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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0)] 한글을 무시한 연산군, 황음무도에 빠지다 

단순한 한문 숭상 수준 넘어 노골적으로 사용 금지령 내려… 최고 권력자라도 욕망만 좇으면 결국 비참한 말로 피할 수 없어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연산군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주였으나 자신의 그릇된 욕망만 좇다가 중종반정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영화 <간신>에서 연산군 역을 맡은 김강우.
한글은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됐다. 이름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가 한글이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반포 당시부터 ‘백성의 글’이라는 뜻에서 ‘언문(諺文)’ 또는 ‘언서(諺書)’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당시 한문을 숭상하던 양반들은 한문이야말로 진정한 문자이고 한글은 천한 백성들이나 쓰는 글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한문을 진서(眞書), 한글을 언문(諺文)이라 왜곡해 썼다. 양반들에게 언문은 진짜 문자가 아닌 가짜 문자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은 주로 여성과 스님들 사이에서 유행해 ‘암클’ 또는 ‘중글’이라 불렸다. ‘암클’이란 ‘암놈들의 글’이란 뜻으로서 한글을 사용하는 여성들이 짐승으로까지 비하된 결과이며, ‘중글’ 역시 ‘중놈들의 글’이란 뜻으로 스님들에 대한 극단적인 비하가 함축돼 있었다.

이런 상항에서 언문은 ‘백성의 글’에서 ‘상글’ 즉 ‘쌍놈들의 글’로 천시돼 양반들에서는 아예 기피 대상이 돼버렸다. 이런 사실들은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 발전을 가로막은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양반들의 한문 숭상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글을 탄압한 최고의 군주를 꼽으라면 단연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심정적인 면에서의 한문 숭상을 넘어 노골적으로 한글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글금지령을 둘러싼 연산군의 행태에는 연산군이 어느 정도의 폭군인지가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연산군이 한글금지령을 내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동왕(同王) 10년(1504) 7월 10일에 있었던 투서였다. 이날 새벽 왕의 처남인 신수영의 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제용감에서 일하는 이규가 보내서 왔다며 서찰을 전하고 사라졌다. 신수영이 펴보니 그 안에는 언문 즉 한글로 된 세 장의 익명서가 있었다.

조선시대 익명서는 내용에 관계없이 폐기처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름을 숨긴 작자의 흉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수영은 너무 심각한 내용이라 판단하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익명서를 본 연산군 역시 크게 놀랐다. 왕은 즉시 명령을 내려 이규에게 “네가 무슨 글을 신수영의 집에 통하였느냐”라고 묻게 했다. 이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결국 누군가가 이규를 빙자해 투서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폐기처분하고 무시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일을 크게 벌였다.

먼저 왕은 명령을 내려 도성의 각 문을 닫고, 출입을 금하게 하고는 한글 익명서를 신하들에게 내렸다. 반드시 주모자를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신하들이 받아본 익명서 3장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쓰였는데 사람 이름만 한자였다.

익명서의 첫 표면에는 무명장(無名狀)이라 적혀 있었다. 익명서 3장의 각 내용이 실록에 수록돼 있는데 핵심은 개금·덕금·고온지·조방 등 의녀들이 연산군에 대해 대역무도한 말을 했으니 엄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첫째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임금의 황음무도를 강하게 비판한 ‘한글 익명서’


▎연산군은 정사(政事)는 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 추구했다.
“개금(介今)·덕금(德今)·고온지(古溫知) 등이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실 때, 개금이 말하기를 ‘옛 임금은 난시(亂時)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파리머리 끊듯 죽이는가? 아아! 어느 때나 이를 분별할까?’ 했고, 덕금은 말하기를 ‘주상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으랴?’ 했다. 이외에도 그들의 말이 몹시 심했으나 이루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이런 계집을 일찍이 징계해 바로잡지 않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글을 던져버리는 자가 있으면 내가 ‘개금을 감싸려 한다’고 상언(上言)하리니 반드시 화를 입으리라.”[<연산군일기> 권 54 10년(1504) 7월 19일]

위에 의하면 익명서에서 발언 주체는 의녀 개금과 덕금이었다. 먼저 의녀 개금이 연산군의 무차별한 신하살육을 비판했는데 이는 갑자사화에 대한 것이었다. 이어서 의녀 덕금 역시 같은 비판을 했는데 그 비판은 개금보다 훨씬 과격했다. 즉 덕금은 “주상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으랴?”라고 했는데 머지않아 왕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둘째 장의 익명서 내용은 “옛 임금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임금은 여색에 대해 분별하는 바가 없어 이제 또한 여기(女妓), 의녀, 현수(絃首, 여자 무당)들을 모두 다 조사해 궁중에 들이려 하니 우리도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이었으며, 셋째 장은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폐비 윤씨의 생모인 신씨 때문이니 신씨의 친족을 몰살시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한글 익명서는 연산군의 갑자사화와 황음무도에 대한 비판이었다.

