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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23)] '삼국사기' 온달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을 찾아서 

온달이 싸우다 전사한 장소인 아단성은 어디일까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는 아차산성이라고 주장
단양군은 온달산성이라지만 정확한 위치는 ‘오리무중’


▎서울 아차산의 온달과 평강공주상. / 사진:위키피디아
한국전쟁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은 1956년 제작된 영화 [왕자호동과 낙랑공주]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내용을 원천으로 한 것으로, 이 영화 이전에도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이미 소설이나 희곡으로 여러 번 등장했다. 이 영화 이후 호동왕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드라마·만화·소설 등이 상당히 많이 나왔는데, 국립발레단이 1988년 초연한 [왕자호동]도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국립발레단 작품은 한국 창작 발레 세계화를 위한 대표 레퍼토리로, 초연 이후 여러 차례 새롭게 선보였다.

고구려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문예물의 원천은 대체로 [삼국사기]인데, 왕자호동의 이야기만큼 일반에 널리 알려진 온달 이야기가 있다. 호동왕자 이야기에 으레 낙랑공주가 따라오는 것처럼, 온달 이야기에는 대체로 평강공주가 함께 들어간다. 1961년 나온 영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도 [왕자호동과 낙랑공주]처럼 [삼국사기]에 들어 있는 온달 이야기를 원천으로 제작한 것이다. 온달은 주로 ‘바보온달’로 불리고, 호동은 ‘왕자호동’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바보온달과 왕자호동을 주인공으로 한 여성 국극도 활발하게 공연됐다.

호동왕자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은 북한 지역이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호동왕자 관련 역사 연구를 보기 어렵지만, 온달이 신라 군대와 싸우다 전사한 곳은 남한 지역이므로 온달을 다룬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온달이 싸우다 죽은 장소인 아단성(阿旦城)을 두고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는 아차산이라고 주장하고,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은 온달산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온달을 각 지역 관광 자원으로 삼으려는 경쟁도 치열한 셈이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북벽과 남굴


▎서울 광진구 광장동 한강 북쪽의 아차산성 흔적. / 사진:위키피디아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동쪽 끝 네 고을을 호서사군(湖西四郡)이라고 해 경치 좋은 명승지로 꼽았다. 이네 고을은 단양·청풍·제천·영춘 등을 아울러서 말하는 것인데, ‘호중사군(湖中四郡)’이나 ‘사군산수(四郡山水)’ 또는 그냥 ‘사군(四郡)’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충청북도 제천시와 단양군에 속하는 이 지역에는 남한강 주변으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많아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이 유람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근래 충주댐 건설로 제천과 단양의 남한강 유역이 물에 잠겨 옛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넓은 호수에 유람선이 다니는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단양·청풍·제천·영춘 네 고을이 각기 하나의 행정단위였지만, 현재 청풍은 제천시 청풍면이 됐고, 영춘은 단양군 영춘면이 됐다. 단양8경의 하나로 유명한 도담삼봉처럼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소는 아니지만, 단양군 영춘면 남한강변에는 아름다운 석벽이 있어서 예로부터 뛰어난 경관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영춘의 북쪽에 있다고 해 흔히 ‘북벽’으로 부르는데, ‘영춘북벽’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 영춘 남쪽에 있는 천연 동굴도 일찍부터 이름이 나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 동굴을 조선 6대 동굴의 하나로 꼽았다. 이 천연 동굴을 북벽에 대응시켜 ‘남굴’이라고 불렀다.

남굴은 197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1997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는데, 1980년대 이미 조선시대부터 명칭인 남굴과 함께 ‘온달동굴’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이 동굴은 이 지역에 많이 분포한 석회암동굴로, 근래 지역 특성을 살리기 위해 기존 명칭을 바꾸는 유행에 따라 온달동굴로 완전히 이름이 바뀌었다. 남굴이라는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이다. 이 온달동굴 근처에는 문화재청이 사적으로 지정한 ‘온달산성’이 있다. 온달동굴은 관광 목적으로 이름을 지은 것인 만큼 온달의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반면 온달산성은 이 지역에서 이미 온달 관련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 만큼 순전히 허구라고 말하기 어렵다.

