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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0)] ‘마지막 성리학자’ 한주(寒洲) 이진상 

이단으로 몰리면서도 주리설(主理說) 일관하다 

명문가 성주 한개마을 출생, 주자와 퇴계학 따르며 성리학 천착
굵직한 제자들 배출하며 한주학파 형성… 저술만 수백여 권


▎한주 이진상선생 기념사업회 이명식 회장이 한주종택 조운헌도재 앞에서 건물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성리학은 단순화하면 ‘성즉리(性卽理)’의 학문이다. 본성이 곧 이(理)라는 것은 정자·주자에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이르기까지 불변의 명제였다. 여기서 퇴계는 “마음은 이와 기의 합체(心合理氣)”라 했고 율곡학파는 “마음은 기(心卽氣)”라고 봤다.

명나라 왕양명(王陽明)은 다시 ‘심즉리(心卽理)’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마음에 달렸으므로 오직 마음에서 법칙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의 논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양명학은 이후 성리학자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성리학의 본질을 둘러싼 거대한 논쟁이다.

조선 후기 주자와 퇴계를 따른 한 유학자가 ‘심즉리’를 들고 나왔다. 경북 성주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이다. 9월 18일 한주이진상선생기념사업회 이명식 회장과 함께 성주 한개마을을 방문했다. 대구대 교수를 지낸 이 회장은 이동하는 동안 쉽지 않은 한주의 심즉리 사상을 설명했다.

한개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이들 마을은 모두 집성촌이면서 우뚝한 유학자가 있다. 하회마을은 임진왜란을 수습한 서애 류성룡을 배출했고, 양동마을은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한주는 한개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주는 44세에 [심즉리설]을 쓴다. 그는 왕양명의 심즉리로 기호학파의 심즉기를 비판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문제로 삼은 쪽은 퇴계를 따르는 영남학파였다. 경북대 이세동 교수는 “한주의 심즉리와 양명의 심즉리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고 설명한다. 양명은 ‘심’에 초점을 맞추었고 한주의 주장은 ‘이’에 방점을 뒀다는 것이다. 양명은 마음을 떠나서는 사물의 이치도 없고 만물도 있을 수 없다며 ‘심의 절대성’을 주장한 반면 한주는 마음에는 이와 기가 함께 있지만 주재하는 것은 이라고 해 ‘이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즉 한주의 ‘심즉리’는 퇴계의 ‘심합리기’를 주리적 측면에서 더욱 강화한 학설이라고 덧붙인다. 한주는 이 이론으로 생전에는 곤경에 처했고, 죽어서는 치욕을 당했다. 곤경은 새로운 이론을 내세워 명예를 구한다는 비난이었다. 양명학에 경도됐다는 오해도 받았다. 치욕은 정도가 더 심했다.

주리세가(主理世家)의 별당, 조운헌도재


1897년 [한주집]이 25책으로 간행됐다. 한주 사후 11년 만이다. 직후 [한주집]이 도산서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도산서원은 문집을 받지 않고 되돌려 보낸다. 논조가 주자·퇴계 학설과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02년 5월에는 한주 학설을 이단으로 규정한 통문이 성균관과 전국 유림에 발송된다. 그해 11월 상주 도남서원에서는 유림 도회가 열렸고, 급기야 [한주집] 한 질이 불태워졌다. 책 ‘장례식’이다. 한주의 아들 이승희는 제기된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시비(是非)는 남았다.

한개마을은 영축산 자락에 들어서 있다. 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마을 맨 위쪽에 한주종택이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바로 오른쪽이 사랑채였다. 20평 크기 사랑채는 보수공사로 ‘主理世家’(주리세가) 편액 등은 보이지 않고 작업 비계 등이 설치돼 있었다. 사랑채를 지나 오른쪽 문을 나가니 널찍한 뜰에 정(丁)자 모양을 한 세 칸 한옥과 연못이 나타났다. 별당 정사(精舍)다.