당시는 갑자사화 직후로 연산군은 폭주하고 있었다. 왕의 위력에 눌린 양반들은 비판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조선팔도에서 궁녀들을 마구 뽑아 들였다. 누구의 비판도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황음무도한 짓을 행하는 왕이야말로 폭군이었다. 당시 백성들에게 왕은 왕답지 못했고 그런 왕을 비판하지 못하는 양반들 역시 양반 답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백성들의 마음이 의녀 개금과 덕금의 입을 통해 드러났을 뿐이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유는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이런 젼차로 어린백성이 니르고져 홇베 이셔도 마참내 제뜨들 시러펴디 못할 노미 하니라’라는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가정윤리는 물론 종교윤리까지 파괴된 시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사적 362호 연산군 부부의 묘(사진 위쪽). 이곳에 딸과 사위의 묘도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글을 읽고 쓰게 된 백성들은 한글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궁중 여성들이 한글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을 표시하는 일이 많았다. 예컨대 궁녀가 왕의 실정이나 궁중 안의 비행을 폭로하는 한글 익명서를 투서하거나, 왕비나 대비 등이 정치현실에 개입하는 한글 명령서를 반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할 때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한글 명령서를 이용했다. 이는 한글이 유행하면서 궁중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정치의식이 고양됐음을 알려준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이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양반은 물론 백성의 여론에도 더더욱 귀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반은 물론 백성들의 여론도 폭력적으로 억압하려고만 했다. 특히 자신의 황음무도가 심해질수록 더더욱 그렇게 하려고 했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본격적으로 황음무도하게 된 계기는 정업원의 여승들을 강간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연산군 9년(1503) 6월 어느 날인가, 왕은 환관 대여섯 명에게 몽둥이를 들려 정업원으로 달려갔다. 술에 취해 있던 연산군은 늙고 못생긴 비구니는 내쫓고 젊고 예쁜 비구니 7~8명만 남겨 간음했다.

당시 연산군이 간음했다고 하는 정업원의 비구니들은 사실상 선왕의 후궁 또는 왕족여성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정업원은 태조 이성계 이래로 왕의 후궁들 또는 왕족여성들이 출가해 여생을 보내던 절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건국 이후 정업원의 초대 주지가 된 혜빈 이씨는 공민왕의 후궁이었다. 또한 1차 왕자의 난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 즉 세자 방석의 부인 심 씨,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 등도 정업원의 비구니가 됐다.

이후에도 수많은 후궁과 왕족 여성이 정업원의 비구니가 됐다. 정업원은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쯤에 위치해 궁궐과도 가까웠으며 왕실로부터의 지원도 많았기에 후궁 또는 왕족여성들이 출가하기에 유리했다. 이런 정업원의 비구니들을 강간했으니 연산군은 가정윤리는 물론 종교윤리도 파괴한 왕이라 할만 했다.

그날 이후 연산군은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황음무도에 빠져들었다. 9월에는 예조판서 이세좌가 양로연 중에 왕의 옷에다 술을 쏟았다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을 빌미로 이세좌를 유배에 처했다.

아울러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은 이세좌의 처벌을 요청하지 않았다 해 강등시켜버렸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의 시작이었다. 11월 20일에는 신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심하게 술주정을 했는데 다음날 전혀 기억하지도 못했다. 당시 연산군은 자신의 주사에 대해 몹시 자책하며 반성했지만 고치지 못했다. 도리어 시간이 흐를수록 술주정은 악화됐으며 ‘필름’도 자주 끊겼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연산군은 자신의 황음무도가 밖으로 누설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됐다. 연산군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환관들에게 ‘입은 화의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閉口深藏舌)/ 몸이 편안해 어디서나 굳건하리라(安身處處牢)’는 글귀가 새겨진 패를 차게 했는데, 그때가 동왕 10년(1504) 3월 13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연산군 10년(1504) 3월 20일의 한 사건을 계기로 더더욱 악화됐다. 그날 저녁 연산군은 임숭재의 집에 행차했다. 임숭재는 성종의 사위였으므로 연산군에게는 매부였다. 임숭재는 연산군에게 술대접을 하던 중 자신의 아버지 임사홍을 소개했다.

연산군을 만난 임사홍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연산군이 까닭을 묻자 임사홍은 “폐비한 일이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이는 실로 엄 숙의(淑儀)와 정 소용(昭容)이 모함하고 이세좌와 윤필상 등이 성사시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술이 잔뜩 취한 상태로 궁궐로 돌아왔다. 연산군은 곧바로 엄 숙의와 정 소용 그리고 그녀들의 아들을 불러들였다. 연산군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을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인수대비에게 달려가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따지며 불손한 말을 수없이 했다. 그때는 밤 삼경(三更)이 넘은 한밤중이었다. 그날 밤 연산군의 행동은 가히 미친 짓이라 할 만했다. 다음날부터는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이 숙청됐다. 이 사건이 이른바 갑자사화였다.

