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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1)] 온몸 바쳐 임란 맞선 학봉(鶴峯) 김성일 

“자기 죽는 것 걱정 않고 나랏일 근심한 충신” 

퇴계 학맥의 적통 형성, 임금 앞 직언도 서슴지 않은 ‘대궐의 호랑이’
석연찮은 통신사 귀국 보고로 역사에 논란… 임란 때 의병 규합 앞장


▎김종길 종손이 종택 사랑채에 걸린 ‘문충고가(文忠古家)’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황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시급히 보고하며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복명(復命) 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물으니, 황윤길은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5권에 나오는 1591년(선조 24) 3월 1일 기록이다. 임진왜란을 다룰 때 자주 등장하는 논쟁 소재이기도 하다. 임란을 2년여 앞두고 일본으로 건너간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만나 조선의 국서를 전하고 답서를 받아 귀국한 뒤 선조 임금에게 서로 엇갈리는 보고를 한 것이다. 이 보고로 김성일은 이후 곤경에 처한다.

10월 19일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종택을 찾아갔다. 학봉은 당시 정세를 오판한 것일까. 김종길 학봉 15대 종손을 만났다. 종손은 조선왕조실록의 이어지는 기록을 말했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서애 류성룡이 학봉의 보고를 들은 뒤 진의를 확인한 것이다. 돌아보면 정사 황윤길의 부산 도착 보고는 혼란을 일으켰다. 정사는 “적병이 사신의 발자취를 밟으며 오고 있다”고 다급함을 강조해 그 말은 금세 전국에 퍼졌다. 왜군이 온다는 소문에 수령은 겁에 질려 도망하고 백성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학봉 등 통신사 일행은 서울로 올라가며 이것을 눈으로 보았다. ‘일본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대마도주 등의 첩보는 이미 1588년부터 여러 차례 조정에 보고된 바 있었다.

통신사 다녀온 뒤 잘못된 보고… 전쟁 나자 체포령


1592년 5월 결국 전쟁은 터졌다. 학봉은 병화에 대한 책임이 거론되자 조야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위협을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 상상했다. 정작 대규모 침략군이 밀려들자 조정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통신사 보고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학봉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통신사로 잘못된 보고를 한 죄를 묻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접한 학봉은 기다리지 않고 서울을 향해 스스로 나아갔다. 도중에 경상감사 김수를 만나 심정을 토로한다. “어리석은 이의 그릇된 판단으로 나라를 곤경에 빠트렸소이다. 당장 목숨을 끊어 주상과 백성에게 속죄해야 마땅하지만 나라가 위중한 만큼 경거망동할 수 없구려. 주상 앞에 나아가 죗값을 받는 게 순서일 것 같소이다. 감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오로지 왜적 토벌에만 힘써 주시오.” 그 광경을 지켜본 관리 하자용은 “자기 죽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나랏일을 근심하니 참다운 충신”이라고 했다. 김성일이 충청도 직산에 이르렀을 때 다시 어명이 떨어졌다. “김성일의 죄는 즉시 큰 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나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인지라 우선 적을 물리치는 일에 신명을 다할 것이며, 죄는 나중에 다시 따지겠노라.”

선조가 노여움을 풀고 김성일의 임지 복귀를 명령한 것이다. 어명은 당시 상황이 다급한 이유도 있지만 학봉이 꼭 오판만 한 것은 아니라는 조정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손은 당시 역사를 담담히 되짚었다. 세자 광해군과 우의정 서애는 학봉을 적극 변호했다. 선조는 김성일을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한다. 초유사는 나라가 위급할 때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의병 참여를 권유하는 역할을 한다.

학봉은 말을 돌려 함양 등지에서 격문을 돌리고 김면·정인홍·곽재우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이끈다. 고을은 피난을 떠나 비어 있었다. 왜란 초기 남쪽 장수와 병사들은 대부분 임지를 떠난 상태였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된 데다 왜군의 조총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한다는 소문까지 돌아 민심은 흉흉했다. 이런 절체절명 위기에서 극적인 반전의 계기를 만든 것은 의병의 봉기였다. 학봉은 의병을 규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은둔한 곽재우를 나오도록 만들다


▎학봉종택 앞을 지나는 도로 건너편에 새로 조성된 임진왜란 구국 활동을 담은 ‘학봉역사문화공원’ 전경. / 사진:안동시
처음에는 관군과 민병대 성격인 의병 간 협조가 이뤄지지 않았다. 서로 무시하고 불신했다. 학봉은 이 갈등을 조정하고 불화를 해소하는 데 앞장섰다.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과 경상감사 김수의 충돌이 그랬다. 홍의장군이 많은 공을 세우자 그를 시기하는 무리가 생기면서 경상감사는 곽재우 체포령을 내린다. 곽재우는 실망해 의병을 해산하고 지리산에 은거했다. 학봉은 그런 곽재우를 달래는 한편 김수에게 오해를 풀도록 했다. 둘은 화해하고 힘을 합친다.

