에서 나아가 더 정확하고 안전한 시술을 위한 솔루션이 업체의 경쟁력으로 떠오른 것이다.

부산·경남 지역을 거점으로 한 임플란트 제조기업 디오는 임플란트 시장의 경쟁환경을 기술혁신으로 돌파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탄탄한 제품 경쟁력을 바탕으로 IT와 디지털을 접목해 시장을 선도하는 전략 덕분이다.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가 부울경 산업을 이끄는 혁신 리더인 김진백 디오 대표이사를 만났다. 임플란트 생산 규모와 제품 경쟁력뿐만 아니라 UV 임플란트, 디오나비 임플란트 시술 시스템 등 디지털 솔루션으로 환자와 시장의 니즈를 맞춘 혁신 선도 기업가다.

1984년 형님이신 김진철 회장께서 34세 나이에 창업하셨다. 대표께서 함께하신 건 언제부터였나.

1986년 무렵이다. 당시 서울 제일제당에서 근무하다 서른두 살에 형님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는 임플란트 제조사가 아니라 자동포장기계를 만들어 파는 기계업종이었다. 우리나라에 임플란트 제조사가 처음 등장한 건 1989년 무렵부터다. 사실 아버님이 사업하다 7번이나 실패를 하셨다. 어릴 때부터 어렵게 공부했다. 형님이나 저나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게 사업을 시작한 첫 번째 목표였다. 당시 제일제당 인사과에서 근무했는데,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일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도 보람 있었지만, 작은 기업이라도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말 좋은 기업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지금도 변하지 않은 기업가로서의 꿈이다.

창업 이후 2000년대까지는 포장·주차 설비 등을 제조했다.


일종의 공장자동화 설비다. 대한민국은 제조업 기반이니 제대로 된 제품만 만들면 어떤 공장에도 팔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 대 초로 넘어오면서 각광받은 산업이 제조공장 자동화였다. 당시만 해도 자동포장기계는 모두 수입산이었는 데 우리가 국산화에 나섰다. 삼성·현대·대우 등 웬만한 대기업은 물론이고 여러 섬유 회사, 심지어 참기름 회사에도 납품했다. 때마침 국내 자동차산업이 엄청난 발전을 이뤄갔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차량 대수도 크게 늘더라. 일본 출장을 다녀오신 형님께서 “일본에 가보니 이상한 주차장들이 있더라”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타워형 주차장 같은 주차 전용 설비였다. 그 길로 나리타공항으로 가서 벤치마킹에 나섰다. 만들어보니 되더라. 그렇게 사업 영역을 넓혔다.

전통 제조업체가 완전히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의사 출신들이 창업한 경쟁사들과 달리 의학적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과감하게 사업 방향을 전환한 배경이 궁금하다.

2000년 6월 코스닥시장에 상장할 당시만 해도 동서기계주식회사, DSI가 사명이었다. 임플란트 사업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2002년 무렵부터다. 국내에서 임플란트 사업이 시작된 초기였는데, 당시 제일합금 등 관련업계 지인들이 “사업성이 큰 분야”라며 신사업을 권했다. 그때만 해도 임플란트는 인체를 대신해 장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공물이었다. 치아 수만 해도 스무 개가 넘지 않나. 더욱이 선진국에선 이미 시장의 성장이 검증된 상황이었다. 우리가 만지는 기계부품이 380가지에 달했는데, 그에 비하면 제조 공정이나 부품도 훨씬 단순했다. 2002년 들어 임플란트 사업을 위해 사내 벤처를 세웠다. 3년여에 걸쳐 인허가를 받고 개발도 끝냈다. 당시 사내벤처 이름이 바로 디오였다. 이후 DSI가 디오를 흡수했다.

요즘 활발한 사내벤처나 스핀오프 개념을 당시에 추진했다니 대단하다.

일부에선 DSI가 디오를 흡수합병했다고 아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디오 지분 50%를 DSI가, 나머지는 회장께서 이미 가지고 계셨다. 개발이 완료된 후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직을 갖춰서 판매에 나섰다.

창업 후 양산 지역에서 부산으로 이전한 계기도 궁금하다.