범인이 드러나지 않자 한글을 탄압하는데


▎한국화가 우승우가 그린 연산군의 범 사냥 도(圖). 연산군은 사냥 때도 궁녀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고 기록돼 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더욱 황음무도에 빠져들었다. 왕은 기생은 물론 의녀, 여자 무당 등을 색출해 궁에 들였다. 이런 와중에 의녀인 개금과 덕금 등도 뽑혀 들어갈까 두려워하며 연산군을 비판했고 그것이 연산군 10년(1504) 7월 19일의 익명서 투서로 연결됐던 것이다.

연산군은 개금·덕금 등을 체포하는 한편 익명서를 투서한 범인도 꼭 색출해내려 했다. 그러기 위해 막대한 재물과 고위관직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여기에서 나아가 서울 시민들 중 한글을 아는 사람들을 모두 소집해 한글을 쓰게 한 후 익명서 필적과 대조하기도 했다.

그래도 범인이 드러나지 않자 조선팔도에서 한글을 아는 사람들을 모두 조사해 한글 필적을 써 올리게 했다. 이와 함께 ‘언문은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고, 배운 자는 쓰지 못하게 하라. 언문을 아는 사람을 모두 조사해 보고하고, 만약 고하지 않는 경우 이웃 사람까지 처벌하라’는 한글금지령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금지령 이후 한글을 쓰다 잡히면 참형을 당하고, 다른 사람이 한글을 쓴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으면 곤장 100대의 엄벌을 받았다. 또 한글 편지나 한글 서책을 소지하다가 적발돼도 엄중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에 따라 한글은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한글을 이용한 백성의 비판도 표면적으로 봐서는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양반과 백성들의 여론을 억압한 연산군은 거칠 것 없이 황음무도에 빠져들었다. 연산군 10년(1504) 10월에 왕은 장악원 기생을 기왕의 150명에서 300명으로, 또 12월에는 1천 명으로 증원했다.

연산군은 장악원 기생들에게 특별히 처용무를 가르치도록 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흥청(興淸)’과 ‘운평(運平)’이라는 이름을 작명하기도 했다. 흥청이란 ‘사예(邪穢)를 깨끗이 씻는다’는 뜻이고 운평이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흥청이란 부정한 것을 씻고 청정한 것을 부흥시키겠다는 의도이고, 운평은 그렇게 해서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의도라고 하겠다. 처음에 흥청은 300명, 운평은 700명이 정원이었다.

연산군은 흥청을 입궁시켜 궁궐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흥청 2명에게 방자(房子) 1명을 주고 또 솥단지·식기·밥상·요강·거울·옷가지 등등 살림살이도 마련해줬다. 사실상 흥청은 궁중에서 생활하는 후궁 또는 궁녀나 마찬가지였다. 연산군 스스로 ‘흥청이 이미 궁궐에 들어왔으니 곧 이는 궁녀이다. 앞으로 흥청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엄히 논죄하라’고 해 흥청을 궁녀로 간주했다.

흥청은 가무는 물론 얼굴과 몸매도 뛰어나야 했다. 연산군이 ‘음악이란 나쁘고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며 또한 시름을 풀기 위한 것인데, 가무만 잘하고 얼굴이 못생기면 시름을 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시름을 일으킨다’고 해 실력과 미모를 모두 요구했기 때문이다. 흥청은 장악원에서 1차 심사를 받은 후 입궁하여 다시 연산군의 심사를 받았다. 연산군은 흥청의 진면목을 알아보기 위해 심사받을 때 화장을 지운 맨얼굴로 받도록 했다.

이렇게 입궁한 흥청은 최초 300명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500여 명으로 다시 1천여 명, 2천여 명으로 폭증했다. 연산군 12년(1506) 3월 27일자 기사에는 ‘흥청 1만 명에게 지급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로 보면 연산군은 흥청을 1만 명까지 확대할 계획이었던 듯하다.

기생 남편의 머리를 잘라 은쟁반에 담은 폭군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경내에 있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무덤. 연산군이 회릉으로 추숭(追崇)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회묘로 강등됐다
연산군은 입궁한 흥청을 다시 천과흥청(天科興淸), 반천과흥청(半天科興淸), 지과흥청(地科興淸)의 세과로 나눴다. 천과흥청은 연산군과 잠자리를 함께한 흥청이고, 반천과흥청은 잠자리를 함께했지만 흡족하지 못한 흥청이며, 지과흥청은 아직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흥청이었다. 이로 보면 흥청은 사실상의 후궁 또는 예비 후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연산군은 흥청을 후궁으로 인정해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라는 관청을 만들어 관리하기도 했다. 두탕호청사의 의미는 ‘방탕을 막고 흥청을 보호하는 관청’이었다.