온달산성을 언급한 조선시대 기록을 찾아보니, 권두인(1643~1719)의 문집인 [하당집]에 관련 기록이 있다. 권두인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던 인물인데, 영남 지방에서 조정에 천거해 잠깐 관직에 몸담은 일이 있었다. 그는 50세가 되던 해 여름 영춘 현감으로 부임해 영춘 북벽과 남굴 그리고 고성을 둘러봤다. 권두인은 세 곳에 대한 글을 써서 330년 전 영춘의 명승지를 답사한 기록을 남겼다. 답사기에 따르면 그는 현감 재직 중 수시로 배를 타고 북벽과 근처 여러 곳의 명승지를 탐방했다. 횃불을 이용해 남굴 깊숙한 곳까지 탐사했고, 고성에도 올라가 자세히 관찰했다고 한다.

권두인이 고성(古城)이라고 말한 곳은 바로 온달산성이다. 그는 이 산성의 둘레가 1333척이고, 높이는 11장이며, 성 안에는 작은 땅이라도 모두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을 기록해뒀다. 그리고 이 고성을 언제 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역이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여서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권두인은 이 고장 사람들이 전하는 말도 함께 적어뒀는데, 바보온달이 고구려 왕의 사위가 돼 영춘을 방어한다고 자청했고, 이곳에서 전사했다는 내용이다.

권두인이 남긴 기록을 통해 영춘에 있는 오래된 성은 온달이 쌓은 것이고, 온달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300년 전 이 지역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춘에 전해오는 온달 이야기가 [삼국사기]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삼국사기]와 관계없이 이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온달산성과 관련한 온달 설화에는 공주와의 사랑 이야기가 없는 만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온달 이야기의 원천은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짧은 내용이 전부다.

온달 이야기 원천은 '삼국사기' 내용이 전부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 / 사진:문화재청
[삼국사기]는 고려 건국 후 약 200년이 지난 1145년 편찬된 삼국의 역사책으로, 중국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와 같은 형식의 기전체 역사 기록이다. 온달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 항목에 실려 있는데, ‘열전’은 개인 전기를 수록하는 역사 서술의 한 방식이다. 온달 이야기는 [삼국사기] 기록이 가장 이른 것인 만큼 후대 온달 관련 기록은 대부분[삼국사기]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만약 [삼국사기] 편찬자가 온달과 공주 이야기를 수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이야기 자체를 몰랐을 것이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같은 현대 많은 문예물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내용이지만, [삼국사기]에 실린 온달 이야기를 보기로 한다. 원문은 한문으로 750자 정도인데,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으로 외모가 볼품이 없어서 당시 사람들이 바보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공주가 잘 우니, 왕은 매번 장난으로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공주가 16세가 돼 왕이 귀족과 혼인을 맺으려고 하니, 공주가 자신은 온달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화가 난 왕이 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내자, 공주는 혼자 온달을 찾아가 온달과 살게 된다. 공주는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살 집과 가구를 장만하고, 온달에게 말도 사준다. 온달은 이 말을 타고 훈련을 한 다음, 국가에서 실시하는 사냥대회에 나가 상을 받고, 중국 침입에 맞서 싸워 공을 세우니, 왕이 사위로 인정하고 벼슬도 준다. 후에 신라에 빼앗긴 땅을 도로 찾으려고 신라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다. 장사를 치르려는데,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니 관이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온달 관련 기록에 조선시대 역사학자들도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을 논의할 때 온달 관련 기록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온달이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도로 찾아오겠다고 출전하면서 맹세한 말은 “계립현과 죽령 서쪽 땅을 찾아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온달의 이 말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분쟁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자료다.

중종 25년(1530) 간행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청도 연풍군의 계립령(현재는 하늘재라고 부르는데, 충청북도 충주시와 경상북도 문경시의 경계에 있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고구려의 온달이 말한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찾아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것이 이 땅이다”라고 했다. 조선시대 충청도 연풍군은 현재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이 됐는데,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 지역이다.