2007년에 큰 홍수가 났다. 양산공장도 홍수와 산사태로 피해가 컸다. 물이 잘 빠지는 평지에 제조공정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이때 알았다. 더욱이 임플란트는 꼭 대형 제조설비가 갖춰진 공단 안에서만 해야 하는 아이템도 아니다. 새 공장 부지를 알아보던 차에 마침 부산시의 기업유치 지원을 알게 됐다. 요즘 말로 하면 리쇼어링이다. 시 담당 공무원들에게 연락해 문의하니 “주차장 만드는 회사 아닌가, 첨단산업이어야 한다”고 했다. 직접 만나 임플란트에 대해 설명해주니 깜짝 놀라더라. 이튿날 바로 부산시장을 만났다. “뭘 도와줘야 하느냐”고 묻기에 센텀시티 땅을 달라고 했다. 외국자본 유치를 위한 땅이 있는 걸로 아는데, 우리 같은 기업이 진출하면 고용 창출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설득했다. 그렇게 외국인유치단지 규제가 풀렸고, 그 덕에 디오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입찰에 참여해 자리를 잡았다. 2007년 10월에 착공해 2008년 8월에 입주했다. 당시 입주한 기업 중 제조업체는 우리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시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과감한 사업 전환은 결국 산업의 틀을 읽는 눈이 있어야 한다. 창업 당시부터 그런 DNA를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2008년 들어선 사명을 아예 디오로 바꾸었다. 기존 기계사업도 완전히 정리했다. 아마 그대로 기계사업을 이어왔다면 1000억대 매출은 가능했을 거다. 현재 디오 매출이 1500억원 수준인데, 35년 연혁에 비하면 기업 규모가 크진 않다. 업력만 보면 매출이 1조원 정도는 돼야 하는데.(웃음) 하지만 레드오션화하는 시장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 숙고하되 결정을 내리면 과감하게 피벗팅하는 것이 기업의 숙명이다.

국내 임플란트 경쟁사는 치과의사들이 창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디오는 의료계 네트워크도 부족했을 것 같다. 당연히 시장 안착에도 어려움이 컸겠다.

경쟁사인 오스템, 덴티움, 메가젠 등이 모두 의사 출신들이 창업한 경우다. 처음엔 동문들 후광만 입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기술과 기능을 접목하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임플란트는 정밀한 장비로 깎아내는 매우 민감한 공정이다. 더 어려운 건 의학적 임상이 필수라는 거다. 이건 의사들의 영역 아닌가. 개발실 엔지니어들이 도면을 그리고 나면, 의사들은 이걸로는 임상이 어렵다고 하고, 의사들의 의견을 전달하면 현장에선 생산이 어렵다는 피드백이 돌아오곤 했다. 이를 컨트롤하는 일이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결국 CEO가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10년 넘게 하루 2시간 이상 의사와 함께 공부했다. 창업 초기 치과에 영업하러 가면 의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신생업체라 무시당하기도 일쑤여서 의사들과 앉아 있는 시간이 정말 싫었다. 결국 공부로 극복했다.

2010년부터 임플란트 시장의 디지털화라는 화두를 던졌다. 국내외에서 후발 주자로서 디오가 가장 고민하고 실행했던 것은 무엇인가.


후발 주자는 당연히 시장 안착에 제약이 따르고 핸디캡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나름의 방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고, 그게 바로 디지털이다. 임플란트 사업 초기에는 표준화된 방식이 없어 의사들이 저마다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주길 원했다. 그러니 온갖 종류의 임플란트가 다 있었다. 큰 병원에 가봐도 “나는 임플란트 심는 데 5분 걸렸다”고 자랑하는 의사가 많았다. 시술이 개인기에 달려 있었다는 뜻이다. 어떤 의사는 사진을 내밀면서 “오늘 임플란트 10개 심었다, 얼마나 잘됐느냐”면서 자랑스레 보여주더라. 결국 표준화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20여 년간 업계와 의료계가 노력해온 덕에 모든 임플란트 시술이 표준화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기업이 “임상에 이런 케이스가 좋다”고 제안을 하는 수준이 됐다.

임플란트 시술의 디지털화가 디오나비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됐다.

한국은 인구당 임플란트 시술이 글로벌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이런 시장에서 디지털전환을 이뤄낸 게 결국 우리의 전략 상품이자 효자 상품이 됐다. 디오나비는 디오만의 디지털 솔루션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구강 전체를 CT로 촬영하면 뼈 상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 다음 3D 오럴 스캔으로 구강 안의 상태를 확인한다. 이를 조합해 뼈, 신경조직, 치아 크기 등을 파악하고, 어떻게 임플란트를 심을지 디자인한다. 주변 치아의 각도와 깊이, 식립 후 시뮬레이션까지 감안해 플래닝한다. 이를 통해 잇몸 절개를 최대한 줄이는 최소침습 시술도 가능해졌다. 의사 개인기에 달려 있던 임플란트 시술을 가이드만 따라가면 초보 의사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표준화한 것이다. 환자 입장에서도 출혈이 적고 회복이 빠르니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과정이 디지털로 이루어지는데, 그게 바로 디오나비라는 기술이다.