별당에는 건물 이름이 넷이나 걸려 있다. 오른쪽 앞으로 나온 누각은 ‘寒水軒’(한수헌)이고 그 안쪽엔 ‘寒洲精舍’(한주정사)란 편액이 보인다. 또 별당 앞 노송 뒤로 왼쪽 방과 마루 쪽에는 큼지막한 ‘祖雲憲陶齋’(조운헌도재) 편액이 걸려 있고, 누각 왼쪽에는 이 이름을 줄인 ‘雲陶齋’(운도재) 작은 편액이 있다. 이명식 회장이 ‘조운헌도’의 뜻을 설명했다. “운곡(雲谷) 즉 주자를 근본으로 하고, 도산(陶山) 즉 퇴계를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한주가 30세에 직접 써서 서재에 건 편액이다.

한주에게 퇴계는 각별했다. 한주는 20세에 도산서원을 알묘하고 퇴계 선생을 사숙(私淑)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는 이후 늘 이렇게 말했다. “공자를 배우려면 먼저 주자를 찾지 않으면 문으로 들어갈 수 없고, 주자를 배우려면 먼저 이자(李子)에게 찾지 않으면 그 계단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는 퇴계를 높여 이자로 불렀다. 면우 곽종석은 한주 행장(行狀)에 “선생은 일생 주자와 퇴계의 글에 힘을 쏟아 차 마시고 밥 먹듯이 읽었고 자신의 말처럼 외우셨다”고 적었다. 그런 한주에게 퇴계의 후학이 아닌 이단의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조선 유학의 마지막 지킨 한주학파


▎한주 이진상을 기리는 성주 삼봉서원. 한주와 함께 곽종석과 이승희가 배향돼 있다. / 사진:송의호
한주는 일찍이 정사를 지어 그곳에서 학문을 강마하려 했으나 형편이 궁핍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 이승희는 그 뜻을 이루려 지금의 자리에 착공했으나 나라가 망하면서 1908년 만주로 망명을 떠난다. 결국 손자 이기원이 1910년 조운헌도재를 완공했다. 이 회장이 이후를 설명한다. “심산(김창숙) 아버지가 당시 방황하던 아들을 이곳에 데려다 놓아 큰 인물의 발판을 만듭니다. 정사는 또 한주 제자들이 드나들며 독립을 위해 파리장서 등을 논의하는 공간이 됩니다.”

한주는 굵직한 제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그가 [심즉리설]을 발표한 9년 뒤 1870년 봄 허유가 배움을 청한다. 이후 당대 유림을 움직이던 이른바 주문팔현(洲門八賢)이 속속 한주 문하로 들어온다. 그해 겨울에는 의정부 참찬을 지낸 곽종석이 입문한다. 1872년에는 이정모가 들어오고 1874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이두훈이 합류한다. 또 1878년에는 장석영과 김진호가 문하에 들어왔다. 여기에 아들 이승희도 포함된다. 이들이 입문한 시기는 한주의 학문적 열정과 성과가 절정에 이른 50대였고 특히 [심즉리설]이 세상에 알려져 논의가 분분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심즉리설]을 따랐고 그 뒤 이 학설을 지키는 한주학파를 형성한다.

조문헌도재에 올라 기문을 살핀 뒤 정사를 둘러봤다. 한주정사 오른쪽 연당(蓮塘)엔 물이 말라 있었다. 연못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다. 중국을 드나들며 사업을 한 주손은 수년 전 숱한 문제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들은 도시로 나가 있고, 종택엔 종부 혼자 남아 안채는 잠겨 있었다. 용케 문을 열고 종부와 겨우 인사만 나눴다.

한주 이진상은 7세에 [사략]을 읽는 것으로 학업을 시작해 13세에 이미 여러 경전에 통했다고 한다. 이어 제자백가의 책을 두루 읽어 학자로서 소양을 고루 갖췄다. 17세엔 숙부 응와 이원조가 그를 성리 학문으로 이끌었다. 이때부터 한주는 송나라 학자들이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파고들었다. 이후 그는 ‘성명도설(性命圖說)’을 지어 주리(主理) 견해를 확고히 한다.

