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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기업] 200년 기업 향해 가는 동화약품 

125년 ‘최고(最古)’ 제약사, 제약업계 역사 이어간다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도우며 민족 기업으로 자리매김
‘서울연통부’ 겸 순화동 창업터 57년 만에 재건축 진행


▎동화약품의 모태인 서울 순화동 동화약방 입구. / 사진:동화약품
동화약품은 한국 최초 제약회사다. 국내 유일의 일업백년(一業百年) 제약사이기도 하다.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정신 아래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동화약품은 서울시 중구 순화동 소재 현 사옥을 철거하고 9월 중 신사옥을 착공해 오는 2024년 12월 준공할 예정이다.

125년의 역사를 지닌 동화약품은 1897년 서울 순화동 5번지(서울시 중구 서소문로9길 14) 한옥에서 창업한 ‘동화약방’이 모태다. 1966년 3층 건물을 신축해 공장과 본사로 사용했다. 동화약품은 이곳에서 현재의 소비자에게 친숙한 ‘까스 활명수’를 처음 생산했다. 1986년 본사를 4층으로 증축한 이후 57년 만에 재건축이 결정됐다.

동화약품은 새로 짓는 사옥 2층을 기부채납해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신사옥은 지하 5층~지상 16층 규모(연면적 1만5818㎡, 4785평)다. 설계는 간삼건축사무소, 건설은 CJ대한통운 건설부문이 맡았다.

동화약품의 역사는 곧 한국 제약 산업의 역사다. 한국 제약 산업은 1897년 궁중 선전관 민병호 선생이 국내 최초 양약인 ‘활명수’를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민병호 선생은 아들 민강 선생과 함께 궁중 비방에 서양 양약 비법을 더해 만든 활명수의 대중화를 위해 동화약방을 창업했다. 활명수가 개발된 당시에는 급체, 토사곽란(토하고 설사하면서 배가 아픈병) 등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활명수는 그 의미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살릴 活, 생명 命, 물 水)’로 불리며 만병통치약 대접을 받았다.


▎1986년 증축한 동화약품 본사. / 사진:동화약품
동화약품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동화약품 본사는 1919년 3·1운동 직후 체계화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 간 비밀연락망인 ‘서울연통부’가 자리하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 19대 왕 숙종의 왕비 인현황후의 생가 터이기도 하다. 1919년 당시 동화약방 사장이던 민강 선생은 국내외 연락을 담당하고 정보를 수집했으며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으로 독립 자금을 조달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행정 책임자였다.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이동 시 활명수를 지참해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서울시는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항일 의거 유적지로 선정한 동화약품 사옥 부지에 ‘서울연통부 기념비’ 건립을 확정했다. 이듬해 광복절 제막한 기념비에는 서울연통부의 활약상과 설립 의의 등이 상세히 포함됐다. 가로 448㎝, 세로 256㎝, 높이 296㎝ 크기의 이 기념비는 동화약품 충주공장으로 옮겨져 있다.


▎2024년 준공 예정인 동화약품 신사옥 조감도. / 사진:동화약품
동화약품은 1936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손기정, 남승룡 선수가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자 승전보를 알리는 축하 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동화약품은 당시 광고에서 조선 청년의 의기충천(意氣衝天)을 알리고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는 메시지를 담아 암울한 시대 국민들의 자부심을 북돋고 일제 치하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했다.

동화약품의 역대 사장들은 남다른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대 사장인 은포 민강 선생은 1909년경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한성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일본인이 중심인 ‘한국약제사회’ 가입을 끝내 거부하기도 했다.

동화약품의 민족정신…국가 발전 힘쓴 CEO들


▎서울연통부 기념비. / 사진:동화약품
민강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 동화약방을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거점으로 활용하며 서울연통부를 운영한 것은 물론 소의학교(현 동성중·고교), 조선약학교(현 서울대 약대)를 설립하는데 애썼다. 민강 선생은 48세의 나이로 순국했으며 1963년 그 공훈이 인정돼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5대 사장 보당 윤창식 선생은 동화약방을 인수한 후 경제적 자립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 총무로 활동했다. 빈민 계층을 도운 ‘보린회’와 ‘신간회’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다양한 민족 운동을 펼쳤다. 윤창식 선생은 ‘부채표 활명수’를 한국 브랜드 최초로 만주 시장에 진출시키기도 했다. 활명수를 비롯해 29개 제품에 대한 현지 제고 허가를 취득했고 만주 땅에 자체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2. 초대 사장 은포 민강. / 3. 제5대 사장 보당 윤창식. / 4. 명예회장 가송 윤광열. / 사진:동화약품
동화약품의 7대 사장인 가송 윤광열 명예회장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재학 시절 일제에 강제 징집됐다가 탈출했다. 이후 중국 상해에 있는 정부군을 찾아가 주호지대 광복군 중대장직을 맡았다. 윤광열 명예회장은 1978년 한국 기업 최초로 생산직 전 사원 월급제를 도입해 사무직과 생산직 근로자 간 임금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choi.eunseok@joongang.co.kr

202207호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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