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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9)] 총리 이동휘, 독단으로 모스크바 밀사를 파견하다 

이념논쟁과 주도권 투쟁에 휘말린 통합임정 

사회주의 국가 건설 위해 통합임정에 참여한 이동휘
자유민주주의로 노선통합 추구한 안창호와 대립 격화


▎1921년 1월 1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신년하례회. 둘째 줄 가운데에 이승만, 그 왼쪽으로 이동휘, 이시영, 신규식 등의 모습이 보인다. / 사진:경북독립운동기념관
이동휘는 통합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1919년 9월 18일 상해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까지 김립과 남공선이 이동휘를 수행했다. 김립과 남공선은 이동휘와 마찬가지로 함경도 출신이며 또한 한인사회당 요원이기도 했다. 이동휘를 이어 전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도 상해로 왔다. 통합임시정부의 교통총장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문창범은 상해 상황이 자신의 기대와 크게 다른 것을 깨달았다.

본래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사이에 합의 된 통합 조건은 5개였다. 첫째는 상해와 아령(俄領)에 설립한 정부들을 일체 해소하고 한성정부를 계승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두며, 셋째는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제도와 그 인선을 채용하되, 상해에서 수립 이래 실시한 행정은 그대로 유효를 인정하고, 넷째는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하며, 다섯째는 현 정부각원은 다 퇴직하고, 한성정부가 선택한 각원들에게 정부를 인계할 것이었다.

위의 통합 조건 가운데 첫째 내용대로 한다면 상해임정의 국무원과 의정원도 해소 대상이었다. 또한 다섯째 내용대로 한다면 상해임정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를 위시하여, 각부 차장들 그리고 경무국장 김구 등 모든 각원도 퇴직 대상이었다. 문창범은 그렇게 됐을 것이라 예상하고 상해로 왔을 것이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통합에 대비해 기왕의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각 부 총장만 한성정부 인선대로 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 정도 해놓고 안창호는 그것을 상해임정 개조라고 했다. 문창범은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 안창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도 하고 심하게는 안창호에게 사기당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문창범은 약속대로 상해임정의 국무원과 의정원을 완전 해소하고, 각원들도 모두 퇴직시키라 요구했다. 그것을 문창범은 한성정부 승인이라고 했다. 한성정부를 승인하기 위해서는, 대한국민의회와 마찬가지로 상해임정 역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원칙상 문창범의 주장이 맞기는 했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상해임정으로 안정됐던 모든 것이 와해되고, 자칫 끝없는 통합 분란으로 빠져들 염려도 있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상해임정의 기본 토대는 보호하면서 필요한 만큼만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것을 상해임정 개조라고 했던 것이다.

안창호에 반발한 대한국민의회 문창범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1919년 10월 11일 임시정부 국무원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창범은 개조는 약속 위반이라며 한성정부를 승인하라 주장했다. 안창호는 그럴 경우 너무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현실을 인정하고 임시정부 개조를 수용하라 주장했다. 이렇게 문창범과 안창호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승인, 개조 논쟁’이라 했는데, 이 논쟁은 사실상 통합임정의 주도권을 놓고 상해임정과 대한국민의회가 벌인 권력 투쟁이었다.

만약 문창범의 승인 주장대로 상해임정의 국무원과 의정원 모두를 해소하고, 기왕의 각원들도 모두 퇴직시키면, 통합임정의 주도권은 대한국민의회에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인력이나 자금에서 앞서는 대한국민의회이기에 국무원과 의정원에서 다수를 차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상해임정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은 비주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상해임정에서 선포한 임시헌장, 임시헌법 등도 고쳐질 가능성이 있고, 그것은 곧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국가 체제 자체의 변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안창호 견제하려 옛 동지 끌어모은 이동휘