이때부터 곽재우는 당쟁에 휩쓸리지 않는 학봉을 존경했다. 학봉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옥사한 최영경의 신원(伸冤)운동을 주도한 데 이어 학맥이 다른 곽재우·정인홍 등 경상우도 의병의 협력을 끌어냈다. 선조실록은 “김성일만이 의병과 관군을 조화시켰다”고 적었다. 김종길 종손은 “학봉의 구국 활동은 이후 종택의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졌다”고 말한다. 학봉 11대 종손 서산 김흥락은 일제 시기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과 김동삼 등 숱한 독립지사 문인을 배출했다. 파락호로 신분을 위장해 독립 군자금을 지원한 13대 종손 김용환 지사 또한 의병의 기개를 이었다.

학봉은 진주성으로 거점을 옮긴다. 학봉이 도착하자 지리산으로 피난 가 있던 판관 김시민이 달려왔다. 학봉은 병사들과 진주성을 정비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진주는 호남으로 가는 길목이다.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이 무너지고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각오로 싸워 기필코 적을 막아야 한다.”

학봉은 군사를 독려하며 사기를 높였다. 1592년 10월 왜군 3만여 명은 호남으로 진격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맞서 조선군 3800여 명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전투는 6일 밤낮 치열하게 이어졌다. 마침내 왜군이 패퇴한다. 10배나 많은 적을 물리친 것이다. 진주성 전투는 한산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남아 있다. 조선은 진주대첩으로 호남을 지켰고 이는 임진왜란을 수습하는 전환점이 됐다. 학봉은 훗날 선무원종공신1등에 오른다.

1593년 해가 바뀌어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김성일은 왜군의 재공격에 대비하며 곡기를 끊고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했다. 돌림병도 생겼다. 김성일은 역질에 걸린 백성을 돌보다가 전염돼 그해 4월 진중에서 일생을 마쳤다. 1676년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사랑방을 나와 종손과 함께 사당에 들렀다. 사당 앞뜰은 바닥 정비 공사가 한창이다. 사당 맨 왼쪽에 불천위 학봉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깨알처럼 작게 한 줄로 쓴 글자는 모두 78자. 종택 옆 학봉기념관에는 임란 당시 사용한 칼과 유세통, 가죽신 등이 전시돼 있었다. 또 도로 건너편에는 초유사로 의병을 규합하고 진주성을 사수하는 임란 활동을 담은 학봉역사문화공원이 2만 평 규모로 들어섰다.

학봉 김성일은 1538년(중종 33) 안동시 임하면 내 앞마을에서 김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6세에 아버지로부터 [효경]을 배웠다. 19세에 안동 계상서당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공부했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에서 물러나 [천명도설(天命圖說)] 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김성일은 틈만 나면 퇴계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었다. 그리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속 깊이 새겼다. 퇴계는 “김사순(士純, 학봉의 字)은 행실이 고상하고 학문은 정미하니, 나는 그에 비길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퇴계 “김성일에 비길 만한 사람 보지 못해”


▎퇴계 이황 선생이 제자 김성일에게 써 준 도통(道統)의 연원을 적은 병풍 글씨. 종부가 그 글씨에 일일이 수를 놓았다. / 사진:송의호
9년 뒤 1565년 여름 28세 김성일은 새로 지은 도산서당을 찾았다. 겨울에는 선생을 모시고 눈 덮인 천연대에 올라 시를 읊고 말머리를 나란히 해 스승을 따르며 깊은 감흥을 주고받았다. 이듬해 1월 퇴계는 김성일에게 특별한 선물을 한다.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心法)을 10폭 병풍 글씨로 써 준 것이다. 학봉 학맥이 퇴계 선생의 도통(道統)을 물려받은 징표로 받아들이는 이른바 병명(屛銘)이다. 학봉은 이 병명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심학의 도통으로 이해하며 학문의 방향으로 삼았다. 김종길 종손은 종택의 유물전시관인 운장각(雲章閣)의 철문을 열어 종부가 정성 들여 수놓은 병명을 보여 주었다. “불천위제사 때만 이 병풍을 사용합니다.”