어떤 제품과 시장이든 결국 차별화가 그 기업의 전략과 강점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선행주자와 똑같은 무기를 가지고 전장에 나가면, 상대는 이미 고지를 점령한 후다. 이를 따라잡으려면 3배의 힘을 써야 하는데, 실제로는 3분의 1도 안 될 때가 많다. 그렇다면 전쟁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경쟁사들이 우리보다 훨씬 많은 고객과 임상 데이터를 축적해놓은 상황이라면, 결국 우리가 상대보다 더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디오는 창업 당시부터 쌓아온 기계 제조 역량이 강했다. 당시만 해도 치과용 자재는 철공소 수준이었다. 석고로 본을 뜨고 주조해서 제작하는 방식이었는데 이걸 디지털화하면 승산이 있겠다 판단했다. 해마다 독일에서 ‘국제치과기자재전시회(IDS, International Dental Show)’가 열리는데, 마침 2010년 아이테로(I-TERO)라는 3D 오럴스캐너의 한국 판권을 우리가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치과 시장에 디지털이라는 개념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임플란트 시술도 얼마든지 디지털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기구 개발과 소프트웨어 개발·도입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 끝에 임플란트 시술의 디지털화를 갖춰나갔다. 제조공정에 3D 프린팅을 도입하는 등 첨단화에 매진했다.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시장의 특성도 디지털과 딱 맞아떨어졌다.

디지털과 더불어 글로벌 진출도 디오의 주요 사업 전략이다. 현재 70여 개국에 진출했다고 들었다.

모든 곳에서 성공한 건 아니다. 실패한 나라도 많다. 브라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유럽에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제는 어떤 시장에 가야 성공하고, 또 어떻게 해야 확률을 높일지 알게 됐다. 10년간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셈이다. 디오의 글로벌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시장 규모가 가장 큰 미국을 먼저 공략하고, 그다음은 미래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르고 수요 또한 엄청나게 늘고 있는 중국이다. 마지막이 바로 한국 시장이다. 한국은 1인당 임플란트 시술로는 독보적인 1위다. 절대적 국가별 시장 규모만 봐도 글로벌 1등이 미국, 우리가 다음 레벨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2018년에는 미국 임플란트 교육기관인 화이트캡을 인수했다.

미국 의사들을 대상으로 영업과 교육을 하기 위해 찾았는데, 우리 제품을 소개했더니 역으로 인수를 제안하더라. 연간 100억원 수준의 매출을 확보하게 됐다. 더 중요한 건 가장 큰 시장인 미국 안에 우리만의 교육기관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미국 대형 업체들과 계약하려면, 현지 의사들을 상대로 디오나비의 프로토콜 등 기본 원리 교육과 실습을 병행해야 한다. 한국 치과의사들은 10명 중 9명이 임플란트 시술을 할 수 있지만, 미국은 아직 2~3명만 임플란트 시술이 가능한 수준이다. 임플란트를 식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의사가 미국 내에 많아져야 그만큼 새로운 수익 창출이 가능해진다. 교육을 통해 시장을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디지털화, 글로벌시장 확대 등을 통한 디오의 중장기 비전을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2025년 매출 5000억원 달성이 목표다. 주력 시장은 역시 미국과 중국이다. 또 기업하는 사람에겐 의무가 있다. 우리 같은 상장사는 주주에게 보답해야 한다. 디오의 소액주주만 해도 2만 명이 넘는다. 회사 실적이 좋아지고 주가가 오르는 건 그만큼 기업가치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이를 향유하는 게 주주의 권리이고 기업하는 사람의 의무다.

사내에서 추진 중인 프로그램도 있다. 2025년까지 임직원들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해나갈 계획이다. 내가 다니는 직장을 유토피아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뜻에서 ‘디오유토피아 5개년 계획’을 세웠다. 2년 일하면 1주일 휴가를 보장하는 리프레시 휴가, 자녀 학자금 지원 등이다. 기업은 국가를 대신해 출산과 양육을 책임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신혼정착금 등 다양한 복리후생 제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샐러리맨에게 가장 중요한 급여 인상은 기본이다.

많은 기업을 만나봤지만, 전통 제조업체가 완벽한 피벗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정말 놀라운 사례다.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기업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한다.

개척자정신, 기업가정신을 잊지 않아야 한다. 변화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걱정만 하면 한 발도 못 뗀다. 디오는 지금도 변신 중이다. 임플란트를 기본으로 3D 프린팅, 관련 소프트웨어를 계속 개발하고 있다. 미래의 꿈을 위해서다. 기업가정신은 결국 도전정신과 같은 말이다. 뜻만 있다고 되겠나. 당장 실행하는 자가 결국 승자가 된다.

※ 최영찬 대표는… 선박과 플랜트 분야 제조업을 영위하는 선보공업의 차세대 경영인이다. 제조업체들이 스타트업 및 투자 생태계와 어떻게 공존하고 미래 사업을 만들지 고민하면서 선보엔젤파트너스와 기업 연합형 CVC인 라이트하우스를 창업했다. 200여 개 스타트업에 투자했으며, 컴퍼니빌딩 프로젝트와 기존 포트폴리오 기업을 공동경영 형태로 성장시키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창업한 2개 법인과 별도로 3개 프로젝트의 공동대표로도 활동하면서 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 정리=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최재승 객원기자

202207호 (202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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