▎앞줄 오른쪽 끝이 김립. 김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진순, 이동휘, 이극로, 김철수, 계봉우, 신원미상. / 사진: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이런 가능성을 없애고자 안창호는 승인이 아니라 개조를 주장했던 것이다. 당연히 안창호의 개조 주장은 기왕의 상해임정 관계자들이 주로 지지했다. 반면 문창범의 승인 주장은 대한국민회의 관계자들 그리고 상해임정 반대자들이 주로 지지했다. 이렇게 안창호와 문창범 사이에 개조, 승인 논쟁이 벌어지자 이동휘는 양측을 조정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양측은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이동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승인을 주장하는 문창범을 선택하면 통합임정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다. 반면 개조를 주장하는 안창호를 선택하면 통합임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동휘는 개조를 주장하는 안창호를 선택하고 통합임정의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그때가 1919년 11월 3일이었다. 문창범 그리고 대한국민의회 관계자들은 통합임정에 참여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대한국민의회를 다시 복원하고 말았다. 그것은 한국의 해외독립운동이 더는 노선통합이나 대동단결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순 목사의 [나의 자사(自史)]에 따르면, 이동휘는 총리 취임 조건을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을 모두 불러서 합동 취임하는 것으로 했다고 한다.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은 안창호가 상해로 올 때 총장직을 사임하고 물러간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합동으로 취임하겠다는 이동휘의 조건은 일면 순수한 면과 일면 정략적 면이 있었다.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은 모두 기호 출신으로 평안도 출신인 안창호와 여러 면에서 대립적이었다. 만약 문창범 등 대한국민의회 출신들이 통합임정에 참여했다면, 그들은 안창호보다는 이동휘를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역 연고, 나아가 이념적 배경 등에서 대한국민의회는 안창호보다는 이동휘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문창범 등 대한국민의회 출신들은 승인, 개조 논쟁을 벌이다가 모두 떠나고 말았다. 상해임정에 반대하던 박용만, 신채호 등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이동휘만 총리에 취임할 경우, 기왕의 안창호가 만들어놓은 청년내각에서 상징적 역할만 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동휘는 안창호의 청년내각을 견제하면서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으로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을 지목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신규식을 초청하러 신익희가 항주로 갔고, 이동녕과 이시영을 초청하러 현순이 북경으로 갔다.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은 통합임정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상해로 왔다. 이렇게 해서 1919년 11월 3일 상해에서 통합임정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등의 합동 취임식이 거행됐다. 한성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지명된 박용만과 군부총장으로 지명된 노백린 그리고 교통부 총장으로 지명된 문창범 등은 승인을 주장하며 참여하지 않았다. 학무총장으로 지명된 김규식은 미국에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있던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으로 옮겼다.

갈등의 씨앗 품고 출범한 상해 통합임정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1917년 11월 7일, 대중연설 중인 레닌의 모습.
이렇게 해서 불완전하나마 러시아 연해주의 대표자 이동휘, 중국 만주의 대표자 이동녕과 이시영 그리고 미주(美洲)의 대표자 안창호와 이승만 등이 함께하는 통합임정이 출범하게 됐다. 이 같은 통합임정을 현순은 1919년 12월 24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금번(今番) 내각은 함경(咸慶)이 악수(握手), 연몌(連袂)하여 황평(黃平)을 대항하는 모양”이라고 표현했다. ‘함경(咸慶)이 악수(握手), 연몌(連袂)’란 ‘함경도와 경상도가 연대’라는 뜻이고 ‘황평(黃平)을 대항’이란 ‘황해도와 평안도에 대항’이란 의미이다. 요컨대 함경도의 이동휘를 중심으로 경상도 사람들이 합세해 평안도의 안창호를 중심으로 황해도 사람들이 합세한 기왕의 상해임정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 통합임정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통합임정의 한계 또는 지역적 갈등이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임정의 출범은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의 최고 지휘부가 출범했다는 면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런 통합임정의 출범으로 인한 감격을 안창호는 “오늘 나의 기쁨은 극도에 달하여 마치 미칠 것 같다. (중략) 오늘에 이 총리 이하 3총장이 이곳으로 모여 취임케 됐다. 이후로 우리 민족의 통일이 더욱 공고케 되고 우리의 사업은 더욱 숙성하리라. 내가 비재(菲才)로 여기 와서 고독하게 책임을 전담할 때 스스로 송구함을 금치 못하다가 오늘을 당하니 나 개인의 기쁨도 극하다”고 표명했다. 안창호는 이제 자신을 비롯해 이승만,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해외독립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 통합임정에 모였으니 이들이 대동단결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 낙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사람들을 잘 몰랐기에 가능한 낙관이었다. 이동휘와 그를 수행해온 김립, 남공선 그리고 이동휘를 뒤따라 상해로 온 한형권 등은 과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함께하던 동지들이었다. 안창호는 그들이 여전히 신민회 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졌으리라 생각하고 신뢰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그들은 한인사회당이라고 하는 한국사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을 창당하고 주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민회 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레닌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혁명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레닌의 혁명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레닌의 혁명 사상은 다양한 형태로 표명됐지만, 특히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제3 국제공산당)을 창설하면서 표명한 혁명 사상이었다. 레닌은 1917년 4월 볼셰비키당(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2 국제공산당을 대체할 새로운 국제공산당, 즉 제3 국제공산당 창설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따라 볼셰비키당은 제3 국제공산당 창당을 결의했고, 우여곡절 끝에 1919년 1월 세계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초청장이 발송됐다. 뒤 이어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제3 국제공산당, 즉 코민테른 창설대회가 개최됐다. 당시 레닌은 코민테른의 목표와 전략 7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에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코민테른의) 목표와 전략들

① 현시대는 전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해체와 붕괴의 시대이다. 만약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한 자본주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모든 유럽 문명은 자본주의와 함께 몰락할 것이다.