한주종택을 나와 가학을 전수한 응와 종택을 찾았으나 대문은 잠겨 있었다.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는 훗날 “우리 종족 500년 만에 비로소 이 조카가 있다”고 할 만큼 한주를 자랑스러워했다. [영남의 유학자들]을 쓴 하겸진은 “선생은 처음에는 응와에게서 수업했고 중년에는 정재 류치명 선생을 뵙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변론을 나누다가 마침내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고 정리한다.

“1각도 쓸데없이 보낸 적 없어”


▎성산 이씨 집성촌인 경북 성주 한개마을. 마을 맨 위쪽에 한주종택이 있다. / 사진:성주군
이진상은 27세부터 33세까지 7년 동안 과거에 응시한다. 27세에 그는 증광문과 초시에 장원한 뒤 33세에 예조의 증광문과 복시를 치러 상경한다. 그때 마침 경주부윤으로 있던 응와가 암행어사의 탄핵으로 이조에 소환됐다. 한주는 그 길로 시권을 제출하지 않고 귀향했다. 부형이 죄로 혐의를 받는데 조카가 영예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응와의 일은 무고로 밝혀졌지만, 한주는 이후 과거시험을 단념했다.

이후 한주는 저술과 강학, 산수유람 등 학자의 길을 걷는다. 저술은 해를 거르지 않을 정도였다. 이승희가 남긴 ‘행록(行錄)’에 학자 아버지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일생 1각(刻)도 쓸데없이 보낸 적이 없고 한 마디도 쓸데없는 얘기를 하신 적이 없었다. 아침이면 세수하고 반드시 관대를 갖춰 사당을 배알했으며, 손님을 접대하는 경우가 아니면 잠시 거실에 들르신 뒤 곧바로 경서를 가르치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일로 종일을 보냈다. 밤이면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있기를 좋아하셨다. 혹 촛불을 켜면 반드시 하는 일이 있으셨다.”

그 무렵 나라는 세도정치로 민생은 피폐해지고, 서구 열강의 진출로 소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처에 민란이 일어나고 유교적 가치관은 흔들렸다. 한주는 조정에 장문의 대책문을 올렸으나 회답은 없었다. 한주는 1866년 다시 옛 제도를 가감해 폐단을 극복하고, 국가와 민생을 살릴 [묘충록(畝忠錄)]을 썼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한주는 영남 유생 대표로 추대돼 철회를 청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876년 일본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온다. 한주는 고을에서 회의를 열어 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킬 창의를 논의했으나 강화가 성립되자 그만두었다. 한주는 이후 [춘추집전(春秋集傳)] [춘추익전(春秋翼傳)]을 저술하고 61세엔 [이학종요(理學綜要)]를 지었다. [이학종요]는 특히 당시 기학(氣學)과 양학(洋學)이 만연하자 절대가치인 이(理)를 확립해 유교 이념의 동요를 막고자 쓴 책이다. 한주가 일생 남긴 저술은 모두 135권.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역사·의약·성력(星曆)·산수(算數) 등을 다뤘다. 그는 “글이란 볼수록 고칠 곳이 나오니, 손수 베껴 쓰지 않으면 불편하다”며 일일이 직접 썼다. 문풍(文風)은 한개마을에 이어진 것일까. 이명식 회장은 “65호쯤 되는 마을에 지금도 교수와 의사 등 박사가 50여 명쯤 나왔다”고 말했다. 한주종택에는 본래 고서 2000여 권이 내려왔다. 그런데 1950년대 몽땅 도난당했다가 범인이 잡혀 절반쯤 회수했다. 나머지는 인장 등이 없어 지역 대학 도서관 등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심즉리설’ 55년 만에 오해 풀리다


▎한주 이진상의 초상화. 그는 일생 135권의 서책을 저술했다. / 사진:한주이진상선생기념사업회
1884년 조정은 67세 한주를 의금부도사로 임명했다. 한주는 임명장이 도착하자 “강가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처음이자 마지막인 벼슬을 물리쳤다. 그리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사림이 장례를 주관했으며 조문객은 2000명을 넘었다.