1568년 31세 김성일은 문과에 급제한다. 4년 뒤 예문관 봉교 시절이다. 당시엔 누구도 발설하지 못하던 노산군(단종)의 묘를 능으로 격상할 것과 사육신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1573년 사간원 정언 시절이다. 경연에서 선조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는 옛날 어느 임금에 비할 수 있는가?” 정이주가 답했다. “마땅히 요임금과 순임금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가 다시 김성일에게 묻자 그가 답했다. “요순 같은 임금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스스로 성인(聖人)인 체하시어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병통이 있으니, 이게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거침없는 직언이었다. 사헌부 장령 때는 임금 앞에서 왕의 형인 하원군까지 탄핵을 서슴지 않아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로 불렸다.

학봉은 나주목사로 나가 대곡서원을 창건한다. 거기서 학풍을 진작하는 한편 퇴계의 주요 저술인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등을 간행한다. 또 퇴계 유묵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선생 친필을 모각해 [퇴계선생 수필(手筆)] 2권을 펴낸다. 퇴계의 제자로서 소임을 한 것이다. 학봉의 학통은 이후 장흥효~이시명~이현일~이재~이상정~남한조~류치명~김흥락으로 이어져 퇴계 학맥의 중심 역할을 한다.

도요토미 국서의 무례한 표현 바로잡아


▎김호석 작가가 그려 2020년 종택에 봉안된 학봉 초상화. / 사진:송의호
학봉은 나라의 체통을 중시했다. 통신사 시절엔 일본에 9개월을 머물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무례한 일본인을 꾸짖고 바로잡았다. 통신사가 도요토미를 만날 때 배례(拜禮)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논란이 됐다.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은 뜰 아래에서 절하는 정하배(庭下拜)를 주장했다. 학봉은 일본은 천황이 따로 있고 도요토미는 통신사와 동격인 인신(人臣)으로 관백(關白)이니 기둥 밖에서 절하는 영외배(楹外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칙주의자 학봉은 결국 소신을 관철했다.

또 도요토미가 조선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합하’ ‘방물’ 등 치욕적인 문구가 있었다. 학봉은 하나씩 따지며 ‘합하’를 ‘전하(殿下)’로, ‘방물’을 ‘예폐(禮幣)’로 고치도록 설득했다. 이와 함께 일본에 머무는 동안 명나라가 대국으로 자랑하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잘못 기록된 조선의 역사와 풍속을 바로잡는 [조선국연혁고이(朝鮮國沿革考異)]를 저술하고 단군을 처음 일본에 소개했다. 학봉의 이러한 자주 외교는 뒷날 방일 통신사의 전범(典範)이 됐다.

학봉은 또 통신사가 머문 상국사(相國寺)에서 퇴계학을 처음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일본 근대 성리학의 개조가 된 승려 후지와라를 만나 퇴계의 학문과 시를 소개하며 교유한 것이다. 후지와라는 야마자키 학파로 이어져 퇴계학은 이후 일본 성리학의 뿌리로 자리 잡는다.

신복룡 전 건국대 교수는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진심과 동기 그리고 마지막 행적을 고려해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학봉은 석연찮은 통신사 귀국 보고로 역사에 논란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왜란이 발발하자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다가 진중에서 생을 마쳤다. 또 관료로서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외교관으로서 법도를 거스르는 상대국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학봉은 퇴계의 고제(高弟)로서 스승의 언행을 기록하고 퇴계학을 일본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박스기사] '퇴계언행록'에서 엿보이는 학봉의 인품 - 퇴계 제자들의 기록 항목 중 가장 많은 비중 차지해

‘만인의 스승’ 퇴계 이황의 인품과 말씀 등은 [퇴계언행록]에 남아 있다. 내용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기록과 각종 문헌에서 뽑아 만들어졌다. 언행록은 모두 663개 항목으로 이뤄져 있다. 이 중 제자가 기록한 것이 548건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문헌에서 나온 것이 115건이다.

[퇴계언행록]은 663개 항목 하나하나에 출처가 밝혀진 게 특징이다. 여기에 기록을 제공한 문인은 모두 14명. 나머지 기록은 [율곡일기] 등 12종 문헌에서 인용됐으며 출전이 불명한 것은 ‘미상’으로 표기돼 있다.

제자들의 기록 항목을 보면 학봉 김성일이 198건을 차지한다. 전체 기록의 30%나 된다. “벼슬이란 도를 행하기 위한 것이요, 녹(祿)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와 같은 말씀이다.

이상은 전 고려대 교수는 “학봉은 퇴계 문인 중 사제 관계가 가장 밀접했을 뿐만 아니라 퇴계의 인간과 학문에 대한 인식이 남보다 자세하고 풍부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자료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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