수천 명의 흥청이 갑자기 연산군의 후궁이 되면서 무수한 문제가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흥청이 처녀가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흥청에 뽑힌 기생들은 가무는 물론 얼굴과 몸매 모두 뛰어난 여인들이었다.

흥청은 출신으로 치면 지방의 관기 또는 한양의 관기였다. 흥청으로 뽑힐 정도의 실력과 미모를 갖춘 관기가 처녀로 혼자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흥청은 이미 남편 또는 아이가 있었다.

연산군은 흥청을 후궁화하면서 기왕의 남편 또는 애인과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과도 떼어놓았다. 흥청은 근본적으로 관기이고 관기는 왕이 최종 임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연산군은 흥청이 궐밖의 옛 애인을 생각하거나 또는 몰래 출궁해 임신하는 일을 엄금했다. 흥청이 옛 애인을 그리워하면 잔인무도한 벌을 내리곤 했다. 야사에는 이런 내용이 전한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기생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그 기생이 친구에게 ‘지난 밤 꿈에 예전 주인을 보았으니 매우 괴상한 일이구나’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연산군은 즉시 작은 쪽지에 무엇을 써서 밖에 내보냈다. 조금 뒤에 궁녀가 은쟁반 하나를 받들어 오자 그 기생에게 열어보게 했다. 그것은 곧 그 남편의 머리였다. 그 기생까지 아울러 죽였다.”[<연려실기술> 연산조 고사본말]

연산군은 흥청뿐만 아니라 입궁하지 않은 장악원 기생들까지도 독점하려고 했다. 흥청 이외에 장악원에서 관리한 운평·속홍·채홍·계평·흡려 등에도 각각 1천 명 내외의 기생이 소속됐으므로 이들을 모두 합하면 5천~6천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흥청과 달리 입궁하지 않고 궐 밖에서 생활했다.

그런데도 연산군은 이들마저도 남편이나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명했다. 결국 운평·속홍 등은 궁녀화됐던 것이다. 연산군이 이들을 궁녀화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장차 흥청으로 진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운평·속홍 등은 후궁이 될 후보자들이었던 셈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찾자면 워낙 비밀을 좋아한 연산군 자신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된 그 어떤 내용도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운평·속홍 등은 아직 입궁해 후궁이 된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궁중잔치에 참여했다. 또 흥청 등으로부터 연산군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운평·속홍 등은 연산군의 사생활에 대하여 이것저것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운평·속홍 등이 자유로이 생활한다면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남편이나 친인척 또는 친구들에게 발설할 수도 있었다.

연산군은 그렇게 못하도록 운평·속홍 등이 흥청과 만나는 것을 엄금했다. 이에서 나아가 남편들과도 만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혹 운평이나 속홍 등이 부모형제에게 연산군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가 적발되면 처참하게 죽였다. 말한 사람은 물론 들은 사람도 그렇게 죽였다.

연산군이 후궁화시킨 흥청은 2천~3천 명에 이르렀으며 궁녀화시킨 운평·속홍 등은 5천~6천 명에 이르렀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근 1만 명을 헤아렸다. 하지만 연산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흥청 자체를 1만 명으로 확대시키려 했다. 이렇게 많은 기생을 후궁과 궁녀로 만들다 보니 기존의 관기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절대권력,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리다

그래서 연산군은 이른바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전국에 파견해 출신에 관계없이 젊고 예쁜 여성들은 모조리 한양으로 데려와 기생으로 만들었다. 이대로 가면 조선팔도의 젊고 예쁜 여인들은 모두 기생이 돼 연산군의 궁녀나 후궁이 될 판이었다.

연산군은 왕이 모든 백성과 국토의 주인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젊은 여인들을 긁어 모았다. 이런 면에서 연산군은 명실상부 한국의 5천 년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절대왕권을 실현한 왕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절대왕권은 연산군 12년(1506) 9월 1일 한밤중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렸다. 폭력으로 억압되었던 양반과 백성들의 여론이 폭력으로 분출했던 것이다.

연산군의 행태는 인간이란 끝을 모르는 욕망 덩어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욕망만 행사하며 다른 사람의 욕망을 폭력으로 누르고 말도 못하게 하다가는 패가망신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과거 동양에서 군주제가 유지되던 시절에는 제왕의 황음무도를 다루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에서는 ‘황음지계(荒淫之戒)’를 제시한다. ‘황음무도를 경계한다’는 <대학연의>의 가르침은 너무 단순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 단순한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제왕은 너나없이 패가망신했던 역사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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