한개마을을 나와 한주의 묘소를 찾았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문방농공단지가 들어선 뒷산이다. 길은 가파르다. 묘소는 여태 벌초하지 못해 진입이 힘들었다. ‘한주이선생’으로 새겨진 묘비에 묘역은 소박했다. 서서 예를 올렸다.

1897년 문인들은 한개마을 서쪽에 삼봉서당을 세웠다. 한주가 세상을 떠나고 11년이 지나서다. 한주가 ‘심즉리설’을 쓴 것은 1861년이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1916년 도산서원은 “이 일은 도산서원의 공의(公儀)가 아니라 한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때 기록을 회수해 모두 없앴다”는 글을 보내왔다. 이단이란 긴 오해가 마침내 해소된 것이다.

2016년엔 유림이 삼봉서당에 다시 사우(祠宇)인 현도사(見道祠)를 세우고 서당을 삼봉서원(三峰書院)으로 중창했다. 연밭을 지나 봉우리 셋인 삼봉산자락 서원에 들렀다. 곽종석은 백천(白川)과 이천(伊川)이 흘러 삼봉을 감도는 이수삼산(二水三山)의 자리에 서당이 들어섰다고 적었다.

이명식 회장은 “이곳은 한주 선생이 생전에 노년을 보내고 싶어 손수 마련한 땅”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엔 한주를 주향으로 곽종석과 이승희가 배향돼 있다. 서원 앞은 전망이 탁 트여 최근 별자리 관측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곽종석은 개양 즉 성리학의 빛이 이곳에서 열리기를 기원했다.

한주는 개항기 성리학의 본질에 천착한 초야의 우뚝한 유학자였다. 그는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 책 수백 권을 저술했다. [행록]에 남은 독실한 실천은 가르침이 되어 숱한 문인이 그를 따랐다.

[박스기사] 서구 열강에 맞선 유학의 수호자 - 천주학의 모순 지적한 명문장 남겨

한주 이진상은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조선을 압박하자 유학의 수호자가 된다. 당시 천주학은 나라 안에 퍼지고 있었다. 1867년 숙부 응와 이원조가 상소한다. 병인양요 이듬해다. 상소는 초하루마다 실시하는 강의인 삭강(朔講) 규정을 각 고을에 반포해 바른길로 돌아가는 계책으로 삼으라는 내용이었다.

응와는 조정에 건의한 뒤 먼저 성주에서 시행했다. 한주는 숙부를 모시고 성주 회연서원에서 [대학]을 강론하고 강록을 펴냈다. 발문이 흥미롭다. “[대학] 한 권은 척사(斥邪, 사악한 것을 물리침)의 근본으로 삼을 만하다. 명덕(明德)은 착한 본성을 회복할 수 있고,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함)은 더러움에 물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충(忠)에 머무르면 교황이니 교주니 하며 감히 무군(無君·임금을 업신여김)에 빠지지 않고, 효를 지니면 영혼과 육신을 이야기하면서 차마 무부(無父)에 빠지지 않게 된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하면 예수가 승천해 천주가 됐다는 것이 헛된 말이고 선조를 받드는 예법이 천리에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성의정심(誠意正心)하면 저들의 속이는 말이 헛것이 돼 뿌리부터 넘어질 것이다. 혈구지도(絜矩之道,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를 알면 사람을 협박하며 억지로 교리를 전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관찰사가 경탄해 강론 서문을 적어 장려하고 쌀과 고기를 보내 선비들의 모임에 쓰도록 했다. 곽종석이 지은 한주 행장(行狀)의 내용이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11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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