고구려와 신라 국경 논할 때 등장하는 온달 기록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동굴. 온달산성 밑에 위치해 붙여진 이름이며 동굴의 총길이는 700m이고 연한 회색의 석회암으로 이뤄져 있다. / 사진:문화재청
이와 같은 조선 초기 삼국시대 영토와 국경에 관한 지식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 중기의 학자 유형원(1622~1673)은 [동국여지지]에서 계립현과 죽령을 현재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있다고 했고, 한치윤(1765~1814)도 [해동역사]에서 신라의 국경에 관해 논하면서 [삼국사기] 온달 기록을 자세히 인용했다.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1712~1791)도 다른 학자와 마찬가지로 온달 기록을 인용해 고구려사를 정리했다. 그런데 안정복은 다른 학자와 달리 이 기록에 대해 자신의 사적 견해를 다음과 같이 썼다.

‘고구려 왕의 말은 일시적 희롱에서 나온 것이다. 애초 온달과 결혼을 약속한 일이 없었으니, 공주가 비록 신의를 지키고자 했으나 그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물며 공주 스스로 온달에게 갔으니, 이것은 곧 음란한 일이다. 혼례가 갖춰지지 않으면 정숙한 여인은 행하지 않는다. 왕의 딸이라는 존귀한 몸으로 이슬 맺힌 진흙길을 꺼리지 않고 홀로 들판으로 가서, 알지도 못하는 서민과 스스로 같이 살겠다고 했으니, 어찌 정숙하다고 하겠는가? 고구려 왕이 딸 하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제멋대로 하게 했으니, 그것은 국가를 욕되게 하고 풍속을 해치며, 윤리를 어지럽히고 도의를 그르친 바가 컸다. 괴벽하고 비루한 오랑캐 풍속의 소치이니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안정복은 18세기 조선의 뛰어난 지식인인데, 그에게는 온달과 공주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두 사람의 혼인이 정상적 절차를 밟아서 이뤄진 것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했다. 특히 공주가 궁궐에서 나가 온달을 찾아간 것은, 18세기 양반 지식인이 보기에는 천하고 비루한 남녀의 야합일 뿐이었다. 안정복은 한 나라 왕으로서 딸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으니 고구려 왕은 윤리와 도덕을 모르는 사람이고, 고구려는 오랑캐 풍속을 가진 국가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인들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사랑이나 여성의 적극적 행동 등을 바람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안정복의 온달에 대한 이런 평가는 지금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8세기 조선은 유교적 명분과 이념이 지배하던 사회였으므로, 안정복의 이와 같은 온달 이야기에 대한 평가는 이 시기 조선에서는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모든 윤리와 도덕이 짜여 있었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남녀의 사랑이나 부모와 자식 관계도 모두 이를 기준으로 삼아서 평가했다. 그러나 고려시대나 그 이전 삼국시대는 조선시대와 전혀 다른 사회였으므로, 그 시대의 도덕과 윤리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조선을 기준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특히 고구려 사회는 어떤 이념이 중심이었고, 또 당시 사회 윤리는 무엇이었는지 잘 연구해봐야 할 일이다. [삼국사기] 온달 이야기가 당대 고구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지역 관광 자원으로 삼으려는 경쟁도 치열해져

조선시대 역사학자들뿐 아니라 현재 삼국시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사이에서도 [삼국사기] 온달 관련 기록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근래 온달산성 발굴 조사를 통해 온달산성을 쌓은 주체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라고 보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영춘 사람들은 이 산성을 온달이 쌓은 것이라고 하고, 또 온달이 전사한 곳도 바로 이 산성이라고 주장한다. 21세기 과학적 연구와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야기가 맞서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750자 온달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동안 동화·만화·드라마·영화·뮤지컬·소설 등 숱하게 많은 문예물이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더 많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관광 상품을 개발해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애를 쓴다. [삼국사기]에 들어 있는 짤막한 이야기 하나가 역사학자들의 연구 자료가 되고, 다양한 문예물의 원천으로 쓰이고 있으며, 지역의 관광 문화를 활성화하는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따온 신데렐라 콤플렉스(Cinderella complex)라는 용어가 있는데, 미국의 작가 콜레트 다울링(Colette Dowling)의 동명 저서에서 온 말이다. 이 책에서 다울링은 여성이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에 대해 썼다. 근래 한국에서는 ‘온달 콤플렉스’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한순간 자신의 인생을 화려하게 변모시켜줄 여자를 기다리는 남성의 심리적 의존 상태(표준국어대사전)’라고 설명한다. 온달 이야기의 다양한 응용 사례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인데, 앞으로 온달 이야기가 심리학 분야까지 미치게 될 것 같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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