② 현재 프롤레타리아의 과업은 즉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 장악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③ 이 새로운 권력기구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구체화해야 한다. (또한 준(準)프롤레타리아의 몇몇 지방들과 가난한 마을에서도 그래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독재는 착취계급들의 제도적 탄압을 위한 기구가 돼야 하며 그들의 재산몰수를 위한 기구가 돼야 한다. (중략)

④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유재산의 창출과 전환이라는 의미에서, 즉각적인 자본 몰수를 위한 지렛대이자 개인 재산의 폐지를 위한 지렛대가 돼야 한다. (중략)

⑤ 사회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내외의 적들로부터 사회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다른 국가 부분을 원조하기 위해, 부르주아와 그들의 기구들을 완전히 무장해제하고 프롤레타리아를 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⑥ 오늘날 세계 상황은 서로 다른 분야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밀접하면서도 가능한 연대와 함께 사회혁명이 이미 성취된 국가들의 완전한 통합을 요구한다.

⑦ 기본적인 투쟁 수단은 프롤레타리아의 대중 행동으로서, 그 대중 행동은 곧바로 자본의 정치적 권력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John Lewis Evans, “The Communist International, 1. aims and tactics” [The Communist International, 1919-1943]1, 1973)

레닌 혁명 사상 신봉한 이동휘와 한인사회당

위에서 나타나듯, 레닌은 1919년 당시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해체와 붕괴의 시대이자,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로써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구원할 시대라고 봤다. 아울러 파리강화회의에서 논의 중이던 ‘국제연맹’ 창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연명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레닌은 하루속히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국제연맹을 끝장내고자 1919년 3월 코민테른을 창설했던 것이다.

이런 레닌의 생각은 불교 말세론 또는 기독교 종말론을 연상시킨다. 죄악이 가득한 말세에 미래 구세주인 미륵보살 또는 재림 예수가 강림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런 종교적 구원 논리를 레닌은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변형해 부르주아 탐욕으로 가득한 말세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구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레닌의 혁명 사상은 다분히 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구원의 주체가 미륵보살 또는 재림 예수 같은 신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면에서 인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이다. 인간이,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미륵보살이나 재림 예수처럼 완전한 존재라면,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 사상은 성공했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과연 미륵보살이나 재림 예수처럼 완전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기도 하지만 무지하고 부족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갈라진 통합임정


▎한인사회당 중앙위원을 지낸 사회주의 운동가 박진순이 192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가한 모습. 박진순의 오른쪽에는 레닌이 앉아 있다. / 사진:레닌사진집
1918년 4월 창당된 한인사회당 주류 역시 레닌의 혁명 사상, 특히 코민테른 창설 사상을 신봉했다. 일제 식민지하의 암담한 조국 현실 그리고 말로만 돕고 현실적으로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서구열강에 대한 절망감 등이 그들로 하여금 레닌 혁명 사상을 신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인사회당이 창당됨으로써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 사상이 한국 현대사, 나아가 동북아 현대사에 본격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됐다. 한인사회당은 코민테른에 가입하기 위해 1919년 4월 당 대회를 개최하고 박진순, 박애, 이한영 3명을 선발해 모스크바로 파견했다. 뒤이어 1919년 7월 당 간부회의를 열고 상해임정 참여를 결정했다.

당시 한인사회당이 상해임정 참여를 결정한 이유는 상해임정의 임시헌장에 공포된 국가체제와 대외노선, 즉 제1조의 ‘민주공화제’와 제7조의 ‘국제연맹에 가입함’을 공감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레닌식 소비에트공화국 건설과 코민테른 가입을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상해임정의 국가체제와 국가노선을 전복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국가를 조직’하고, ‘일체의 계급을 타파’하며, ‘토지 및 일체의 생산업을 공유(公有)’하겠다는 한인사회당 강령에 이미 명시돼 있었다. 또 1919년 7월 당 간부회의 때 상해임정 참여에 반대하던 이동휘에게 김립이 “민족기관에 들어가서 힘써야 제국주의와 싸울 수 있다”고 설득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김립의 발언은 상해임정을 위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잠시 참여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전술이었다.

이런 입장으로 통합임정의 초대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가 첫 번째로 한 일은 한형권 밀사를 독단으로 모스크바에 파견한 것이었다. 1919년 12월에 포타포프라는 러시아 공산당 공작원이 상해에 왔는데, 그는 상해임정 요원들에게 ‘국제연맹 그리고 연합국 정부에 대한 희망이 무익하다’면서 레닌 정부와 연대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안창호는 만약 레닌 정부와 연대하면 세계 열국의 동정을 잃을 것이라 생각해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탐색차 여운형과 안공근을 밀사로 파견하기로 하고 1920년 1월 22일 국무회의 의결까지 마쳤다. 그러나 이동휘는 총리직을 이용해 한인사회당 당원이자 자신의 비서인 한형권을 밀사로 임명해 독단적으로 파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통합임정은 안창호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과 이동휘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격렬한 이념논쟁과 주도권 투쟁 속으로 휘말려 들게 됐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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